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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연륜만큼 너그럽게, 문장만큼 상큼하게
강병철
그는 계룡시에 산다. 동급 체질인 물리학과 출신 김병호 시인과 근동에서 만나 주로 생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신다. 그림쟁이 내 친구 황재학 시인이 동석할 때가 있고 담백한 시인 전인순 벗님은 드믄드문 만날 것 같다. 오마이뉴스 기자 송성영과도 이따금 소통했노라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나도 이따금 원정 술청에 끼어 세종시로 옮긴 「낮술」의 김상배 시인을 도마에 올려놓으며 결곡한 벗들 앞에서 떡으로 취하기도 했다. 나 혼자 공주까지 총알택시로 달렸다가 조수석 바닥에 카드를 떨구고 온 상실의 기억도 있으니.
그를 만난 게 언제가 처음이던가. 대전의 문청 시절, 「힘글」 동인 후배 중에서 그 대학 출신이 아닌 시인으로 육근상과 정덕재가 눈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1993년이던가, 신춘문예 등단소식으로 그의 이름자를 또렷이 외웠는데, 이상하다, 한동안 출간 소식이 부재한 것이다. 그렇게 10여 년 넘게 지루하게 주목하던 어느 날 그의 문장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녹용 달이듯 부채질 숯불 부치다가 풀어진 압축파일처럼 느닷없이 문장을 쏟아내는 중이다. 시집 『비데의 꿈은 분수다』를 출산하며 가속이 붙었던 것 같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 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를 연동시키더니, 바로 어제 『대통령의 굽은 길』을 또 띄운 것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전통시장에서 오뎅을 먹지 못하게 법으로 명시하자’는 주장을 펼쳤다나. 그래서 그의 페이스 북 문장은 페이소스의 희극적 서정이다.
“왜 글을 쉬었나요?”
그는 글을 쓰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며 갸우뚱했다. 그의 직업이 문장 만드는 일상이었음을 안 건 나중 얘기이다. 방송 대본 뼈대를 다림질하는 일인지 아니면 공문서 작성 자판기를 두들기는지 나는 모른다.
컴퓨터를 켤 때마다
그녀 곁으로 모여든
여러 개의 파일은 일렬종대 기둥으로 세워져
약속을 암시하는
32년 전의 암호를 만든다
캐리 멀리건이 아니어도 괜찮고 김미정이어도 괜찮다
- 「기둥에 부딪친 관계」 부분
여주인공 잔상을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설정한 후 이따금 마른 풀 단발머리를 떠올린다. 그래서 치약을 짜다가도 울컥 외로움이 몰려들지만 일체 표시를 내지 않는다. 대사동인가, 아니면 부사동 어디쯤 술집 기둥에서 부딪친 생머리의 눈빛도 기실 가물가물하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던 ‘맑고 청량한 초가을 햇살’의 오후일 수도 있고 오동나무 이파리가 빈대떡처럼 뚝뚝 떨어지는 11월 둘째 주 금요일일 수도 있다. 지금은 컴퓨터 자판을 멈추고 발바닥 긁던 손가락을 씻는 중이다. 기억력이 쇠해지면서 책상 달력에 체크한 ‘두 개의 이응’ 사태를 가볍게 터치하던 풍경이 떠오른다.
탁상달력 11월 21일 칸에 단정하게 적혀있는 자음 이응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6월 30일 한해의 절반을 보내는 날에 남은 달력을 펼쳐보는데 두 개의 이응이 무슨 뜻인지 생각나지 않아 난독에서 헤매는 중이다
- 「두 개의 이응을 찾아서」 부분
도대체 누구였을까, 달력에 표시된 ‘비밀의 화원’이 풀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민 간 ‘영유’의 두 이응일 수도 있고 손바닥에 이름자 적어주던 생머리 ‘유인’이었는지 헷갈리는 중이다. 징검다리 조심조심 건너던 ‘우인’이거나 강의노트 빌려주던 중등교사 ‘영이’일 수도 있겠다. 추억의 단골 술집을 적어놓았을 수도 있다. 대전시 목척교 호프집 ‘우연’이나 새벽의 포장마차 ‘연인’이 가물가물 흐려진다.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던 복학생이나 혹은 탁구 ‘영웅’ 이애리사 닮은 후배를 ‘나만의 암호’로 슬쩍 기록했을 수도 있다.
열여섯 살 담뱃잎을 말리는 비닐하우스에서
병삼이 아버지는 담배 피면 뼈가 삭는다고
길게 훈시를 했다
여든셋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
그는 담배 몇 모금씩 빨았고
끝내 뼈는 삭지 않았다
아내가 죽고 시름시름 앓다
읍내 장터에서 예순일곱 여인을 만나
기운을 차린 게 구 년 전이고
오 년 전 헤어진 문틈으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 「고향 사람이 죽었다는 부고」 부분
코로나 시국, 애경사는 대개 휴대폰 부고로 받은 다음 은행 계좌 이체로 부조를 마무리한다. 그래도 결혼식장처럼 ‘축의금 봉투와 와인 한 병을 교환하기’ 위한 발품을 팔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코로나가 사라지면 코다리찜과 새우젓에 찍어먹는 수육 접시, 비닐봉지 찰떡을 떠올리며 백마강 어느 장례식장 찾아 우울한 표정으로 상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민초보다 더 비싼 대우 받던 귀족 반려견이 죽으면 주인께서는 부모상보다 아프게 꺼이꺼이 통곡하더라도 그나마 지인들만큼은 ‘부조의 짐’에서 해방되는 차이점이 있다. 지금 시인은 산책을 종용하며 꼬리 흔들던 워리를 떠올리며 혼자 천변 길을 걷는 중이다. 밤 깊은 간판에는 불이 켜 있지만 취객의 등짝에는 경보 불빛을 밝혀주지 않던 그 길이다. 그렇게 가십거리 소재에서 가로등 불빛을 제조하는 재능이 있으니.
정육점에서 나오는 부인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밝은 표정으로 나온 부인은 초혼이고
즐거운 얼굴로 올라가는 남편은 재혼이다
- 「살아간다 –또 201호」 부분
그는 501호에 산다. 언제부터였나, 100미터를 15초로 달리거나 공중돌기로 착지하는 601호 악동들의 소음을 눈 감을만한 관찰자의 몸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족발 예찬론자인 201호 사내는 2층이지만 기꺼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 202호는 여수 돌문어 택배를 즐겨 받으며 302호와는 아직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401호 그녀는 날마다 이상한 냄새의 근원지를 묻는 게 안부 인사로 굳어졌다. 베란다의 담배 연기로 충간 충돌이 터지지 않는 것은 이중창문에 마스크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마스크 시대 이후 이조돌구이 철판 위에서 우연히 조우했지만 슬쩍 눈인사 건넸지만 연기에 가려 아스라하다.
그의 아파트 동거인들은 수십 년 같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도 살콤하지 않은 만큼 마찰도 아예 없다. 이어폰에 마스크 무장으로 더욱 최소한의 안부만 간신히 나누니 친화되지 않은 만큼 배반을 당할 염려도 없다. 그들은 심장박동은 느끼지 않지만 이웃으로서의 기본 경계를 넘지 않으므로 뻐걱거릴 일이 없다. 짜장면 그릇 포장용 랩은 재활용이 아니라는 정보 정도만 공유시켜줄 뿐이다. 겨울이 가도록 장갑을 벗지 말라며 부부사랑을 모으던 그미는 이듬해부터 혼자 벤치에 덩그라니 앉아있다. 14층 이삿짐이 사다리차 꽃잎과 함께 떠난 후에도 몇 통의 고지서가 우편함에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헛기침으로 이웃집 안마당 드나들던 울타리 공동체 사연이 아득한 전설처럼 어른거린다.
까만 털은
밤에 더욱 빛난다
달밤 산책길에 만난
까만 놈을 보며 주구(走狗)라는 말을 떠올리자
까만 놈은 바지 끝자락을 물었고
발길질을 견뎌야 했다
그 이후 경계심의 무기를 장착했다
물어뜯어야 할 자본과
뜯어 버려야 할 권력을
어쩌지 못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건 어이없는 발길질
꼬리를 흔드는 시간과
귀여운 이빨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사리 분별
701호는 자주 짖는다
- 「개 701호」 전문
시국이 슬프던 우리들의 젊은 날이었을까, 그가 보인 몸짓에서 특이 행동이 전혀 없었는데도 괴짜라는 느낌이 진하게 파고들었다. 93년 중앙지(紙) 신춘문예 동기였던 이정록 시인에게 ‘정덕재는 문장 천재’라며 옆구리 찔리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검둥개 짖는 사연이 ‘담장 바깥 연인들의 진한 포옹’ 때문이었다는 문장의 신음을 만난 이후 더욱 굳어졌다. 지금은 그 검둥개가 바지 끝자락을 무는 바람에 발길질 충동을 쓰다듬는 중이다. 꼬리 흔드는 시간과 어금니 깨무는 타이밍을 구분 못하는 701호 검둥개의 머릿결도 지성껏 헤아려보고 싶어진다. 도둑이 던지는 비스켓에는 꼬리를 흔들며 핥아대지만 오가는 거리에서 동족만 만나면 컹컹 짖는 그들의 공격성까지도 진한 애정으로 쓰다듬어야 한다. 생긴 대로 발설하는 동물적 근성조차 기꺼이 수긍할 애린의 실루엣이다.
포크레인 엔진 소리가 커지자
새는 날아갔고
사람들 모두 하늘을 보며
날아가고 싶다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맑아 구름은 명랑했지만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 「철거」 부분
포크레인이 건물을 철거하자 무너진 벽에서 녹이 덜 슬은 철근들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식당으로 몰려가자 남겨진 철근 위로 새 한 마리 혼자 외롭게 마디를 세우고 있는 배경이다. 무너진 벽돌 바리게이트에서도 파랑새 날갯짓 그림자가 스치면서 언뜻 평화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벽돌을 던지며 자본가들과 싸우던 날 바닥에 떨어진 철근 녹이 벗겨져 빛난 적이 아주 잠깐 떠오르기도 했다. 그의 시집이 그렇듯 사랑과 한숨을 조합하면서 지난한 세월을 은밀하게 맞이하는 풍경이다. 때로는 시집의 두께만큼 기울은 장롱을 받치면서 건재한 유용성을 증명하기도 한다.
콧잔등 위 얼굴만 드러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입에서 나오는 열 마디 중에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것은 한 마디뿐
뱉은 말을 다시 삼키느라
질식사로 숨지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 「질식」 부분
마스크 시대 이후 청각장애인들의 소통이 가장 난감해졌다. 눈빛 하나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니 구비문학들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눈빛 사연들이 플래시처럼 빛을 내긴 했지만 질식으로 숨이 가빠진 작가들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편해진 세상도 익숙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이후에도 민초들은 여전히 몸에 익은 마스크를 벗지 않으리라.
구경꾼 하나가 작살을 던졌고
포유류 한 마리는
비명 없이 허우적거리며
피를 흘리는 중이다
- 「흰 수염 얼굴」 부분
그의 스프링 근육에도 세월이 개입했으니 묘책이 없다. 숙취의 신새벽, 냉장고 문 앞에 엎드려 동치미 국물로 시린 위장 달래던 그의 청춘도 무대 뒤로 사라졌다. 뿌리가 약한 놈부터 탈진이 시작되더니 힘에 부친 수염들이 하루가 다르게 흰색으로 채색 중이다. 수영장에 들어서서 늙어가는 흰수염고래라고 주문을 외우며 거친 세상 헤쳐가야 할 것이다. 벽에 못을 박다가 굳은 등이 우두둑 소리를 낼 때마다 스트레칭으로 간신히 풀어야 한다. 거울 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종종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므로 메모지의 분량으로 십 수 년 버틸 일이다. 치약을 짜다가 거울 속에서 벌어진 이빨 틈새를 발견했으니 그 여백을 채울 궁리도 해야 하리라.
그의 세월도 7부 능선에 입(入)했으니 사계절로 치면 가을의 후반부요, 하루 24시간으로는 오후 다섯 시쯤 수치 계산이 나온다. 시국을 진단하던 중년의 경계도 지나고 이제는 모난 돌도 너그럽게 바라보는 장년의 세월이다. 초로에 입(入)하면서 더욱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다. 청년 세월부터 주(酒)와 공존했으므로 근육질 살집이 빠지면서 발목도 가늘어지리라. 어느 날 못질을 하다가 허리가 삐끗할 지도 모른다. 느리게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할 타이밍이지만 다행히 그는 세월의 흐름에 강박을 느끼는 스타일은 아니다.
밤새 기다렸다고
일제히 노래 부르는 나뭇잎은
바람의 연주에
베이스와 테너를 넘나드는
신기한 창법을 들려준다
- 「커튼을 열며」 부분
구부러짐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는 지난한 사연 하나만으로도 위대하다. 직립의 울울 수풀보다 철사에 묶인 대로 몸을 키우는 베란다 관상목 스토리가 더 깊고 처연한 것이다. 커튼을 여는 순간 일제히 펼쳐주는 가로수의 하모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무를 설명하는 열 권짜리 구술보다는 나무의 창법을 묻는 게 먼저일 수도 있다. 그 차이일까, 그만의 독특한 창법은 흉내를 낼 수가 없다. 지금도 사물과 일체가 된 시간을 오려놓고 안경 너머로 살리거나 제거할 문장 목차를 고르는 중이다. 허리가 두꺼워졌고 종아리는 가늘어졌다.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가늘어진 종아리처럼 숨이 가빴던 시절도 내려놓으리라. 지금은 정수기 버튼을 내리며 갈증을 채우는 중이다.
벌이 잠든 시간에도
벌통 안에서
작은 메아리가 좁은 골짜기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늦겨울이나 이른 봄이면
사람들은 벌통을 분양하느라 분주하다
날개를 펴고
꽃가루를 찾아다니기 전에
벌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방을 옮겨 다닌다
벌들도 전셋값 걱정을 하는지
집을 옮길 때마다
부산스럽다
- 「벌들의 전세방」 전문
‘70-80’이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 쏟아지는 최루탄을 뚫고 화염병 던지던 심장박동 시국을 살았단다. 먹물 간판을 팽개치고 현장으로 들어간 노학연대가 당연하던, 스스로 몸을 불사르며 독재에 항거하던 우리들은 모두 애국청년들이었다. 그랬다. ‘시국이 아파서 내가 아프다’던 그 가슴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생살이 찢어지던 현장이었다. 당연히 민중시가 쏟아졌고 성명서처럼 거친 문장들이 함부로 쏟아지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몸도 아스팔트 현장에 있었다. 던질 거라곤 돌멩이밖에 없었으므로 팔매질 날리며 스크럼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달랐다. 급류에 편승하지 않고 보폭을 지키면서 캐릭터를 만들었으나 그게 ‘작가의 몸’이다. 리모콘을 누르며 채널 번호를 수시로 바꾸며 최루탄 굉음과 청량음료로 낄낄대는 장면을 오버랩 시키며 창발성의 서정성을 조율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낄낄대는 익살이 아니라 힘의 행간을 읽어야 하는 해학이다.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가는
여성의 발목과
그림자처럼 소리가 나지 않는
노인의 발목과
굵직한 장딴지를 힘겹게 지탱하는
청년의 발목은
오래전부터 상처를 숨겨 왔다
- 「통증 2」 부분
220 볼트 전기가 흐르는 신체발전소가 있어 비 오는 날의 발목이 조바심스러운 연륜이 되었다. 세월이다. 소풍 전날 부뚜막에 올려놓은 운동화가 누렇게 마르던 세월도 빛의 속도로 흘렀다. 등산 대신 천변 산책으로 한 등급 낮추면서 무르팍 관절을 갸웃갸웃 마사지한다. 건널목에서도 행인들의 발목을 유심히 살피는 ‘매의 눈’이 생긴 이유이다. 골목길에서 소꿉장난처럼 펼쳐놓은 할머니의 야채 평상에서 다정한 소통에 빠지는 여유를 보일 수도 있다. 눈발을 맞으며 장례식장을 나오는 정치인의 뒷모습도 전달하며 노익장의 넉넉함을 준비해야 한다.
횡단보도 남자 1의 흡연은
식민지 폐병과 다른 몰지각한 폐병이고
남자 2의 허리띠는
무관심한 고도비만이고
자꾸만 가래침을 뱉는 남자 3은
도덕적 양심을 가져야 한다
- 「보행자 자격증」 부분
쉰다섯을 넘으면서 천 권이 넘는 책도 불안하게 버렸다. 이삿짐 풀어놓고 짜장면 먹는 ‘습’처럼 배갈 잔을 기울이며 되새김질 사연에 빠지는 것이다.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발목 풀기로 뼈마디 하나씩 우두둑 풀면서 꺾어 신은 구두 뒤꿈치처럼 무심했던 공간에 눈길을 모은다. 나머지 인생도 지금처럼 무표정하게 진지하리라.
2021년에 혁명가로 살기 위해서는
전동드릴 쯤은 자유자재로 다뤄야 한다
수많은 볼트와 나사로 고정된 것을 풀기 위해
혁명가는 숙련된 기술자여야 한다
이념과 열정으로 무장하기에 앞서
최신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 「늙은 혁명가의 농담」 부분
아무도 모르게 목공방에 다니기 시작했다. 손목과 발목의 이음새 안부를 먼저 챙기는 게 나이든 혁명가의 첫 번째 책무이다. AI 세상의 점령 이후 개인의 노력으로는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도 최신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젊은 피와의 간극 메우기’가 껄끄럽더라도 익숙해야 한다. 헤드라이트 비추며 골짜기 더듬던 보폭만큼 전진하며 문장의 스펙트럼에서 체질에 맞는 언어를 찾아내야 하리라. 그러나 그는 글자들을 졸이거나 조합하지 않는다. 까치발 딛고 숨은 단어를 수색하지 않으며 장대비에 가스불도 붙이지 않는다. 샛길에서 독자들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마력 문장의 사내 아닌가.
그의 몸 어느 부위가 삐끗해서 메스를 대었다는 소문을 문풍지 사이로 들은 한참 후 즈음이다. 일부러 그의 얼굴을 오려놓고 달력 숫자판을 더듬던 찰나였다. 소주라도 한 잔 돌리자, 고 전화해도 되겠지, 궁싯대는 순간 핸드폰에 그의 이름자가 먼저 떴다.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의 발문을 부탁하는 것이다. 쭈삣대는 표정을 짓긴 했으나 속으로는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처럼 팔짝 뛰고 싶은 청탁이었다. 그리고 그의 글을 독파하면서 오만하게 예언하고 싶은 것이다. 야생마로 치달리는 그의 문장들이 톱밥처럼 콸콸 쏟아질 것 같은 직감이다. 발간 기념으로 계룡시 포차에서 얼큰하게 젖어 야간 택시로 귀가하겠노라고 마음만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