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목사의 안식 피정 이야기 7: 보아스 농장 방문기 ◈
우크라이나 르비브의 **선 선교사가 헝가리 국경 도시 베레호베에서 약 10여km 떨어진 곳에 선교농장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아내와 함께 방문하여 들꽃공동체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기로 했다. 10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아니 선교여행이었다.
기차는 카르파티 산맥을 간혹 몸을 동그랗게 말며 힘겹게 넘었다.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백설의 산맥과 점점이 박힌 집들은 깊은 잠에 빠진 천사들처럼 평온해보였다.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과 말, 개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어도, 카르파티는 아직 깊은 겨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차는 4/4박자 덜컹거리는 리듬을 고수하면서 끈기 있게 산맥을 넘었다.
아~ 산맥을 넘었다는 걸 제일 먼저 알려준 건 봄빛을 물고 나온 파릇한 풀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흰 눈이었는데 언덕을 넘으니 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을 가로막고 있었던 건 계절이 아니라 산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네 명은 ‘우주호로드’라는 슬로바키아와 가까운 국경도시에서 내렸다. 역에서 중심 거리가 가깝다는 말에 걷기로 했다. 20여분을 걸으니 지나온 길과는 사뭇 다른 풍광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즈 강’을 사이에 두고 구, 신시가지가 너무도 평온하게 자리한 우즈호로드! 이전에도 한 번 와본 도시 였으나, 그 때는 자동차를 몰고 그냥 지나친 도시의 기억 밖에 없었기에 두 발로 걷고 두리번거리는 눈 속에 담기는 우즈호로드는 살고 싶은 도시로 성큼 다가왔다.
도시 가운데를 통과하는 우즈 강, 그 강을 다리 하나로 이어놓은 신, 구 도시는 역사와 문화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 쉴 곳을 찾는다는 이유로 도시 곳곳을 돌아보자 강 주변에 자리한 예쁜 카페와 음식점들, 벤치에 앉아 여유로이 앉아 환하게 웃는 사람들, 낚싯대를 던져 이름 모를 고기를 잡는 노년의 사람들, 길을 물으면 최상의 친절을 보이며 가던 길도 되돌아와 상세히 일러주는 사람들, 청춘의 싱그러움을 가득 물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게다가 무엇보다 인상적(?^^)적이었던 건 우크라이나의 미인들이 모두 우즈호로드로 이사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미인 집단 거주지라는 것이었다.(사견이 아니라 모두의 생각이었음^^)
강을 걷다 피곤한 다리를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강가에서 흉상 조각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 탓인지 조각에 새겨진 글씨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조각상의 주인공이 러시아의 시 아버지라고 불리는 ‘푸쉬킨’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니, 푸쉬킨이 우즈호로드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푸쉬킨이 초등학교를 우즈호로드에서 다녔다는 사실! 그렇게 우즈호로드는 내게 한 번 더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를 주고 말았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 호텔이었다. 저렴한 돈, 극강의 친절 직원, 탁월한 접근성, 만약 우즈호로드에 다시 갈 일이 있다면 숙소 걱정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창문으로 거리의 일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은 덤이었다. 호텔 직원에게 물어 거리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질 때쯤 맛집을 찼았다.
레스토랑 내외 벽을 생물 화분으로 장식한 식당, 우리 돈 3만원에 커다란 오봉에 담긴 바비큐 요리가 테이블 가득 찬 식당, 또 한 번 들꽃 식구들과 오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니 우즈호로드가 그랬다.^^
마주 보이는 다른 테이블엔 젊은 청춘들이 깎지 손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보여주니 최상의 식당임이 분명하다.^^
아내는 아들에게 사진을 찍어 함께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아들은 놀리냐며 헛헛하게 웃는다. 우즈호로드의 밤은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두런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에 잠이 깼다. 커튼을 젖히니 사람들이 거리 모퉁이 곳곳에 좌판을 벌이고 갖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아니 판다는 의미보다 서로의 것을 공유한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옷을 급하게 걸치고 이른 아침의 거리로 나섰다. 낯선 동양인의 눈웃음에도 여과 없이 미소가 돌아온다. 참 다감한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이라 묻고 또 묻는 내게,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도 많은 언어를 섞어 설명해준다. 간혹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즐거운 대화...그렇게 우즈호로드의 아침은 우즈 강의 잉어처럼 펄떡거렸다.
엊저녁 사둔 빵과 우유, 과일로 아침을 먹고 우즈 성을 찾았다. 녹록치 않은 입장료였지만 선교사님과 우리 부부는 성의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성안의 사람들과 성 밖의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았다. 어디건, 어느 시대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의 삶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성 안에는 가진 자들의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었고, 자연도감처럼 식물, 동물, 복식(服飾), 전쟁물품, 생활용품, 커피와 와인, 종교 물품들이 수많은 방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초로의 사람들이 각방의 안내자들로 있었으나 난 현지어를 모르고 그들은 영어를 몰라 눈으로만 보게 되었다.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건, 답답함과 연결된다.(아~ 언어...)
우즈호로드에 하루 더 머물고 싶었지만 가방을 메고 왔던 길을 되짚어 베레호베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르비브보다 더 올드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덜컹대며 달리는 생면부지의 땅!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지만, 버스의 속도가 워낙 밋밋하기에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베레호베’, 헝가리 언어가 주인 국경도시! 언어도 음식도 문화도 헝가리안들에 의해 잠식된 땅! 나름 특별했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진정시키고자 찾은 식당, 맛집이라는 안내로 간 식당은 낮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상한 발음으로 주문을 권하는 직원 탓에 애를 먹었지만 주문은 성공적이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 다시 선교사님의 농장이 있는 곳까지는 택시로 20분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이 먼 곳에 농장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어느 교인이 후원금 2,000만원을 보내왔는데, 빨리 결과물을 보여주라는 무언의 독촉과 2,000만원으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그 먼 곳에 농장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마음은 맷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기에 그저 기도만이 내가 할 일이었다. 농장이 있는 ‘초마’로 가기 위해 일용품을 사러 마트에 들어가니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간단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동양인을 처음 봤는지 어린 아이들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경계와 웃기를 반복한다.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사복을 입은 두 청년이 불쑥 패스포트를 요구한다. 누구냐는 말에 경찰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내 말에 미간을 움직이며 신분증을 보여준다. 국경도시인 것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동양인들이 경찰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선교사님이 현지 언어로 대화만 했어도 좋았을 터인데...ㅠㅠ)꼼꼼히 묻고 여권를 살펴보더니 악수까지 청하며 좋은 여행이 되란다.ㅋㅋㅋ
공룡발자국 유적지 같은 도로를 20여분쯤 달려 ‘초마 보아스 농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겨울이라 더욱 을씨년스러웠어도 기도가 절로 나왔다. 1,500평의 땅을 걸으며 소리 내어 기도했다. “주님, 이 땅이 진정 보아스의 농장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2,000만원의 몇 배를 들여야 농장다워질 것 같아 호흡이 길어졌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려고 했는데, 선교사님 부인께서 서둘러 밥을 지어 이른 저녁을 먹고는 다시 베레호베 시내 호텔로 나가서 자자고 했다. 당신들 눈에도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형편,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도 사모님의 저녁밥상은 왕후의 찬이었다. 농장에서 선교사님이 뜯어온 달래와 봄동으로 무친 겉절이, 묵은지로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잃어버린 입맛을 돌려놓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 먼 거리를 매주 기차 10시간, 버스와 택시로 이동하면서 농장을 돌보는 선교사님의 마음이 내 맘처럼 다가왔다. 차라도 한 대 있으면 좋겠는데...
아내가 조분하게 말을 했다. “목사님, 차량 구입을 위한 마중물 헌금이라도...”
난 들꽃의 이름으로 차량헌금을 드리고 나서야 조금 맘이 편해질 수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니 부른 택시마저 소리도 없이 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에 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가로등 하나 없는, 개짓는 소리만 간간히 들여오는 초마에서 3~40분을 기다렸는데 온다는 택시는 감감하다.(아~ 언어 소통!) 한참 만에 지나가는 차를 무작정 세워 사정을 했다. 단 한 마디도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초마 근처에서 헝가리 개혁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님께서 생활이 되지 않으니 택시를 하며 생활하신다는 투 잡(two job)맨택시 운전사이셨던 것!
헝가리어 어플을 통해 우리들도 파스토르(pastor)라는 걸 전하고, 초마에서 미셔너리(선교사)임을 말하자 공감대가 일기 시작했다. 헝가리 목사님은 우리를 시내까지 태워주셨다. 그것도 무료로... 아무리 차비를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백목사님과의 선교적 연대를 제안하고는 주소를 교환한 후 헤어졌다.(관계를 이어가고 있을까?)
어렵사리 도착한 탓인지 허름한 호텔이었지만 감사하게 잠을 청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유명하다는 유황온천으로 갔다. 가깝다는 말에 걸어서... 그런데 만리장성길 같았다.^^ 눈도 내리고 운치는 있었으나 다리는 아팠다. 곁에서 아내는 신음소리를 내며 잘도 걷는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며... 놀라운 연기력,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은 여인, 난 여자 하나는 참 잘 만났다!^^ ㅎㅎㅎ
온천은 도 떼기 시장이었다. 게다가 입장료는 얼마나 비싼지, 더군다나 수영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사서 입기는 돈이 너무 아깝고, 여성들은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는 걸로, 난 트렁크 팬티, 선교사님은 준비한 수영팬티를 입고, 난 손을 가슴쪽으로 모으고... 왜 남녀 혼탕이니까...ㅋ
두 시간 시간제한이 무색하게 우린 1시간 쯤 있다가 나왔다. 길거리에서도 원숭이 보듯 하는데 온천탕 안에서야... 갈 때는 택시를 타고 럭셔리하게...
다시 버스를 타고 ‘무카체보’ 역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르비브행 열차를 타야 했기에...
역 앞 맛집이라는 곳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나라의 역전 식당을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극강의 가성비 짱! 맥주 한 잔으로 보아스 농장의 무거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식당으로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눈 바로 앞 테이블에 러시아 마피아 같은 모습의 세 남자가 앉았다. 짧은 머리, 문신, 우람한 체격...게다가 큰 병의 보드카를 시켜서 물처럼 마셔댔다. 자꾸만 그들에게 눈이 갔다. 독한 보드카를 마시면서 점심 메뉴로는 우리나라 물만두처럼 생긴, 그러나 피가 무척 두껍고 속은 별로 없는 서민 음식을 달랑 하나 시켜놓고(셋이 똑같이, 우리 돈으로 1,000원쯤 하는)먹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쳐다볼 때 눈이 마주치면 음식을 들고 그들 테이블로 가서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픈 충동이 솟구쳤는데, 아내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허벅지에 손을 가만히 얹는 것이었다.^^
난 맥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들을 보지 않았다. 창밖엔 눈발이 굵어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사람들의 보드카와 물만두 접시가 아른거린다.
우리 일행을 태운 기차는 다시 카르파티산맥을 넘어 아들이 기다리는 르비브로 가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