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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일 늦게 자서 일어나니 9시가 지났고 아침식사를 마친 뒤 북한산에 가려고 점심을 준비하여 11시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홍제동을 벗어나면서 신호위반으로 단속이 되어 5월의 시작이 좋지 않았는데 순간적인 판단이 흐렸기 때문이다. 돈도 아까웠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정릉에 도착해서는 보국문 길을 오르다가 중간에서 칼바위 능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소와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 산행을 한 것인데 작년보다 봄이 늦었다고 해도 산등성이를 장식한 5월의 신록은 가는 곳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30분을 정상에서 보내고 다시 계곡을 타고 내려와 학원에 도착한 뒤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아내에게 생활비를 송금하고 막내 고모한테는 내일 홍천에서 하는 4촌 형 딸의 결혼식 축의금 10만원도 입금했다. 고모는 결혼까지 한 아들이 도박에 빠져 집안이 심각하다며 통화를 하는 내내 울먹여 나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딸은 불광동 킴스클럽에 가 있고 아들도 외출하여 거실이 컴컴하다. 늦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혼자 저녁을 먹으며 밤을 보냈는데 내일은 새로운 일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일 눈을 뜨니 새벽 6시가 되었고 커튼 사이로 일요일의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거실에서 잠을 자는 아내와 딸을 두고 이른 시간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중간에서 아침을 사 먹었다. 9시에 교회로 들어서니 어린이날 주간이라고 많은 신도들이 자리를 했고 예배를 마친 뒤에는 우현이와 만났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즐거운 하루를 보내라고 영식이에게도 문자를 했더니 답장으로 ㅎㄹㄹㅇ 자음만 네 개가 왔다. 할렐루야의 초성일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고 불교를 신봉하는 그에게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안긴 꼴이 되었다. 당산동을 출발하여 양화대교를 건너 논술교실에 도착해서는 중간고사 마지막 수업을 하고 2시에 점심을 하러 집으로 내려왔다. 오후에는 수업이 없어 정릉에서 북한산 형제봉 코스를 걸었고 하지만 서울의 기온이 23도까지 올라 더워서 힘이 들었다. 저녁에는 아내와 딸이 영화구경을 가서 어제처럼 김치찌개를 만들어 식사를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혼자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3일 새벽에 잠이 들었다가 7시에 일어났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식사를 마친 9시30분 체육관으로 나가서 운동을 막 시작했더니 이내 땀이 줄줄 흐른다.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훨씬 높아 서울 29도에 경북 구미가 30도를 넘었다니 5월 초순으로는 사상 최고를 기록한 날이다. 엊그제 꽃샘추위를 버텼는데 금방 계절이 바뀐 것 같았고 봄이든 여름이든 잘 적응하리라 다짐하며 운동을 마쳤다. 오후에 아내가 논술교실을 사용하는 바람에 중간고사 수업을 집에서 했는데 수강생이 이해를 잘하여 쉽게 마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시험이 끝난 아들은 일찍 돌아와 말도 없이 나를 쳐다만 보더니 수업을 하고 돌아온 저녁에도 멀뚱멀뚱 서성대기만 하여 장애인인가 싶기도 했다. 피곤하고 심란하여 방으로 들어갔다가 10시에 다시 나와 김치찌개를 만들어 식사를 했고 수업을 마친 아내는 더 늦게 들어왔다.
4일 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전에 일찍 체육관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다. 기온도 높고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상쾌한 기분이 되어 학원으로 출발했고 점심은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평소에 집에서는 손도 안 대던 반찬도 가지고 나와 학원에서 먹으면 소풍이나 온 것처럼 즐겁고 맛도 또한 더 특별해진다. 오후에는 지인들과 통화를 하며 보냈는데 그제와 어제에 이어 기온이 더 올라 교무실에서 셔츠만 입고 지냈을 정도였다. 오늘 영덕에서 보내온다는 게를 우리 집에서 먹기로 영식이와 사전에 약속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사업이 어려워 그럴 정신과 여유가 없을 것이기에 마음만으로 감사하게 여기지만 약속은 반드시 이행하는 친구라 두고 볼 일이다. 수업을 마친 저녁에 오랜만에 아내와 쇼핑을 갔는데 군것질 취향이 달라 나는 홍어회를 샀는데 아내는 다른 과자와 식료품을 들고 나왔다. 마트를 나오면서 학원을 마친 딸을 만나 내가 든 물품을 넘겼고 한 걸음 뒤에서 어둡고 정리되지 않은 홍제동 길을 걸었다.
5일 거실에서 아내와 딸이 자고 있는 어린이날 휴일이다. 5월 8일이 어버이 날이라 오늘 장인 장모님을 청주에 미리 가서 뵙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 1주년 추모까지 하려고 서둘렀다. 가족이 모두 승용차로 내려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동행을 거부하여 터미널에 가서 9시10분 고속버스를 탔고 10시40분 청주에 도착했다. 등산복을 착용하고 온 터라 낮시간 산행을 하려고 아내와 딸을 먼저 집으로 보낸 뒤에 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보은 속리산행 버스에 올랐다. 같은 충북이라 금방 갈 줄 알았는데 서울부터 청주까지의 거리보다 20분이나 더 소요되는 긴 시간이라 지루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속리산 터미널에 내려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산길을 걸어 거대한 불상이 자리한 법주사 경내로 들어섰다. 자비로운 부처가 있는 대웅전 앞에서 염화미소의 의미만 새기고 산사 뒤편을 지나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으로 한참을 이동했다. 여기서부터 갈림길인데 정상 문장대를 포기하고 오른쪽 방향을 택하여 얼마나 걸었을까 속리산 중턱 언저리 작은 폭포가 매달려 있는 상환암에 이르렀다. 암자라기보다 더 초라한 움막이었지만 산 아래를 조망하는 수려함이 장관이었고 입구에서부터는 2시간을 걸어온 속리산 가운데쯤 되는 곳이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삼거나 예상을 하고 온 것이 아닌데 이 곳이 상환암이라니 지난날 아련한 순간이 떠올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대학을 졸업한 초창기에 입시학원 강의를 하면서 좌절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방황하는 나를 친구 재웅이가 여기서 가까운 자신의 고향집 보은군 외속리면 중판리에 보냈다. 실력도 모자라고 경험도 부족하다는 자괴감으로 입시학원을 떠나 당시에 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로 들어왔다가 어느 날 속리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한 평 남짓한 바위뿐인 정상 문장대를 밟고 방향을 달리하여 내려오다가 작은 암자를 거치게 되었고 상환암이라는 안내판과 오늘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도 없다는 글귀를 마주하게 되었다. 순간 정신이 새롭게 깨어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이기려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그로부터 도전을 시작하여 쉬지 않고 외길을 달려왔다. 아침이면 칡을 캐 온다며 산으로 나서는 친구의 아버지와 올갱이를 잡아 국을 만들어 준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작은 폭포의 청아한 물소리를 뒤로 하고 산 입구로 내려와 마침 출발하는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처가에는 8시가 되어 들어갔다. 바다에서 낚시를 했다는 큰 처남은 싱싱한 횟감과 소주를 가지고 와서 나를 환대했고 밤이 되어 아내와 딸은 서울로 나는 내일 전라도 고향으로 가기 위해 하룻밤을 묵었다.
6일 처가에서 자고 일찍 고향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큰 처남도 당진까지 출근한다며 새벽부터 서두른다. 원래는 오늘 밤에 왔어야 했는데 나 때문에 미리 왔다가 출근하고 저녁에 다시 청주에 온다니 미안하기도 했다. 처남과 함께 집을 나서 청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전주행 차를 예매하고 시간이 남아 일단 사우나에 들어가 잠을 더 잤다. 청주를 9시에 출발한 차는 유성을 들렀다가 2시간10분이 지나 전주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어제 속리산처럼 지루하여 차라도 바꿀까 바로 김제행으로 갈아 탔다. 시내에서 친구와 시래기 새우탕으로 점심을 하고 어머니 산소에 들러 365일도 더 지난 1주년을 추도했고 아내에게는 동영상을 촬영하여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늘도 어머님은 여전히 말씀이 없으시고 회한이 많은 나는 해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주변을 배회하다가 시내로 나왔다.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마음을 풀고 홍어탕에 술 한 잔을 마셨더니 허전함이 따뜻함으로 변해가 고향의 아늑한 시간이 되었다. 밤 8시30분 호남선 KTX를 타고 김제를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했고 용산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집에 왔더니 피곤함이 먼저 밀려왔다.
7일 이틀동안 긴 여행을 했다. 그것도 승용차가 아닌 버스를 이용하여 서울에서 청주와 보은 속리산 그리고 유성 전주 김제까지 장거리를 다니고 돌아온 것이다. 속리산이나 동학사가 가까운 유성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느낌이었다. 버스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올라 순간순간 당황을 했고 노선이나 경유지도 옛날과 달라 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소했다. 20년도 더 지난 시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어쩌면 강의에 매달려 정신없이 달려온 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이대부고 급식을 점검하러 간다는 아내를 태우기 위해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처럼 피곤한 날은 운전을 하는 일도 귀찮을 지경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미역국으로 식사를 하고 체육관에 나가려는 시간에 아내가 돌아왔고 운동은 12시에 마치고 나왔다. 바로 학원으로 가서 한솥도시락으로 점심을 하고 오후에 신설동 옥상 방수처리 때문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수업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음 주 스승의 날 준비를 한다며 학부모들과 홍대 근처에서 토의를 하고 있어 집에 오면서 밥을 사 먹고 들어왔다.
8일 순이익이 많지 않은 학원에 대하여 고민할 때가 되어 순리대로 처리하는 방안을 연구했다. 달도 차면 기울고 꽃도 피면 지듯이 일이든 인생이든 언제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고 변화 속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화창한 주말 아침에 딸이 어버이 날이라고 선물꾸러미를 내 놓아 펼쳐 보니 엄마 아빠 사랑한다는 글씨가 적혀 있는 예쁜 컵이다. 소박한 보람과 고마움이 생긴 아침이었고 자식의 입장에서 우러러만 보았던 부모의 자리에 내가 서 있다니 부족하고 부끄러움이 앞섰다. 못 본 지가 며칠 된 아들은 오늘도 집에서 일찍 나갔는데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아내가 논술교실에 먼저 오르고 딸은 외할머니한테 받은 용돈 2만원을 가지고 친구랑 빕스에 간다며 아침도 거른 채 밝은 표정이다. 나는 오전에 산행을 하려고 구파발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갔다가 11시에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대남문 대성문을 거쳐 4시에 남쪽 정릉으로 내려왔다. 바로 학원으로 들어가서 일요일 수업 프린트까지 준비하고 시간을 보냈지만 5시간 긴 산행을 해서 그런가 힘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수업을 했다는 아내와 식사를 했고 늦은 밤에는 영식이 전화가 왔어도 비몽사몽 받을 기력조차 없었다.
9일 어제 북한산을 5시간 이상 걸었더니 힘이 들었는지 옆에 있는 아내의 기척도 듣지 못하고 곤하게 자고 일어났다. 오히려 따뜻한 온기가 있어 한참을 누워있다가 집을 나서 교회에 가는 중 해장국을 사 먹었더니 속이 한결 편안했다. 지난 주와 다르게 이번 주 교회에서는 어버이날 주간이라고 카네이션을 달아 주고 목사님 설교 또한 에베소서 6장 부모님 공경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예배를 마친 뒤에는 우현이를 만나 일주일 동안의 근황을 서로 묻고 한강을 건너 논술교실에 돌아와 일요일 수업을 진행했다. 아들은 오늘도 결석을 하여 보이지 않았지만 참석한 수강생들을 위해 초심의 마음으로 지도하고 오후에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집에 아무도 없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서울시청 근처 외국인 음식코너에서 딸과 시식을 한다고 하여 혼자 라면을 먹고 교실로 다시 올라가 6시까지 수업을 했다. 어제의 피곤함을 잊고 오늘 주말을 열심히 살았는데 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흔적이 없고 저녁에 수업을 한 아내는 9시가 되어 들어왔다.
10일 아침에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5월의 중순이라 작년 같으면 아카시아 향기가 밀려올 법도 한데 올해는 아직 꽃도 피지 않았다. 아들이 식사를 거르고 일찍 학교에 가서 딸하고만 아침을 하는 중에 아내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안산에 오른다고 서둘러 나간다. 산을 돌고 논술교실에서 식사를 한다고 도시락까지 준비했지만 차라리 공기 좋고 신록이 우거진 산에서의 자리가 더 좋을 것이다. 학교에 딸을 보내고 홍제천으로 나가서 8킬로를 달린 후에 돌아오면서는 체육관으로 들어가 기구운동을 더 했다. 12시 지나 식사를 하고 오후를 준비하는 중에 경기도 안산에 있는 친구 가게에 가자는 영식이 전화가 왔다. 시간이 안 되어 동행을 하지 못하고 중간고사 마지막 수업을 한 뒤에 신설동 옥상 방수를 완료했다고 연락이 와서 학원으로 나가면서 들렀다. 검정색 아스콘으로 땜질하듯이 여기저기 해 두어 이제는 문제가 없을 듯 하지만 건물을 위해서라도 차후 전체적으로 방수를 할 것이다. 저녁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인생이 그렇다지만 3,40대에 비하여 50대인 지금 나도 고독의 병이 더 깊어 있다.
11일 새벽에 함께 자던 아내가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고 중얼거려 양력으로는 1년이 지났어도 음력으로는 3월28일 오늘이 분명하다. 엊그제 산소에 다녀와 마음이 편하긴 했어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명복을 비는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잔뜩 흐린 오전에 식사를 하는데 아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요즘 늦게 오고 새벽에 나가 얼굴을 못 본 지도 며칠이 되었다.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중에 여동생한테 문자가 왔는데 그 동안 오빠인 내가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고 오늘 같은 기일 날 가족이 함께 식사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 집의 현실이 슬프다. 오후에 지하철로 을지로에 나가 패러다임 국어학원 명함 신청과 4월분 임대료와 공과금 등을 처리하고 학원으로 이동했다. 교재 연구를 하고 수업을 일찍 시작했다가 저녁에 방배동 카페 골목으로 나가서 고등어조림으로 영식이와 식사를 하며 작년의 긴박했던 어머니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12일 어제 늦게 들어와 아내와 다투고 아침에 거실에 나왔더니 아들과 딸은 이미 등교를 했고 아내도 흔적이 없다. 혼자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도 답답한 인생을 산다는 생각에 산행을 하려고 차를 몰고 정신 없이 정릉으로 향했다. 출발은 11시에 했지만 산행이나 삶까지 의욕이 생기지 않아 중턱에 있는 바위에 누워 있었고 일이든 공부든 산행이든 편안한 마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1시에 내려와 입구에서 점심을 사 먹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카페를 점검하니 초등학교 동창 자녀들의 결혼식 정보가 올라와 있다. 벌써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싶었는데 하지만 나이가 많아 일찍 결혼한 시골 친구들 위주의 안내장이 대부분이다. 오후에 책상에 앉아 중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마흔 살 중반까지 거침이 없다가 큰형이 세상을 떠난 현장을 보면서 자신감이나 당당함이 많이 위축되었다. 이후 쉰 살이 된 재작년 작년까지 금전적 정신적으로 시련이 많았고 아직도 충분하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나다운 모습을 찾을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라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고 그 과정은 이론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9시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이 도서관에 간다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가는데 어제부터 삭막한 내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13일 컴컴한 새벽 아내가 거실에서 자고 있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8시에 다시 나왔더니 딸만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다. TV에서는 자존감을 높이라는 연사의 열변이 이어지고 있는데 아무리 좋은 말도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니 그 실현 과정이나 방법은 같을 수가 없다. 오늘 낮 기온은 22도라 계절의 여왕다운 5월의 중순이 될 것 같고 고향의 보리밭에서는 지금쯤 아지랑이 사이로 종달새가 날아 오르겠다. 오전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대학로를 통과하여 따뜻한 봄의 기운과 함께 1시경 학원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프린트를 점검하여 일찍 수업을 시작하고 어제와 오늘 울적한 기분이라 곧장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들이 거실에 누워 꼼짝도 안한다. 김치찌개를 만들어 두고 딸의 사생대회 준비물을 구입한다고 아내가 나간 뒤에 방으로 들어와 누웠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14일 아침에 식사를 하러 거실로 나왔더니 아들은 학교에 갔고 딸은 어린이대공원으로 미술실기 겸 야외학습을 간다고 서두른다. 5호선 서대문까지 태워준다고 하니 친구랑 함께 가겠다고 하여 인왕산아파트 입구에 내려주고 체육관으로 들어가 운동을 마쳤다. 내일이 주말이라 오늘 스승의 날 행사를 하기로 하여 아내와 동네에 사는 찬송이 어머니까지 태우고 이대부고에 들어갔다. 운영위와 학부모대표에서 선생님들과 직원 모두를 초대하여 자녀를 가르치는 수고에 고마움을 표하고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다. 젊은 선생들이나 직원들은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났고 교장이나 교감 등과는 학교 발전에 대하여 대화를 많이 했다. 또한 운영위 대표로 내가 나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것과 그런 자녀를 지도하는 학교 측에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를 했다. 마지막에는 아들 담임과도 대화를 했는데 반장으로서 성적이 낮아 걱정이라는 이야기에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 순간 막막한 심정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학원으로 가는 중에 배 사업에 걱정이 많다는 영식이 전화가 왔고 저녁에는 고2 수강생들이 탈락하여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과외가 들어와 위안이 되었고 수업을 마친 저녁에는 을지로에서 손가방(6만원)을 구입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가족과 채선당으로 나가 외식을 했는데 말도 안하고 성적도 낮은 아들 때문에 흥도 힘도 나지 않은 자리가 되었다.
15일 주말을 맞이한 스승의 날이지만 아들의 학교에서는 어제 행사를 잘 마쳤다. 오늘 영식이와 관악산에 가기로 약속을 하여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으로 가서 막걸리와 컵라면까지 구입하고 친구를 기다렸다. 10시가 지나자 오늘도 역시 영식이는 그의 경상도 동창과 함께 나왔는데 여러차례 주의를 했음에도 성격은 고쳐지지 않는다. 사전에 양해를 하거나 통보를 한 것도 아닌데 불쑥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데리고 오면 자신은 편할지라도 상대는 서로 간 부담이 생길 수 있다. 나역시 바쁜 시간을 쪼개어 어려운 친구를 위로하고자 온 것이지 한가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놀려고 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할 수 없이 동행을 하여 처음에 남태령 관음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날이 더운 이유로 목적지를 국기봉으로 변경하여 올랐다. 사실 사당동에서 관악산을 오르는 길은 계곡도 없고 초반 산길이 가팔라 코스가 좋지도 않은데 교통이 편리하여 자주 오게 된다. 1시간 30분을 오르다가 연주대 정상이 보이는 중턱에 앉아 점심을 먹었고 푸른 신록과 함께 5월의 중순 하루를 보냈다. 산을 내려와 사당역 근처에서 이른 저녁까지 하고 집으로 들어오니 날이 어두워졌고 수업을 마친 아내도 교실에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