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숙
그는 창가에 자리 잡았다. 나는 안쪽에 걸터앉아 옷을 주섬주섬 벗어 가운데 침대에 널어놨다. 3인실로 둘이 쉬고 잠자기는 좋다. 또 건너뛰어 편하다. 나이를 물으니 많아서인가 우물거린다. 어쩌면 어눌하게 말해 나보다 많아 보이고 비슷한 게 아닌가도 느껴졌다. 연배로 방을 배정한 것 같다. 갑자기 나이를 물으니 뿌루퉁한가 보다.
바빴던 새벽부터 이 시간까지 당뇨 캠프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휴 한숨이 다 나온다. 강당에 모여 의사의 얘길 듣고 특별실로 가 조별 활동을 한다. 약사가 복용 약을 일일이 확인하고 성능과 주의사항을 얘기한다. 의사가 들어와 질문에 친절하고 자세하게 몰랐던 것과 의문의 당뇨병에 관한 것을 알려줬다.
종일 식전 식후 혈당을 재고 당화혈색소를 확인했다. 나는 바늘이 아까워 소독해서 보관해 쓰곤 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 한번 쓴 것은 휘어질 수 있어 상처를 주고 세균이 있단다. 큰일 난다며 당장 버리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여기서 대우는 고사하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
더운 날씨에 주사약이 괜찮을까 늘 걱정했다. 쓰고 저걸 냉장고에 넣어야 하나. 한번 꺼낸 건 보름 넘게 쓰는 것 같다. 물었더니 얼굴 가까이에 입을 갖다 대고 엄마가 자녀에게 얘기하듯 상온에서는 한 달 가까이 괜찮다고 말한다. 옆 조에서 크게 말하니 우리 조원의 얘기는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혈당과 혈색소의 수치가 궁금했는데 백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쉽게 말해주었다. 포도당이 혈관에 얼마나 있는가를 숫자로 표현한 것이고, 그 포도당이 적혈구에 들어간 것을 이른단다. 혈당은 음식에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지만 혈색은 지속되어 지표로 쓰인다. 하루에 진통제를 10개씩 먹고 산다는 근육통 사람에겐 의사도 계속 연구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눈과 말단인 손발을 조심해야 한단다. 실명과 절단의 낭패를 당할 수 있다며 검사해서 확인하고 다치지 않도록 당부했다. 당뇨 환자는 쓸데없는 실핏줄이 생겨 잘 터진다고 한다. 그게 심해서 상이 좁아졌다가 어두워진다니 걱정이다. 발의 무좀이나 가벼운 까치라기도 괴사가 일어날 수 있단다.
저혈당이 올 땐 빨리 재보고 낮으면 당분을 섭취해야 한다. 여행할 때 주의를 하라 했다. 길 가다가 어지럼이 생기고 비틀거리며 반짝거려 눈부심이 나타난다. 특히 잠잘 때 식은땀이 나고 몸부림치며 헤맬 때가 위험하다. 길게 가면 뇌사가 온다니 죽을 때 그랬으면 좋겠다 싶다. 노인 죽겠다는 말이 거짓말이라 하잖는가.
식사할 때도 따라다니고 일일이 이래라저래라 하며 알맞은 밥과 반찬을 권한다. 멍청히 앉았다가 전화가 온다. 어디서 오는가 했더니 아래층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연락이다. 긴 복도에 좌우로 방이 촘촘히 이어졌다. 어쩌면 감방처럼 보인다. 철컥 문이 열렸다 닫힌다. 우리 둘은 여기서 금방 만났는데 오랜 친구처럼 서로 다독인다.
먼저 세면장과 자리를 양보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 보이면 찾아 나선다. 동병상련이라더니 챙긴다. 권투 선수이니 수틀리면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할라. 내 주위를 맴도는 든든한 경호원이다. 자리에 쓰러지면 곧바로 잠에 빠질 것 같았는데 어찌하여 늦도록 못 잔다. 책을 읽고 복싱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밤을 새울 때가 많단다.
이래저래 얘길 주고받다 잠 많은 나도 뻐세고 말았다. 새벽에 일어나 또 이었다. 예전엔 복싱 도장이 보였는데 요즘은 태권도는 가끔 있어도 볼 수 없다 하니 예전보다 더 많단다. 그와의 얘기는 안 맞고 틀리는 게 있다. 서로 옳다고 맞서다가 풀어지곤 한다. 꼬박 긴 밤을 새운 것 같다.
아는 게 참 많아 그의 글을 읽어봤다. 농구의 멋진 돌려 슛 장면과 야구의 어렵지 않은 홈런의 역전은 기막히다. 축구의 복잡한 골문에서 슛은 아름다운 예술이란다. 복싱도 잽을 넣다가 강펀치를 날릴 때의 쾌감은 이 또한 예술이다. 그럴듯해 끄덕이고 설설 졸면서 들었다. 가까이 못 했던 새로운 세상을 본다.
심판으로 다녀서인가 안 가본 곳이 없다. 세계 곳곳을 잘 안다. 딸 둘이 슬하에 있다가 시집가고 아내마저 어쩌다가 곁을 떠났단다. 내가 편한가 온갖 집안 얘길 다 한다. 있던 회사를 나와 납품하다가 사업을 망쳤다. 여러 권투협회에 나가 교통비를 받으며 조그만 아파트에서 끓여 먹고 산다.
당뇨가 심해 주사를 하루에 두 번 맞고 약을 삼킨다. 배가 나와도 걸음은 빨라 운동을 잘 한단다. 나도 배가 나오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건 어렵다. 숨차서 움직이기 싫다. 지팡이를 두 개 주며 숙소에서 바닷가까지 걸어가는데 중간에서 빠져 돌아오려 했다. 숙소를 찾아올 수 없어 그냥 갔다 왔다. 동숙자가 바짝 따라다니며 잘 이끌어 줬다.
이틀간 함께 하다가 헤어졌다. 인사를 하려니 보이질 않아 그냥 지하철로 갔다. 그래 다정하게 하룻밤 얘길 했는데 아쉬워 문자를 넣었다. ‘건강하고 부부 화합해서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 말할 게 아니라 나도 잘 해야 한다. 속 뒤집어놓으면 가겠다고 말한다. 긴 세월 백년해로가 험한 고개를 넘는 일이다.
전에 없던 졸혼이라니 얄궂은 게 생겨 지루하게 여기는 여자들 부추긴다. 가산을 크게 축내고 아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은 걸 빌고 같이 살지 않았느냐. 잘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이해하지 않았다며 사과하기는 좀 그런 거였다고 한다. 울산에서 장의사 염하는 일을 거들다가 딸 집에 머물고 한다니 곧 돌아오지 않을까.
딸들이 붙여줄 생각을 서둘렀으면 좋겠다고 서운한 표정이다. 혼자 사는 게 답답하고 아내 그리운 정이 많이 나는가 보다. ‘우리 죽어 다시 못 만나면 어쩌나.’ 정다웠던 아내가 저리 변했으니 이제는 들어오세요 이니스프리로. 돌아오세요 소렌토로. 그가 자꾸만 되 밟혀 안 됐다. 어찌 잘 되어야지.
여태껏 참고 살아준 것이 고마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