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진 시인이 지난 3월 31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 셨네요.
평생 독신으로 지내시며 고고하고 품격있는 시를 쓰신 선생님을 기억하며
시인의 시를 몇 수 올립니다. (여운)
****************************************************
씨앗
하나의 씨앗이 마침내 다른
하나의 씨앗으로 남기까지
그 많은 싱싱한 줄기와 잎들과 꽃은
씨앗의 꿈이었나 삶의 노래였나
초록 예찬
조물주가 지상의 태반을 초록으로 물들인 것은
너무도 잘 한 일, 너무도 잘 한 일.
만약 초록 대신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들였다면
사람은 필시 눈동자가 깨지거나 발광하고 말았으리.
새봄의 기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소리, 물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붙게 하옵소서.
「부처님께 드리는 글―부처님 오신 날에」
그 동안 네가 해온 일이 뭐냐 하면
글쎄, ‘말’에 미쳐왔다고 할까,
그것도 어두운 말에 말입니다.
참 시(詩)란 마침내 말 하나하나가
무량광명을 터뜨릴 만큼
대화엄경에 이르지 않고서는
한낱 잠꼬대요, 넋두리라는 것을
저는 까마득히 몰랐던 것입니다.
삼독(三毒)에 눈멀어 유황불 지글지글
끓는 피, 타는 살의 노예가 되어.
좋은 시
해돋이가 수없이 되풀이 돼 왔다고
진부해지겠는가.
억겁의 세월도
연꽃을 물속으로 가라앉게 할 순 없다.
좋은 시는 변함없이 좋은 시라네
즈믄 해 전이나 즈믄 해 뒤에도.
시인들은 죽어도 시는 남나니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희다.
다이아는 신이 만든 보석이고
시는 시인이 만든 보석.
<까치와 시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