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시조 이야기 1>
김옥중의 ‘홍매화 그늘 아래에서’
석야 신웅순
매화가 지고 있다. 뒷모습이 보고 싶어 개나리, 산수유, 목련, 진달래꽃들이 제멋대로 핀다. 조금 있으면 연둣빛 잎새들이 꽃그늘을 가려줄 것이다. 봄은 꽃 때문에 환하고 잎새 때문에 따뜻하다.
얼마 전 시인으로부터 시집 한 권 부쳐왔다. 마디마디 아름다운 절규였다. 시인의 시조집을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소원을 풀었다.
쉽게 써서 좋았고 깊이가 있어 좋았다.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을 치시라면
선지보다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리라.
- 김옥중의 ‘홍매화 그늘 아래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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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중시조 '홍매화그늘아래서' 석야 서.
시조는 많은 돌이 필요없다. 12개의 돌로 일상의 말이면 된다. 어디에 두어야하느냐. 반드시 맥점이어야한다. 녹록치가 않은 것이 위치이다.
인간 세상에 그리움이 없다면 어쩔뻔 했을 것인가. ‘그 누가 나를 보고 꽃 한 폭 치시라면 선지보다도 더 하얀 바람 한 필 끊어다가 저 핏빛 내 가슴을 적시는 당신만을 치리라’ 는 이 열두마디 울음이 우리 가슴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영원한 명화 한폭이다. 이를 신품이라고 한다.
시조는 담묵의 정도가 맞아야 하고 채도와 명도가 어울려야한다. 이런 아정한 화음을 또 어디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2012년 정소파 시조시인 100세 기념 문학 좌담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광주고 문학관 언덕길에는 한 그루 홍매화가 있다. 시인은 흐드러지게 핀 그 홍매화의 전율,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홍매화를 봤지만 이처럼 운치 있는 홍매화는 처음이었습니다. 문학 좌담이 끝나고 돌아오 는 길에 다시 들려 홍매화를 바라보니 더더욱 장관이었습니다.
시인에게는 이 홍매화가 첫경험이다. 이것이 ‘홍매화 그늘 아래서’ 시조를 쓰게 했다. 작품 하나가 탄생하기까지는 누구나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시인은 죽을 때까지 설레이는 가슴을 졸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1979년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에 당선했으며 1980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작품은 우아하고 단아하다. 목소리는 명주빛, 여창 가곡을 듣는 듯하다. 가까운 산새소리 같고 천길 물소리 같다.
바위에 새긴 고전
층층이 쌓였구나
한 권쯤 슬쩍 뽑아
달빛에 읽어 보면
구운몽
팔선녀들이
까르르 나오실까.
- 김옥중의 ‘채석강 단애’
층층히 쌓인 책을 슬쩍 한 권 뽑아 달빛에 읽어보다니. 거기에서 고전의 백미, 구운몽 팔선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나오다니. 선녀들이 춤이라도 출 것 같다. 화관무 같은 춤일 것이다.
시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시조의 멋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연구실에 어둠이 내린다. 산새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집을 찾는 아기새의 울음 소리이다. 새울음도 오늘은 한편의 시조이다. 시인이 내게 행복을 주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날은 없다.
- 시조문학, 2015. 여름호,118-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