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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매미 한 마리가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매미는 하마 그리운 것의 그 끝에 닿았겠다
폭포를 뚫는 소리꾼의 독공처럼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도 좋겠다
저 울음 가락에 장단 넣으려는 듯
하늘엔
소리북 같은 낮달이 하나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다
참나무과에 속하는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시나무라 불리게 했을까 청어처럼 몸속에 수많은 가시를 감추고라도 있을까 아주 먼먼 옛날 사람들이 가시나무라 이름붙일 적엔 가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무성하게 몸을 덮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가시를 없앴거나 몸속에 감춘 것이 분명한데 아마 이름 속에 남아있는 가시의 흔적을 지우느라 오랜 세월 밤낮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 벌서며 아무도 이 가시에 다치지 마라 상하지 마라 기도를 해서 가시 대신 땀방울 같은 커다란 눈물방울 같은 도토리가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새가 되었든 다람쥐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후드득 제 열매를 뿌려주며 지옥을 천국으로 견디는 오오랜 가르침을 실행하느라 참나무과에 속하는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는지도 모른다
나마스테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코끝이 찡하고 나를 울렸다 내 안의 신이 나를 깜짝 깨웠기 때문이다 3억3천만의 신이여 그 신들이 부르는 또 3억 3천만의 신이여, 그 신이 부르는 또 다른 3억 3천만의 신이여 모든 그대여 신이여나마스테!
여시아문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빚
한 걸인이 다가와
내 발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제 이마에 가져다가 댔지
경배의 뜻이라고 하네
실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누더기 옷에 덕지덕지 땟물이 흐르는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러나 그대여 알고 보면 이 나라에선 외국인인 나도
사성에 들지 못하는 똑 같은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런데 경배라니
나는 외면했네
내 지폐는 너무 고액권이었고
몰려들기 시작한 그대들은 너무 많았으므로
외면한 내 눈엔 희고 눈부신 힌두사원이 눈에 들어왔고
그 풍경이 스치며 가슴에 깊은 칼금을 그었네
어떻게 왔는가는 말할 수 있지
비행기 타고 왔고 그 이전에 어머니 탯줄을 타고 왔지
하지만 왜 왔는가는 알 수 없었지
언젠가 다시 와야 한다면
그땐 한 마디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겠네
나 그대를 외면하여 복 짓지 않았고
그대 나 같은 불가촉천민에게 경배로 복 지었으니
다시 어느 세상에서 만나거든
이제 내가 그대 발에 입 맞추겠노라고,
그대, 싯타르타일지도 모를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내 비유법이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삼겹살 함께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목련 후기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문 밖에서
흰두사람 죽으면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을 한다
밤새 타고 남은 재를 강물에 쓸어넣기 전
한 무리 불가촉천민들이 재를 뒤적인다
사리를 수습하는 줄 알았다
그게 그러니까
죽은 자의 시신에 박혔던 금이빨이나 금가락지를 찾는 거라고 했다
힌두의 삶을 묶고 있는 거대한 쇠사슬을 보았으나
죽은 자도 유족도 말 없고
저 불가촉천민들도 아무 말 없다
이렇게 관망하고 생각하는 나는 객일 뿐
그 날도 갠지스강은 말없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물에 목욕하고 마시고
소 떼들은 어제처럼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거리를 활보하였으며
소똥은 말라서 그들의 연료가 되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죽은 자의 재가 다시 산자의 밥이 되는
아니, 재와 밥과
똥과 기름의 경계가 없는 여기서
그들이 아니고 객으로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저들이 내 가슴에 둘러진 쇠사슬을 볼지도 모른다
갠스강 강물위에 떠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면서
나만 어느 고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문밖에 서 있는 듯싶어
문득 소름 돋도록 외로웠다
푸르른 욕
팔순의 울 어머이
터앝 고추모종에 물을 주심서나
하난님은 뭐 하신댜
호랭이가 칵 물어갈녀르 날씨
무신 가물이 이리 질댜
그 욕, 하도나 싱싱헤서 청량헌 시 한 편이 따로 없드랑개
날씨는 하난님 것이어서
하난님도 놀랐는지 아칙녘 지나서 뜬금없는 비 한 둘금 뿌려주등마
하난님도 무신 진지꼽쟁이 매이로 비를 뿌레도
포도시 삐액이 눈물맨큼만 주시네
참, 옘벵 오살헐.......
울 어머이 서늘헌 욕 덕택에
가매솥에 깜밥 눌데끼 몰라가던 밭두덕
어린 고추모종들이
섬닷헌 대로 알탕갈탕 일어서덜 않았것어
가물 끝 울 어머이 따다주신 그 풋고추에
내 빈혈의 쎄끝이 얼얼허등마
어디 가서 시 쓴다는 말 못 허것어
거미
거미는 가끔 부유하는 먼지나 걸려드는
구석진 허공에 그물을 건다
미풍에도 쉬 찢어지는 그물을
깁고 손질하며
적빈을 맨몸으로 견딘다
탈피라고 하던가,
그나마 야윈 제 몸의 껍질을 벗어던지며
해탈을 기도하듯
그 바람 허공에 저를 묶어놓고
매달려 밤을 밝힌다
허공에 살면서 날개가 없는 까닭은
제 그물에 제가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날개를 가진 것들은 그 허망한 꿈 때문에
늘 그물에 걸리곤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라는 듯
제가 잡은 것들의 날개를 땅에 되돌려준다
거미는
걸어놓고는 몇 번 쳐다보지 않은 우리 집 가훈 액자 위에
동심원의 그물로 집을 지어놓고
우주의 중심이 바로 여기라고 일러주듯
그 한 가운데에 마침표처럼 앉아있다
내가 가끔 이 놈의 집구석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구석도 구석진 자리에
부추 이야기
우리 집 맞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노 보살님 한 분 사시는데
텃밭에는 없는 채소가 없다
내 좋아하는 것을 어찌 아셨는지
벌써 몇 번째 햇부추를 솎아다 주시었다
부추, 정구지라고도 하고 솔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또 파옥초라고도 한다는데
그러니까, 집을 부수는 풀이라는 뜻이렸다
- 그 옛날 아낙네 둘이서 밭을 매는데 한 아낙네가 남편이 밤을 무서워한다고 하니, 듣던 아낙네가 부추 몇 포기를 캐어 주면서 이것을 길러 남편에게 반찬으로 해주면 금슬이 달라질 거라고 했다나 아니나 다를까 그리 했더니 잠자리가 확 달라지더라는 것이었겠지 아낙네는 자기네 마당에 가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멀쩡한 집까지 부수고 그 터에 무장무장 가꾸었대서 그 이름이 바로 이 파옥초 아닌가
벌써 중복을 넘어서는데
누구는 홍삼을 먹네 장뇌삼을 먹네
무슨무슨 보약을 먹네
부실한 중년을 보수한다는데
오늘도 나는 부추무침에 그냥 그 밥이겠다
아내가 살짝 밉기도 하였지만
이 아침 텃밭 매시는 노 보살님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아주 오래 된 풍경
모르게 모르게 기어올라
감나무 밑동을 한번 휘감더니
이제 우듬지까지
덩굴이 올랐다
오늘 아침엔 몇 송이
두런두런 피어,
피었는데 저 꽃 핀 풍경에
가슴 한 켠이 겨자 먹은 듯 애릿하다
니가 그랬다
처음엔 덩굴손 한 줄기였을 뿐인데
나또한 거기에 내 굳은살 같은 데를
조금 내어주었을 뿐인데
무슨 액체가 서로를 적셔서
상처에 붙어버린 붕대만 같을까
가만 보니
감나무는 목 졸려 고사하며
웃고 있다
눈물마저 피마저 고름마저 빨아먹고
웃는 웃음이 꽃이라는 듯
생과 사가 한 가닥으로 일주문을 이루었다
이제 능소화를 지우려면
감나무를 뽑아야 한다
너를 지우려면
나를 통째로 뽑아야 하는
미술 시간은 끝났는데
다시 그리려 해도 어찌해볼 도리없는
나비
온전히 펼쳤다가 접는데 한 생애가 다 걸린다는 책이라고 한다 그 한 페이지는 하늘의 넓이와 같고 그 내용은 신이 태초에 써놓은 말씀이라고 한다 벌레의 시간과 우화의 비밀이 다 그 안에 있으나 장주도 그것이 꿈엣 것인지 생시엣 것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하랴 꽃과 더불어 놀고 꿀과 이슬을 먹고 산다 하는 전설도 있다 지금 내 앞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저 책을 보고 천박하게도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한 여자의 생을 떠올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잠시 흐느꼈으니 필시 저 책이 나를 들었다 놓은 것이다 책이 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 책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가히 짐작만 할 뿐이다
손톱을 자르며
톱을 활처럼 휘어 놓고
바이올린을 켜듯이 톱을 연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톱에 새겨진 나무의 울음을 불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톱질을 하다보면 듣는다
나무가 운다
나무를 베어내고 나면
해를 두고 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잘리우고도 봄이면 다시
안간힘으로 밀어올리는 여린 싹
그 푸른 울음을 기억한다
톱인들 그 울음을 기억하지 않겠는가
나무를 자르다가 문득
놓치듯 톱을 놓고 보니
손톱
발톱
애초부터 내 사지가 톱이었음을
내 온몸이 톱이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은 것들의 길을 나는 잘라왔을까
할퀴고 베어버렸을까
며칠 새 길어난 손톱을 자른다
날 선 톱날들을 자르며
내가 할퀸, 자른, 걷어차버린 인연의
길 잃은 푸른 울음들을,
오래 울어야 할 까닭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막막한 날엔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재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이슬
거미줄에 매달린
수정 염주
누군가
밤하늘 흩어진 별들을 골라
꿰어놓느라
수고로웠겠다
금식의 이 아침이
거미는 섭섭하지는 않겠다
섬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쑥갓꽃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 쑥갓꽃 피웠다
“씨앗 받을라고 일부러 꽃 피게 냅뒀다.”
신 말고도 꽃 피우는 이가
세상에 또 이렇게 있다
여든여섯 노구가
지팡이 위에 쑥갓꽃으로 예쁘다
배 과수원에서
아니, 저 발칙한
온 천지 배꽃
배꼽
다 드러내놓고
암술수술 무성한
그것도 다 드러내놓고
흘레붙는
그 고요로운 소리에 달빛이 달다
남자인 내가 다 회임하겠다
쳐다만 봐도 배 불러오겠다
기도
그 깜깜한 먼 허공이 얼마나 무서웠길래
저 진창의 지상이 얼마나 두려웠길래
눈송이는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안도하고 싶었을까
그 위태로운 선택이
그를 눈꽃이라 부르게 했다
지상의 모든 꽃은 그래서
제 몸에서 가장 먼 곳에 저를 피운다
심지어는 없는 길을 내어 허공에
꽃을 피우는 덩굴도 있잖은가
하느님이 들여다보고 들어주시는 기도는
제 뿌리도 제 몸도 모르는
머언 세상에 피우는 꽃이라서,
그 극한에서도 머언 하늘에 피우는 꽃이라서,
저 눈송이처럼
그 끝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서,
하 아름다워서,
당신이 애초에 만드신 그 모습이어서......
나를 더 위태롭게 하소서
슬픔에 대하여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 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차라리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를 묻는다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 똥 한 무더기 쏟고
그 큰 눈망울에 물기 흥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 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소는 버틴다
곧은 뿔 앞세운 그 직립의 자세가 결연하다
전지剪枝
튼실한 가지 몇 기르겠노라고
매실나무 가지를 잘랐다
전지가위를 들었으나
신처럼은 전지全知하지 못하다
병든 가지, 부실한 가지
아니다 싶은 가지를 자르다 보면
잘려나간 가지에도 꽃눈이 맺혀있어
낙태의 기억처럼 아득한 울음소리도 듣는다
가지 없어진 허공에서는
환상통처럼 또 통증이 맺히고
없는 꽃이 피기도 했다
그 울음과 아픔을 먹고
남은 가지 암팡지게 자라서
잘려나간 것들의 몫을 다 할까
다음 세상을 애써 믿지 않고서는
가지 하나 자를 수 없겠더라
오늘 나는
전화번호 몇 개와 주소 몇 개
그에게로 가는 길 몇 가닥도 함께
모질게 전지하면서......
상고대 처방전
필시 난치이거나
불치이거나 중병인 내 생을
어찌 할까 묻는데
겨울 바래봉은
해발 1200고지의 상고대를 펼쳐보인다
발가벗고도 모자라
허공의 습기를 다 끌어모아서
영하 수십 도의 밤 찬바람을 제 몸에 휘감아
나목들이 제 사지를 얼려 피운 꽃이라니
그리하여
오늘 아침 저 자해공갈단 같은
상고대 스승한테서 들은 법문은
엄살피우지 말라는 일갈이었다
무심풍경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꿈에 나비를 보다
꿈에 나비를 보았다
보통 나비보다 열 배는 더 크고 화려한 색채로 물들여진 나비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오색 한지에 나비를 예찬하는 시를 적고 한지를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나비의 날개에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나비는 제가 가진 색깔보다 화려하고 제가 가진 날개보다 훨씬 큰 날개로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엔 이미 기력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 장주를 보았다
개한테 배우다
동네 똥개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 와 똥을 싸놓곤 한다
오늘 마침 그 놈의 미주알이 막 벌어지는 순간에 나에게 들켜서
나는 신발 한 짝을 냅다 던졌다
보기 좋게 신발은 개를 벗어나
송글송글 몽오리를 키워가던 매화나무에 맞았다
애꿎은 매화 몽오리만 몇 개 떨어졌다
옆엣놈이 공책에 커다랗게 물건 하나를 그려놓고
선생 자지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킥킥 웃었다가
폐타이어로 만든 쓰레빠*로
괜한 나만 뺨을 맞은 국민학교 적이 생각나
볼 붉은 매화가 얼마나 아팠을까 안쓰러웠다
나도 모름지기 국가에서 월급 받는 선생이 되었는데
오늘 개한테 배운 셈이다
신발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매화가 욕을 할 줄 안다면
저 개 같은 선생 자지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슬리퍼
합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 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겨울 궁남지
저 수 천 평 연밭에 연꽃은 자취도 없고
허리가 휘어지거나 무릎이 꺾인 꽃대궁
마른 꽃대궁이 마이크 같다
한 바탕 유세를 부린다
나도 한 때 꽃 피운 적 있노라고
홍련 백련 꽃이었던 적 있었노라고,
이제는 구멍 숭숭 벌집 모양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버린 자궁만이
자랑처럼 남아있다
그래, 자궁이지 궁이고 말고
구멍마다 칸칸이 연의 씨앗이 담겨 있어
씨앗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면 믿겠나
저 씨앗을 연밥이라 부르느니
모름지기 수 천 평 연밭을 일구고 먹여 살린
밥이라 하는 것이 저 궁에서 나왔느니
진흙땅 젖은 늪 저승이라도 두렵지 않던 홍련
백련 왼갖 잡련 들이
한 빛깔로 저무는 적멸보궁
무슨 고요가 이리도 소란스럽다
겨울 궁남지*엔
신경외과 대기실에 모인 어머니들처럼
다산多産의 무용담 왁자하다
유세 부릴 만하다
*궁남지 : 부여읍에 있는 연못으로 백제 무왕 때 축조된 것이라 함. 주위에 수 천 평의 연밭이 조성되었음
들키다
무심코 지나가다
주차된 승용차에 몸이 스치자
도난경보기가 운다
너무 과민하다 기계를 원망하기도 전에
가슴이 덜컹 얼굴에는 붉은 등이 켜진다
들킨 것 같다
장사를 한 것도 아니면서
늘 손해 보지 않으려 한 것도,
빈손으로 왔으면서도
이리 많은 것을 걸치고 있는 것도
많이 훔쳤다는 증거는 아닐까
밑지겠다는 다짐도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필시 도둑놈인지도 몰라
나는 아니라는 듯 표정을 바로 하고
천천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왔지만,
나를 쳐다본 많은 사람들도
그래 너는 차도둑은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무심한 척 하지만,
그대들도 나도 공범이라는 생각
현행범이라는 생각 지울 수 없다
다 안다는 듯
내 뒷모습에 대고 도난경보기는 울어쌓는다
꽃잎 발자국
무색 명주 같이
얇은
눈 위에
영혼이 나비 같은
어느 짐승의 발자국,
꽃잎 같다
햇볕 들자
그나마
눈 함께 흔적 없다
사라져 더욱 향그러운
꽃잎 발자국이
내 생의 규모를 묻는다
공양
우리 집 복순이가 새끼를 낳았다
태를 뒤집어쓰고 탯줄을 늘어뜨린 채 태어난
새끼를 핥는다
핥아서는 태를 벗기고
탯줄을 씹어서 먹는다
먹는다 제 몸의 일부였던 것
내가 보기엔 한낱 오물에 불과한
피와 양수가 범벅인 그것을
흔적도 냄새도 남지 않게
먹어치운다 개는
새끼의 똥마저도 먹어치운다
천적에게 새끼의 흔적을 들키기 않게 하려는
모성본능 때문이라고 들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이 개보다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똥 싸고
시도 때도 없이 짖어쌓고
내가 심은 꽃을 마구 뭉개어서
무척이나 구박 당하던 복순이에게
오늘은 고깃국에 미역국에 거하게 공양 올렸다
군불을 때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서
쓰다가 버린 파지를 불쏘시개로 쓴다
쓰다가 고치고 쓰다가 고치다가
원본에서 멀어져버린
시 한 편을 위해
사생아처럼 버려진 종이들
누추하고 불구인 것들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못한
시 한 편의 알리바이를 위해
소신해야 하는 내 시의 과거들
제 몸에 불 붙여
포개놓은 장작에 불길을 옮겨 일궈주는 밑불,
그래서 시 몇 편보다
저 수많은 파지가 더 시답다
진입해 보지도 못한 중심에서 밀려나
지금은 구겨진 파지처럼 주저앉아
하릴없이 군불이나 때지만
나 여기 있어 모두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파지들이 일구어내는 불빛에서 온기에서
내 생의 원본을 읽는다
쭈글쭈글
잊고 지내서
상자 속에서 쭈글쭈글 쪼글아들어
이제는 어쩌지도 못할 감자 몇 개
물 한 방울 흙 한 줌 없이
제 피와 살을 온통 짜내어
싹을 키웠나보다
저 싹, 싹아지
제 어미의 살 속에 빨대를 박고
세상을 향해 먼저 고개 내밀겠다고
저 아우성이라니
저 질긴 악연을 언제 어디서 본 적이 있다
홍삼엑기스 한 상자를 내밀자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디
얼마나 더 살겠다고,
죽을 때 숨만 질겨진다고
너나 갖다 먹어라 한사코 되돌려주는 그
쭈글쭈글 감자껍질 같던 손,
그런다고 되받아 돌아오는 차에 챙겨넣던
힘줄도 굵던 아들, 그 싹, 싸가지
바라보며 흐뭇한 듯
웃음 피워물던 그 쭈글쭈글
돌담
오래된 이 마을 골목길 돌담
저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몇 구비는 비뚜름하다
그러나 무너지는 순간까지는
윗돌, 아랫돌 그리고
곁엣 돌 서로 단단히 얽혀서
담으로 서 있고 싶을 것이다
돌은 돌에 지나지 않으므로
손잡고 몸 포개어 돌은 비로소 돌담이다
무너지고 싶은 순간이 또한 없었으랴만
윗돌, 아랫돌 너를, 그리고 그를 보아서 이웃들을 보아서
앙다물고 한 세월 버텨왔을 것이다
그 사연이 이 마을 유래담 같아서
돌의 얼굴들이 돌이끼로 늘 푸르다
그래 술 취한 누군가가 오줌을 눌 때 가려주기도 하고
오래 기다림에 지친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주기도 했을 것이어서
돌담의 표정은 뉘의 연애담처럼 곡진하다
무엇보다 돌담은 틈이 있어
그 틈으로 돌담을 돌담이게 한다
엉성하고 허술한 돌담은 그 틈에
애기똥풀을 기르기도 하고
담쟁이덩굴에게 곁을 내주고
생쥐 가족에게 집을 세 내주기도 한다
언젠가는 그 틈으로
남해의 큰 바람이 찾아왔다가
고요히 잦아들기도 하여
버티면서 그리고 조금씩 무너지면서
돌담은 또 어느 무용담처럼 야젓하기도 하는 것이다
접목接木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 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 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 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 몰라
더듬더듬 허공에 길을 내고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까지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주광성
한낱 날벌레라,
하루살이라 부르지만
누가 저처럼 빛을 향하여
온몸으로 온 생을 바쳐 투신해본 적이 있는가
사는 동안에는 그렇다 쳐도
죽어서마저 빛에 안기리라,
빛을 무덤 삼으리라
가로등 등피 안에 제 주검을 묻었다
자해라 할지 모르겠으나
열망의 과잉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향하여 죽겠다는 신념도 없이는
그저 가만히
저 날벌레의 상아탑을 올려나 볼 일이다
단 하루라 할지라도
굴광성의 저 한 생애가,
그리고 죽음이 갸륵도 하여
이 한밤 가로등은
금환일식처럼 무덤 둘레에
빛무리를 후광으로 둘러주었다
연민
햇고사리 그 야들야들한 맛
못 잊어
6월 두 벌 고사리 따러 갔다가
꺾여졌던 자리 곁에서 종주먹 쥐고 솟는 애고사리
차마 따지 못했다
검은등뻐꾸기의 전언
5월 봄밤에 검은등뻐꾸기가 웁니다
그 놈은 어쩌자고 울음소리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렇습니다
다투고는 며칠 말도 않고 지내다가
반쯤은 미안하기도 하고
반쯤은 의무감에서 남편의 위상이나 찾겠다고
쳐지기 시작하는 아내의 가슴께는 건드려보지도 않고
윗도리는 벗지도 않은 채 마악 아내에게 다가가려니
집 뒤 대숲에서 검은등뻐꾸기 웁니다
나무라듯 웁니다
하려거든 하는 것처럼 하라는 듯
온몸으로 맨몸으로 첫날밤 그러했듯이
처음처럼, 마지막일 것처럼 그렇게 하라는 듯
홀딱벗고 홀딱벗고
막 여물기 시작하는 초록빛깔로 울어댑니다
독수리타법에 대한 변명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 ) 그리고 진화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군대시절 마라톤 타자기 3벌식 자판에서부터
팬티엄 컴퓨터 자판에 이르기까지
나는 독수리타법이다
나는 변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러했으니까
좋게 말하면 시종일관, 시종여일쯤으로
자위하지만
기침소리까지 받아 실시간으로 자판에 옮기는
요즘 사람들의 그 정확성과 속도에 비교하자면
그래 안다
일신우일신 어쩌고 진화 어쩌고는커녕
나는 퇴화 내지는 퇴행이다
부정확과 저속과 비효율로
나는 고백의 이메일을 썼으며
반성문 쓰듯 시 몇 편을 썼으나
어쩌겠는가 게을러 자신 없으므로
나아가 가능만 하다면 독수리타법도 버리고 싶다
타법은 필법이 아니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음 말하듯
더듬더듬 그것이 시라면, 그것이 고백이라면
그리하여 그것들이 발자취라면
그냥 지금처럼 또박또박 꾹꾹 눌러 찍고 싶다
그리 멀지 않은 길 천천히 가고 싶다
매실주를 담그며
매실을 유리항아리에 넣고
30도짜리 보배 소주를 들이부었다
매실은 그러니까 술에게 빚진 일도 없이
원수척진 일도 없이
제 피와 향기를 술에게 내주어야 하는 마당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록대록 푸른 눈을 뜨고
빼앗는 자도 없는데 빼앗기지 않으려
아등바등 살아온 내 생을 관찰하고 있다
가령 고통이라든가 슬픔 그것에 잠겨
제 목숨껏 지녀온 향기와 더러는 피와 살을 내어주더라도
그것들이 얽혀서 또 매실주와 같은,
네니내니 구분할 수 없는
한 통속 한 생애가 되기도 하겠거니
뜻밖의 슬픔에 대하여서도
조금은 너그러이 품을 열어보이면서
가져가기 전에 더 내어주고
매실이 소주에게 그러하듯이
척 어깨를 걸치기도 하면서
그게 사는 것이겠거니 달관한 척도 하면서
서로를 숙성시켜주기도 하면서
아줌마, 아내
나 혼자 심심할 것 같다고
병실 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한 봉다리 마늘을 가지고 와선
TV. 보며 마늘을 까는 여자,
배울 만큼 배웠다는 여자가
선생까지 한다는 여자가
미간을 찌뿌리고 나가는 간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뭐, 어때 하면서 마늘을 깐다
산중에 곰이 제 배설물 냄새로 제 영역을 표시하듯이
그 역한 마늘 냄새는
내 환부에 새겨 넣는 영역 표시 같아서
저 곰 같은 여자의 냄새는
그 어떤 약보다
그 무슨 항생제보다
독하고 또 용할 것도 같아서
제 곁에 내 곁에 백 년 동안은
아무도, 암껏도 얼씬도 못할 것만 같았다
바다가 넘치지 않은 까닭
바람 많은 바닷가 언덕
키 낮은 풀들이 바람에 부대낀다
그러나 저 바람으로 하여
저 풀들은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물기 없는 땅에 더 깊이 뿌리내리며
어서 꽃 피우자고
더 많이 사랑하자고
바람이 더 몰려오기 전에
바람이 비구름 진눈깨비 몰고 오기 전에
바람보다 무성해지자고
제 몸에 바람을 연주한다
너울너울 바람을 춤춘다
바람과 더불어 사는 생이 있다
아예 바람이 되어 사는 생이 있다
저 키 낮은 풀들은 도무지 바다가 두렵지 않다
바다가 넘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저 풀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새의 울음소리에는
내 새벽잠을 가만 흔들어 깨우는
저 새의 울음소리는
새 울음만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의 비유로 말해야 옳다
비를 머금은 구름의 노래이거나
지하를 떠돌다 돌 틈을 빠져나와
계곡을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소리이거나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자장노래 소리이거나
그렇다 저 소리를
새의 울음소리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눈 감은 채 들어보면
그 옛날 그 여자가 부르던 노래
하마 은하의 강물 곁에 살림을 차리고
쌀 씻으며 부르는 노래
새 울음소리에는 지나온 천 개의 하늘이 있고
살아보지 않은 천 개의 강물 소리가 있다
그리운 노래가 있다
꿈꾸는 별들의 뒤척임 소리가 있다
새는 인드라의 그물코에 앉아
그 가운데 몇 개의 소리를 가져와
지금 내 귓가에 내려놓는 것이다
동정녀 은행나무
우리 집 은행나무
제 가지 휘어지도록 은행알 맺었다
은행나무 수크루 하나 다녀간 적 없는데
나는 안다
그녀의 수태비밀까지는 몰라도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기도하던 그 자세를,
또랑또랑 별의 눈망울을 닮은 은행은
그래서 또한 큰 염주알 같기도 하다는 것을
개 같은 날들
골목 어귀에 두 마리 개가 붙어있다
후배위로 시작된 흘레는
이내 곧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이다
사랑이라 이름 붙여 행한 것 가운데
이보다 덧없고 허망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찬찬 바라보며 생각하자니
내 모습이다
죽고 못 산다는 듯이 사랑은 나눈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다투고
등 돌린 채 오지 않은 잠을 청하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도 가끔 저들처럼 돌아서서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코를 벌름거리며 수캐처럼
떠돌던 나, 나의 젊은 날도 보였다
온전히 개는 못 되어서
돌아서 머리 쥐어뜯던 날도 있었다
늘어진 아랫도리를 수습하고 꽁무니를 빼는 저 가여운 수컷,
개가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것 보았나
오늘은 일찍 귀가하여
나는 개가 아님을 입증해야겠다
혼자서는 안 되는 국수집
남원 관광단지 저 위쪽 어디메쯤
국수집이 있다
어느 날 어중간한 저녁 한 끼를 때우려고 찾았다가
한 분 손님을 위해 한 그릇을
삶아줄 순 없다고 하는 바람에
손님이 더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 일이 있었다
도리 없이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자
앞으로는 꼭 짝을 맞춰 오라면서
특별히 나에게만 1인분을 삶아 내주겠단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한 사람은 손님으로도 생각지 않는다니
부아가 치올랐으나
혼자서 국수를 먹었다 멀건히
얘기 나눌 그 누구도 없이
국수그릇만 쳐다보며 면발만 후루룩 쫒기듯 먹다보니
이 집 주인이 의도치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먹고 사는 한 이치를 알 것도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국수를 먹더라도 마주할 저 쪽은 있어야 겠더라는 것이다
다른 그 무엇을 할 때보다
먹을 때 혼자인 것처럼 외로운 일 있을까
빚 안 갚는 그 자식이라도 데리고 와서
후루룩거리며 함께 먹고 볼 일인 것이다
니나 내나의 외로움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먹으면
국수도 성찬일 수 있겠다
옳다 다음 부부싸움 화해할 때는 이 국수집이다
‘섬’의 동사형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숟가락 단상
출토된 청동숟가락들은
끝이 날렵한 잎사귀 같다
그 숟가락잎사귀가 땅을 뚫고 하늘 높이 자라면
수천수만의 푸른 잎사귀숟가락들이
먼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햇살과
바람과 눈과 비와
그리고 구름을 숟가락질할 터인데
그렇다면 죽음은 얼마나 맛있는 우주의 성찬에
배가 부를 것인가
그러니까 활엽수의 푸른 잎사귀란
푸른 하늘을 저 지하에 퍼 담는 숟가락이겠다
할진대, 저승 또한 얼마나 환할까
아니 어쩌면
숟가락은 작은 노를 닮기도 해서
아득한 날들에 부장된 숟가락들이 자라서
세상의 하늘을 작은 노들로 뒤덮었는지도 몰라
귀 기울이면 나무 우듬지를 타고
들려오는 파도소리 노 젓는 소리
우리 별은 지금 어느 별자리 곁을 헤쳐 가고 있는지
그러니까 숟가락질이란
다른 세상 다른 우주를 퍼 담는 일, 혹은
머언 또 하나의 우주를 향해 노 저어가는 일
그 어느 쪽이라 해도
숟가락 아니면 이승도 저승도 어렵겠다
식탁 위에 놓인 숟가락이
어느 먼 세상 가리키고 있다
꽃잎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혀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 소꿈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 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옹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페이스 메이커
아무르강에서 순천만까지
먼 하늘을 기러기가 날 때
새들의 간격은
뒤에 오는 새의 양력揚力을 돕는 거리만큼이라 한다
지쳤다 싶으면
조금 앞선 거리에서
빠르다 싶으면 조금 뒤처져서
그러나
새는 사랑한다고
어깨를 겯거나
대신 날아주진 않는다
그렇게 행로와 비행법을 가르치고
몇은 시화호에서
또 몇은 금강하구언에서 내렸다
너 더 멀리 난다고 해서 서운하지 않다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으니
나는 여기서 월계수에 물주고 있으마고
별들이 새들의 눈망울로 뜨는 초저녁
모두가 이겼다는 듯이
한 무리 기러기 떼 V자를 그리며 날고 있다
정면
어둠 속 귀뚜라미는
울음소리 나는 쪽이 정면이다
꽃은
지는 쪽이 정면이다
외면했던 모든 것이 정면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의 정면은......
카오스
베이찡의 노랑나비 날갯짓이
남태평양에 허리케인을 일으킨단다
-웃기는 얘기다
에뤼시크톤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려고
대지의 버금여신이자 곡식의 으뜸신인
데메테르 신전 앞의 참나무를 무참히 잘랐다가
허기에 시달리는 벌을 받았다
-신화는 신화일 따름이다
대숲의 참나무 두 그루를
한 마디 진언도 없이
기계톱으로 자르다가
나는 무릎을 여섯 바늘이나 꿰맸다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저 그렇다는 얘기다
성에
꽃이다
꽃송이도 있고
꽃잎도 줄기도 가지도 있다
떠도는 세상의 추운 입김들을
꽃으로 바꾼
유리의 투명한 눈빛 향기
해가 뜨면
햇살 속으로
잘 가라 놓아줄
뜨거운 꽃의 마음도 있다
추억에서
주차해놓은 차 사이드미러에
박새 한 마리 날아와
죽기 살기로 부딪는다
제가 그 안에 있구나 싶어
제 내면으로 날아들고자 했을까
짝이다 싶어
사랑하고자 했을까
한 나절을 집요하게
온몸으로 부딪다가 간다
깃털 분분히 날리고
주변에 새똥 어지럽다
제 내면이든 사랑이든
당도하지 못했으므로
아름다움으로 남은 것들을
어느 훗날 돌아보리라
내게도 저 죽을똥살똥의 핏빛 시간이 있어
추억에서 문득 반짝이는 새소리 듣는다
노래의 기원
처마 끝에 한 무리 참새가 몰려 있다
어미새는 장독대 근처 매화나무 가지에서 아이들을 부르고
부리에 노란 테두리가 채 가시지 않은 새끼들이
이제 갓 꽃을 지운 매화나무 가지를 향하여 뛰어내린다
아까부터 고양이 한 마리
처마 그늘 깊숙한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참새는 알까
처마 밑 그림자가 지옥의 아가리라는 것을
지옥은 늘 낙원과 그 입구를 같이 쓴다
다만 낙원엔 출구가 있을 따름인지
가까스로 몇 마리 낙원을 향하여 허우적거린다
젖 먹던 힘이 있을 리 없는 새에게
죽을힘을 다하여 제 몸을 매화가지에 옮겨놓는
저 필사의 낙하가 낙화처럼 애절타
바람도 없는데 매화 한 그루 잠깐잠깐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겨우 새 몇 마리 받아냈을 뿐
매화의 손이 놓친 어린 참새 몇은 어디로 갔을까
모든 첫 비상은 추락이었을 터
그러나 추락이 모두 비상은 아니었다
새는 지옥 1 미터 남짓 상공에서
비명처럼 낙원을 노래한다
노래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 출처 : 복효근 http://www.boksiin.com/
[출처] 복효근 시인의 근작시 모음 (작은 문학 이야기) |작성자 등대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