"나의 영원한 스승"
-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님이 미국 여인과 결혼해 혼혈아가 된 아들 '김요셉' 목사의 저서(著書)인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에서 -
어린시절 그의 소원(所願)이 검은 머리에 황색(黃色) 피부가 되는 것이었을 만큼 혼혈아(混兒)라는 이유로 친구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던 그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수원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한국 학교를다녔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여름,
안식년(安息年)이 되어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故鄕)인 미국의 '미시건'으로갔습니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외롭게 사신 미국인 어머니와 혼혈아(混血 兒)의 꼬리표를 달고 한국 학교를다녔던 저와 또 동생에게 안식년(安息年)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膳物)과도 같았 습니다
저와 동생 우리 형제는 미국교회의 선교관(宣敎館)이 있는 학교에 전학(轉學)하게 되었습니다.
첫 등교하는 날, 학교 정문이 가까워지자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가면 아이들이 날 좋아할까?
생김새는 미국 애들과 비슷하니깐 날 놀리는 아이들은 아마 없겠지?
공부는 따라갈 수 있을까?
엄마랑은 영어로 말은 했지만 영어 공부를 해 본 적도 없고 영어책도 읽을 줄 모르는데…...''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저는 4학년 교실에 배정 되었습니다.
첫 시간은 영어 단어들의 스펠링을 복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두툼한 단어 카드를 손안에 감추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쪽 앞줄부터 시작할 거야!''
''스프링” 그랬더니 맨 앞줄 아이가 일어나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S, P, R, I, N, G”
“좋아, 다음은, 뉴스페이퍼”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들을 줄만 알았지 스펠링은 모르는데 ..... 어떻하지?'
'첫날부터 창피를 당하면 앞으로 어떻게 학교를 다니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속으로 별별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다음 단어를 읽기 전에 선생님이 다음 차례 아이를 쳐다보다가 저와 딱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단어 카드를 내려놓으시고는 저를 불렀습니다.
“요셉, 앞으로 나올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얼굴이 빨개져서 앞으로 나갔더니 선생님은 저더러 칠판 앞에 놓인 분필을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우리 담임 선생님 진짜 인정(人情)도 없으시고 잔인(殘忍)하시네.
이제 나는 웃음거리가 되거나 바보가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칠판을 향해 등을 돌리는 순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어제 얘기했지.
오늘 우리 반에 새로 들어온 요셉인데, 요셉은 한국에서 온 선교사님 자녀야. 요셉은 한국이란 곳에서 태어나서 한국어를 아주 잘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볼래? 선생님 이름은 ‘샤프’야.”
나는 칠판에 선생님 이름 '샤프'를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습니다.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요.
칠판에 선생님 이름을 쓰고 딱 돌아섰는데 교실에 난리가 났습니다.
반 친구들은 내가 무슨 이집트 상형문자를 쓴 고고학자인 줄 아는지 탄성(歎聲)과 환호(歡呼)를 교실이 떠나갈 듯이 질렀습니다.
용감한 남자 애가 손을 들고는 말했습니다.
''요셉아, 내 이름도 한국말로 써줄래? 내 이름은 '탐'이야.”
"내 이름도... " "나도 나도..." "나는 '메리'야" "나는 '수잔'이야....."
내가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감탄(感歎)하며 박수를쳤고 교실 안은 난리(亂離)가 났습니다.
나의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시고 낮으막히 그리고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요셉이 한국 글을 참 잘쓰지? 그리고 한국말도 참 잘 한단다.
너희들도 외국의 대사(大使)나 또는 선교사(宣敎師)가 되려면 다른 나라 말을 이렇게 잘해야 하는 거야, 알았지?"
그 때 저는 한줄기 따뜻한 빛을 느꼈습니다.
환하고 고운 빛이 내 안 어딘가에 숨어있는 어두움을 말끔이 몰아냈습니다.
1년 내내 우리 반은 물론 다른 교실에서도 ‘한국말로 이름 쓰기’가 대유행이 되었고 저는 학교의 대 스타(star)로 급부상(急浮上) 했습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저는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영어 못하는 파란 눈을 가진 아이’가 될 뻔했던 저를 선생님은 ‘한국어 즉 외국어 잘하는 아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샤프 선생님은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웬만한 선생님 같았으면 전학(轉學)오고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은 문제아동(問題 兒童)이고 진도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아이로 생각해서 나 같은 아이는 아무도 안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반 담임 샤프 선생님은 저를 다르게 보셨습니다.
얘가 뭘 못하는가 무슨 말썽을 피우나 얘는 무슨 문제가 있을까를 본 게 아니라 제 안에 깊숙이 숨어있는 저를 보셨고 또 제가 남과 다른 점을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저를 처음 보신 샤프 선생님의 관심은, 학습 진도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존재가 더 중요했습니다.
저를 꿰뚫어 보실 줄 아는, 그렇지만 저를 사랑하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못하는 것도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잠재력을 더 알고 계셨습니다.
한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시고 인생을 밝은 빛 가운데로 선도(善導)해 주셨습니다.
혼혈아로 늘 열등감(劣等感)에 시달려 온 저에게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심어준 선생님은 저에게 큰 자신감까지 심어주셨습니다.
그 이후 제가 대학 진학후 내내 장학금을 탈 수 있었던 것도, 또한 트리니티 대학원 기독교 교육학과에 역사상 최연소로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던 것도 그때 얻은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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