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남쪽바다 / 염정임
며칠 전 라디오에서 어떤 시인과의 대담을 들었다.
그는 이은상 선생이 <가고파>에서 노래한 마산에 꼭 가보고 싶어하다 얼마 전에 가 가보았다고 했다. 어땠느냐는 아나운서의 물음에는 나도 몰래 마음을 졸였다.
“역시 좋더군요”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마음을 놓았다. 나는 가마득히 잊고 있던 내 고향 마산을 떠올려보았다.
마산은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유년 시절을 보낸 조용한 항구도시이다. 마산을 두고 이은상 선생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라고 노래했고, 이원수 선생은 ‘나의 살던 고행은 꽃피는 산골…’하며 <고행의 봄>을 지으셨다.
거울같이 잔잔한 바다 위에는 엎드린 짐승 모양을 한 돌섬이 떠 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잠깐 스쳐 지나가보고는 아직 가보지를 못했다. 가끔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다. 지난 십년간 이 강산의 도시들이 변한 모습으로 미루어, 마산도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모습이 두려운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집은 역에서 얼마 안 떨어진 큰 신작로 가에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무화과나무와 감나무가 있고, 지하실이 있는 이층집이었다. 손가락처럼 생긴 무화과 잎사귀를 따면 뽀얀 액체가 스며나오고, 가을이면 잘 익은 열매를 한 소쿠리씩 따서 그 달면서도 아릿한 맛을 이웃과 나누곤 했다.
여름이면 비온 뒷날, 마당에 하얗게 깔린 조그만 왕관같이 생긴 감꽃으로 동생들과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놀았다. 그 감꽃 목걸이는 짙은 추억으로 나를 끌어가고 언제나 그리움이란 낱말을 떠올리게 한다.
친척들이 올 때면 자주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아련한 기대 속에 기차를 기다리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안 나올 때의 허전했던 마음. 멀어져가는 기적소리에 쓸쓸함과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가끔 잠자리에서 꿈결처럼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밤차로 도착한 외삼촌과 어머니가 주고받는 얘기소리인 줄 알아차리고도 짐짓 자는 척했던 기억.
아침에 머리맡을 스쳐지나가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나는 매큼한 연기 내음. 그러고는 이어서 들리는 도마소리에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드는 것이었다.
몸이 아파 결석할 때면 창호지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지금쯤은 무슨 시간일까 생각하고는, 오후가 되면 문병 올 친구들이 기다려지곤 했다. 언젠가 환경정리를 하느라고 학교에 남아 있을 때, 저녁 무렵의 학교는 또 얼마나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긴 그림자를 드리운 교사와 텅빈 운동장을 떠날 때에는 무언지 미진한 마음에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놓곤 했다.
내가 좋아하던, 천사만 같던 담임선생님이 시집 가서 시어머니를 푸대접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배반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소문이 헛소문일 거라고 혼자서 다짐했었다.
그때는 거지도, 미친 사람도 많았다. ‘좀줘’라는 미친 여자가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시장어귀에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좀줘, 좀줘’하며 두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좀줘’를 만날까봐 무서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좀줘’가 보이지 않게 되자, 왠지 학교가는 길이 허전하고 시장어귀에 오면 혹시 그녀가 있나 없나 둘러보곤 하였다.
수세미 같은 머리며, 두툼한 입술로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그 모습이 지금 봐도 알아볼 정도로 머릿속에 뚜렸이 새겨져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미치지 않을 수 없게 했을까? 전쟁통에 아이를 잃었을까? 남편과 헤어졌을까? 그녀도 그 누군가에게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으리라.
어릴 때를 회상하자면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운 추억을 빼놓을 수 없다. 겨울에 학교에서 돌아와서, 책가방을 내던지고 부엌 옆 온돌방 이불 밑에 발을 묻으면 온뭄이 나른하게 풀린다. 그때 외할머니는, “오늘도 제법 춥지?”하시며 놋합에 담아 아랫목에 묻어주셨던 점심밥을 차려주시곤 했다. 그 밥에서 나던 알싸한 놋그릇 냄새와 뚜껑을 열면 김이 서려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던 밥물의 맛과 온도를, 나는 잊지 못한다. 외할머니는 항상 바늘을 드시고 무언가 만들고 계셨다.
헝겊조각을 이어 조각보를 만드시고, 버선볼을 대시고, 이불을 꿰매시고……. 아침에 눈을 뜨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하얀 머리의 외할머니가 돌아앉아서 뭔가를 중얼중얼 외고 계신다.
무슨 바람이 그렇게 많을셨을까? 그 노년의 적막과 고독을 이 나이에 와서야 조금쯤은 알 것 같다. 지금은 하연 촉루가 되어 어느 하늘에서 우리 자손들을 위해 빌고 계실지…….
정오가 되면 ‘애-앵’하고 사이렌이 불고 그 뒤에는 온 도시가 잠든 듯 짧은 정적이 오곤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엄마 아빠랑 부둣가에 산책을 가기도 하고, 동생들이 잠든 후에는 영화관에 따라가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때 본 <파도>나 <분홍신>, <미녀와 야수> 등은 전설처럼 내 기억의 스크린에 희미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그때는 정전도 자주 되어서, 남폿불을 켜곤 했다. 손잡이를 돌리면 불꽃이 켜지는 남폿불이 재미있었다. 선이 언니 옆에 붙어 앉아 군불을 때던 일. 장작개비가 ‘탁탁’ 소리를 내면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 불이 붙을 때는 앞무릎이 따갑다가도 불이 꺼지면 금방 서늘해진다. 거제도에서 온, 말을 더듬는 선이 언니는 신둘러간(재혼해간)어머니를 원망하며 훌쩍이곤 했다. 빨갛게 타오르던 불꽃과 스러지는 재를 보며 그때부터 인생의 이면을 조금씩 배웠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에 본 불은 모두 아름다웠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만큼 아름다운 보물이 또 어디 있으랴. 언제쯤이라고 기약할 수는 없지만 홀연히 내 고향 마산을 찾아가봐야겠다.
내 고향 마산, 그곳에 가서 옛날에 사금파리를 줍듯이, 또 네잎클로버를 찾던 마음으로 내 어린 날의 흔적을 찾아 발이 아프도록 걸어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