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보는 시간관이다. 이 시간관에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새로운 언어, 새로운 구성, 새로운 시간이 없는 작품은 옛날 작품의 복사 밖에 안 된다. (M. 프루스트를 1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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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 재벌·관료·정치 '三角 편대'의 동반 몰락
화낙(FANUC)은 일본 기업 가운데 드물게 방문 취재를 거부한 곳이다. 정밀 공작 기계를 만들면서 영업 이익률이 40% 넘는 우량 기업이다. 갤럭시6나 아이폰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철판을 매끄럽게 깎아 주는 기계의 세계시장을 80% 점유하고 있다. 화낙이 납품을 거부하면 스마트폰 생산은 멈추고 만다는 말이다.
이 회사가 삼성처럼 헤지펀드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읽었다. 석 달여 전이다. 헤지펀드 서드포인트(Third Point)가 화낙을 공격한 방식은 엘리어트가 삼성에 했던 것과 똑같다. 올 2월까지 화낙의 주식을 매입하고, 4월에는 대표단이 후지산 자락에 있는 화낙 본사에 직접 찾아갔다. 주가를 올리고 배당을 늘리라고 압박했다.
화낙의 대응은 삼성과는 정반대였다. 2주 뒤 곧바로 투자자 설명회를 열고 앞으로 5년 동안 이익이 나면 최대 80%까지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서드포인트는 공격을 거기서 멈추었다. 화낙은 창업자의 손자가 3대(代) 후계자로 성장하고 있지만 주주들의 불평을 묵살하지 않았다.
우리 재벌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꼭 매를 맞아야 쓴 약을 삼킨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는 한전 부지 값으로 10조원이 넘는 돈을 정부에 헌납하다시피 한 뒤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그때서야 주주들 의견을 경영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후속 조치를 취했다. 삼성도 헤지펀드의 폭격을 받고서야 주주들에게 수박, 케이크를 돌리지 않았던가.
이런 오만함이 전적으로 오너 독주(獨走) 체제에서 비롯된 못된 버릇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총수의 1인 독재 통치가 주변의 몰매를 불러오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한다.
지난 1년 새 생중계되고 있는 재벌가 막장 드라마를 보라. 부모 형제가 뒤얽힌 효성그룹의 소송전부터 시작해 대한항공 오너의 딸이 저지른 땅콩 회항 소동을 거쳐 이번엔 롯데에서 대폭발이 발생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내쳐도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유혈극이다. 재벌 기업이 나라 경제의 성장을 주도한다는 믿음은 어느새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며 재벌가의 '근친(近親) 전쟁'에 넌더리를 내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올여름엔 유독 재벌들만 이러는 게 아니다. 성장 시대의 주도 세력들이 동시에 몰락하는 합동 쇼를 보여주고 있다. 성장 계획을 이끌어왔던 관료 집단, 성장 전략을 뒷받침해오던 정치 집단도 지난 두세 달 사이 모두 밑천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국회는 자신들이 3분의 2 이상 찬성표로 만들었던 국회법 개정안을 대통령이 거부하자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입법부의 자해(自害) 행위다. 자신을 해칠 정도로 앞뒤 분간을 못하는 정치인들이 엉터리 입법으로 기업과 국민을 얼마나 괴롭히고 해치고 있는지 제대로 알 턱이 없다.
관료들의 올여름도 유별나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소동을 거치며 공무원 조직은 상처를 치료하기는커녕 키우는 것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질병관리본부가 조직을 키우고 예산을 늘려보려고 나서는 것을 보면 관료 집단의 무한 팽창 욕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성장 시대에는 대통령이 무대를 내주고 관료가 배역을 정하면 국회가 박수를 치고 재벌 기업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돈을 벌었다. 지금의 정치는 박수 값을 챙기는 데만 열심이다. 관료는 제 앞길도 못 가린다. 재벌은 서로 자기가 무대에 오르겠다고 집안 싸움이 뜨겁다. 정치·관료·재벌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무리 4대 개혁을 외친들 흥행이 될 턱이 없다.
광복 70년 올해는 성장의 역사가 재평가된 해이다. 영화 '국제시장' 덕분에 어르신들이 이뤄놓은 경제성장의 열매에 무지갯빛 조명이 쏟아졌다. 언론들은 70년의 성취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어르신 세대가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어볼 만하다. 이런 잔치 분위기에서 성장 시대를 이끌던 엔진들이 한꺼번에 덜컹거리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나라를 이끌어갈 엔진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새것으로 갈아 끼우지 않으면 안 된다. 대기업에서는 무능한 총수나 그 가족은 경영에서 배제시키고 능력이 있는 전문 경영인들이 주인공 배역을 맡아야 할 때가 됐다. 관료 조직도 신분 보장 제도를 폐지하고 몇몇 글로벌 기업들이 하는 것처럼 해마다 5%씩 물갈이해야 한다. 정치권에도 뇌물에 찌든 불순한 인물을 걸러내고 건강한 비전을 가진 전문가들이 들어가야 한다.
성장 시대 주역들은 그동안 쌓아올린 탑(塔)을 자랑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 누구보다 중년·노령층의 각성이 절실하다. 70년 성장 궤도를 달려온 기관차는 겉은 화려해도 속은 썩고 녹슬었다. 이대로라면 불량 엔진을 아들·손주에게 물려주게 된다. 성장 엔진의 교체·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다.
[김진국 칼럼] 다당제와 다수결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안타깝다. 공과(功過)는 차치하고라도 94세의 나이에 아들과 다투다 뒷방으로 밀려나는 꼴이니 말이다. 언제까지 자기 손에 움켜쥐고 있을 줄 알았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빠르게 스쳐가는 세월을 본다. 그런데도 자기만은 늘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고 착각한다.
어디 기업뿐이겠는가.
정치판은 더 가관이다. 정치권을 취재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아는 정치인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정치인이 오래 자리를 지킨다고 무조건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할 일이 많다면, 또 그 자리에서 국민에게 큰 보답을 안겨준다면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대개는 자신의 권력 유지가 목표다. 심지어 호구지책(糊口之策)의 직업이 돼버린 경우도 흔히 본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이 있다. ‘한 시대의 새 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한다’고도 한다. 시대가 흐른다고 과거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지만 시대마다 소명이 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몫이다. 광복 70년 동안 무수히 많은 피땀을 흘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근대화 세대’ ‘민주화 세대’ ‘86세대’도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기여가 아무리 커도 그 추억이 미래를 만들지는 못한다. 물론 무조건 물러나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살려 새 시대를 열어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과거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세우고 새 역사를 써가는 노력이다. 과거의 훈장을 팔아 패거리를 짓고, 퇴행적 공론(空論)만 벌인다면 뒷물결에 자리를 내주는 게 순리다.
역대 선거에서 국회의원의 물갈이 비율은 낮은 편이 아니다. 대부분 초선인 비례대표를 제외하고 지역구만 봐도 현역 의원의 당선 비율은 절반에 불과하다. 신군부가 등장해 정치규제로 묶였던 11대 총선 때는 지역구에서 현역 의원 당선율이 7.6%에 불과했다. 1구2인제에서 1구1인 소선거구제로 바뀐 13대에는 29.5%,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탄돌이’를 양산한 17대에는 36.2%였다. 이건 예외로 치더라도 다른 선거에서 역시 현역 의원 비율은 40~54%다. 현재 국회는 비례대표를 포함해 초선 의원이 절반을 살짝 넘긴 151명이다.
이렇게 많이 바꾸고도 왜 불만일까. 국민은 계속 변화와 혁신을 요구할까. 구정치의 대명사가 돼버린 양김씨만 해도 대통령선거를 겨냥했다.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가 있으면 어떻게든 끌어들였다. 의정활동을 경쟁적으로 독려하며 공천에 반영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 제시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저물어 ‘작은 감자’들의 싸움이 되면서 물갈이 양상이 달라졌다. 계파별로 자기 세력을 심는 것이 목표가 돼버린 것이다. 국가적 목표는 흐려지고, 야당 즐기기가 스며들었다. 과거의 영광을 우려먹는다. 깃발이 아직도 ‘김대중’ ‘노무현’이다. 새누리당도 ‘친이’ ‘친박’ 세력 심기에서 얼마나 벗어났는가. 호남의 보수세력, 영남의 진보세력…. 많은 유권자가 자기 대표를 뽑을 기회를 사실상 제한받았다. 지역주의 정당의 뻔뻔한 ‘말뚝 공천’에 넌더리를 냈다. 그래도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유권자에게 좀 더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앙선관위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적한 ‘표의 등가성(等價性)’에도 가장 부합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도 조금 변형해 제안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논의해보자’고 받아들였다.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새누리당 의석이 줄어들게 된다. 19대 총선 결과를 적용하면 152석이 10석 정도 줄어든다. 그러니 고개를 젓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당장 의석 몇 자리만 아까워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를 완화해 국민 통합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1구2인제 시절의 득표를 고려해도 지금과는 득표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김대중 시대의 결집력이 호남에서만 계속된다고 보는 것은 패배주의다. 이미 야당에서 분당 움직임이 일고 있다. 소수 정파에 기회가 생기면 가속화될 것이다.
가장 최근 다당제를 경험한 것은 13대 여소야대의 4당 체제다. 1당이 독점하던 국회 상임위원장과 부의장을 야당에 할애해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하지만 그때는 소선거구제가 지역주의 바람을 일으킨 결과다. 그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제1당의 장악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오히려 커진다. 현재 체제에서는 강경파가 제1야당 전체를 흔든다. 야권연대에 매달려 휘둘렸다. 이런 현상은 완화될 수 있다. 양당제를 전제로 도입한 국회의 ‘합의제 운영 방식’도 유지할 명분이 없어진다. 국회법도 함께 고친다면 제1당에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그날 페르난도에게
1
두 달 전에 태어난 아기는 닭 울음소리에도 놀라거나 잠에서 깨는 일이 없다. 뱃속에 자리 잡았을 때부터 녀석의 세상은 닭 울음소리와 함께였으니까. 소년은 자고 있는 생명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톨도톨 무언가 잔뜩 나 있는 통통한 볼과 숱이 없어 어디까지가 이마인지 알 수 없는 동그란 두상. 귀엽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함께 한 시간이 짧아서일까 아직은 진짜 내 동생이라는 생각이 선뜻 들진 않는다. 소년이 현관으로 가 덮어두었던 헝겊을 쳐든다. 닭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방 한 칸짜리 집을 가득 채운다. 집은 좁지만 현관은 앞으로 두 개의 닭장을 더 둘 여유 공간이 있다. 닭들을 한 공간에 둘 수 있다면야 더 많이 키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렇듯 닭장을 함께 쓸 수는 없다. 함께 둔다면 한 놈만 살아남든지 다 죽을 테니까.
닭장을 열어 파블로의 윤기 잃은 털을 쓰다듬는다. 늙어서 힘을 쓰지 못한지 꽤 된 파블로. 사람들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말하곤 하지만 파파는 녀석을 버리거나 튀김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일 년도 채 살지 않고 떠난 이전 마미는 파블로를 돌보는 것에 대해 불평했었다. 소년은 그녀의 볼에 큰 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아니, 그보다 더 전의 마미였던가. 소년은 전혀 기억에 없는 엄마도 싸우지 못하는 닭을 돌보는 것 때문에 파파를 떠난 것은 아닐까 종종 생각하곤 한다. 지금의 마미 역시 파블로에 대해 불평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파파는 마미와 헤어지는 대신 외국으로 일을 하러 떠났다. 아기는 파블로처럼 말린 옥수수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파가 집을 비운 후부터 닭 두 마리의 뱃속에 옥수수를 채워주는 건 소년이다. 함께 한 시간이 더 길어서일까 소년은 자신의 동생보다 두 마리의 닭들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소년의 손길에 따라 파블로의 눈꺼풀이 닫혔다 열렸다 한다.
소년은 파블로의 닭장을 잠근 후 미구엘을 꺼낸다. 언제나 패기가 넘치고 늠름한 미구엘은 파파에게도 소년에게도 큰 자랑거리다. 그는 파파가 그랬듯 녀석을 이리저리 둘러본 후 땅에 떨어트리는 것처럼 여러 번 내려놓아본다. 균형 있게 착지하는 오늘의 주인공을 안고 다리에 남은 잔털을 뽑아 조금이라도 싸움에 방해될 수 있는 건 미리 제거한다. 오후에 있을 시합을 위해 몸 상태도 체크하고 몸단장도 해주는 것이다. 녀석은 왜소한 주인 앞에서도 날개를 푸드덕거리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맡긴다. 동족과 마주치기만 하면 바로 싸움으로 돌진하는 사나운 투계들도 주인 품에서는 얌전한 편이다. 특히 상대가 죽었어도 공격을 해댈 정도로 난폭한 미구엘이지만 주인에게는 더 없이 순하다. 자신을 정성들여 돌보아주지만 결국 싸움터로 내보내 다치게 하거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도 말이다. 소년과 미구엘을 지켜보던 파블로가 닭장 속에서 수차례 날갯짓을 한다. 둘의 다정함에 항의라도 하듯 목청을 길게 높이자 이웃 닭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파파가 닭을 키우면서부터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지만 이웃들은 불평을 하지 않는다. 이웃 대부분이 한두 마리 정도의 닭을 키우고 있거나 키우고 싶어 하니까. 닭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고 그러면 조용했던 주위 닭들마저 동요되어 따라 운다. 여기 사람들은 닭 울음소리를 동네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부부싸움 하는 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 동네 아이들이 소년을 놀리거나 때리는 소리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네가 이기면 암컷은 실컷 만날 거야. 모두 네 새끼를 갖고 싶어 암탉을 들고 올 테니까.”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파파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리고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미구엘의 낮은 벼슬을 쓰다듬는다. 오늘 또 다시 승리한다면 녀석의 몸값은 더욱 높아지리라. 어쩌면 동네에서 가장 값어치 높은 닭이 될 지도 모른다.
무패의 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미구엘의 몸값은 이 동네 집세 세 달 치 금액에 버금간다. 시합 경험이 없는 닭들이라도 한 달 치 집값은 지불해야 한다. 여기 사람들은 밥은 굶어도 시합에는 돈을 걸 정도로 투계를 좋아하므로 닭 값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집세가 밀려 결국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가재도구 속에는 안이 비어있는 닭장이 실려 있다. 그걸 팔았다는 것은 이제는 가진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가진 게 닭밖에는 아무것도 없던 파파는 그래서 외국으로 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생활비를 보내오지 않는 파파로 인해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된 마미는 오늘 시합에서 이겨야만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소년은 이번 마미가 꽤 마음에 들기에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가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오늘 시합을 위해 쓰지 않고 모았던 판돈을 이미 뺏어갔을 테니까. 소년은 꼭 이길 것이다. 미구엘이 진다면 미구엘과 파블로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마미는 떠나고 파파에게선 소식도 없이 소년은 정말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므로.
2
소년은 주먹을 쥐어 조금 얼얼할 때까지 벽을 서너 번 쳐본다. 그런 후 팔에 힘을 주어 솜털이 파르르 떨리는 팔 근육을 확인해본다. 서커스를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이 시내로 몰려갔다는 걸 알면서도 으레 그렇듯 문을 나서기 전 거리를 두리번거린 후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걸음을 뗀다. 파파가 떠나고 아이들과 흔히 그랬듯 싸움이 붙었다. 하필이면 대장의 동생이 상대였다. 소년은 이겼으나 싸움 후에 흔히 그랬듯 다시 낄낄거리며 잘 지내는 대신 아이들은 대장의 말에 따라 그를 놀리거나 밀치며 시비를 걸었다. 소년은 얻어터질지언정 그 애들이 하라는 대로 무릎을 꿇거나 바닥을 기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들이 아주 비겁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삼 개월 전이라면 함께 시내에 갔을 테지만 지금 소년에게 서커스 따위는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소년은 평소처럼 잔일거리를 찾아 밖으로 나온다. 시합이 있더라도 일을 구하는 수고를 하려는 것이다. 요즘에는 통 일을 구할 수 없다. 시장으로 당선된 정치인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마을의 첫 병원 건립은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소식이 없다. 파파는 그 공약에 기대를 걸었다. 그가 비싼 병원비를 고스란히 지불하면서 병원을 이용하려던 것은 아니다. 건물이 지어지면 한쪽 면이라도 좋으니 페인트칠을 할 수 있었으면 했던 것이다.(파파의 직업이나 상황이 분명치 않다, 페인트칠하는 사람도 아니고...) 간혹 페인트를 새로 칠하는 곳이 있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서도 먼 나라 방송을 볼 수 있다는 안테나가 달린 소수의 집들이 우기가 길어진 데 대비해 집을 보수하곤 했지만, 그런 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일꾼을 고용했다. 그 공사에 참여한 동네 사람은 없었다. 이 동네는 물론 옆동네, 뒷동네 다 합쳐도 가장 솜씨가 좋다는 목수 베토 아저씨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투계를 돌보는 재주만 좋던 파파가 일을 구할 리 없다.
3
베토 아저씨가 경영하는 목공소에 다다르자 아저씨가 키우는 토토라는 얼룩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소년은 일부러 눈썹에 힘을 주어 개를 강하게 쳐다본다. 반갑게 다가오던 토토가 귀를 뒤로 젖히고 걷는 속도를 줄이며 소년의 눈치를 살핀다. 이 동네에선 개 키우는 사람이 드물지만 이곳보다 사정이 나은 동네에서는 닭이 아니라 개를 시합에 내보낸다. 투계에 비해 투견은 판돈이 몇 배나 큰데도 여기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닭은 말린 옥수수만 먹어도 괜찮지만, 개는 한 사람 몫은 먹어야 힘을 쓰는데다가 키울 마당도 필요하다. 거기다 닭은 죽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잡아먹을 수라도 있지만, 개는 아무도 먹지 않는다. 죽으면 묻어줘야 할 땅까지 필요한 것이다.
토토가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고는 안내하듯 조금 앞서 걷다 뒤돌아보며 소년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한다. 개를 따라가던 소년은 어디선가 날아온 돌에 등을 맞는다. 소년이 돌이 날아온 쪽으로 급히 얼굴을 돌리자 장난치기 좋아하는 동네 형 두 명이 실실 웃으며 또 돌을 던진다. 소년은 돌을 피했으나 토토가 마구 짖어댄다. 형들이 세 번째 돌을 던졌을 때 토토의 목청을 듣고 나온 베토 아저씨가 고함을 친다.
“이 못된 자식들! 또 던지면 너희들을 나무토막처럼 뒹굴게 할 테다!”
형들은 돌을 던지는 대신 침을 한 번 찍 뱉더니 뛰는 듯 걸으며 어딘가로 가버린다. 소년이 다친 곳이 없는지 살핀 후 베토가 들어가자, 라고 말하며 목공소로 걸음을 뗀다. 소년은 침을 뱉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던 형들처럼 자신도 따라 뱉어보지만 침이 실처럼 이어져 떨어지지 않자 소매로 입가를 닦는다.
“아저씨. 오늘은 상황이 좀 나은가요?”
소년이 목공소 안으로 들어가 베토 옆에 가 선다. 몸은 말랐지만 미소는 좀처럼 마른 적이 없는 목수가 소년의 얇은 어깨를 두드린다.
“알잖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소년은 한 뼘 더 커 보이려는 듯 어깨를 크게 으쓱거린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한 대답이었어도 막상 듣고 나니 힘이 빠진다. 실망을 느낀다는 건 작은 기대라도 품었다는 뜻이고 먹고 사는 문제는 어린 소년에게도 좀처럼 포기가 안 되는 법이니까.
“아저씨, 오늘이에요. 알고 계시죠?
“물론이지. 이따 시합장에서 보자.”
“미구엘은 우리 식구 중에서 가장 일거리가 많은 놈이에요.”
“그래, 녀석 덕분에 너는 밥 굶을 일은 없을 거야.”
베토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뱃갑을 꺼내며 말한다. 소년은 아저씨의 담배를 하나 뽑아 함께 피우면 일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럽고 팔뚝이 튼튼해 보이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닭한테만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요.”
“닭장에만 두기에는 쓸모없는 녀석이니(?) 당연히 일을 해야지.”
“미구엘은 저 녀석처럼 관상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걸요.”
소년은 제 몸집보다 큰 자투리 나무를 입에 문 채 끌고 가는 토토를 쳐다본다.
“담담해져야 해. 그게 싸움닭 주인이 할 일이야. 그래서 난 나무를 다루지. 상처가 나도 피를 흘리는 쪽은 나니까.”
“걱정마세요. 파파의 닭은 지는 법이 없어요.”
소년은 오랜 목공일로 상처투성이인 아저씨의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을 꺼낼 듯 말 듯 머뭇거리자 베토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놓치지 않고 받으마. 나도 너만큼 기다리고 있는 걸.”
“아저씨, 걱정 마세요. 파파는 아마 전화를 어떻게 거는지 몰라서 매일 헤매고 있을 거예요.”
베토 아저씨네로 전화하겠다던 파파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한다. 이렇게 해야 파파가 정말로 전화를 거는 방법을 몰라 연락을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는 원 없이 페인트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야 네가 닭처럼 알록달록해져서 돌아갈 수 있겠지.”
“아저씨, 아줌마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전화가 오면 오늘 페르난도가 첫 시합에 나갔다고 이야기하라고 해두마.”
(여기서 소년이 베토의 남은 음식을 먹는다든가, 하는 어린아이다운 그러나 맹랑한 처신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베토도 또다른 특성 하나쯤을 보여서 입체적이어야 하고... 약간 아쉽다)
4
해는 벌써 언덕을 따라 줄줄이 채워진 집들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다. 구두통을 매고 서둘러 시내로 나가는 옆집 아이 조조가 옆 동네까지 일을 찾으러 다녀온 소년과 마주친다.
“시내 가냐?”
“응, 아버지가 서커스에 못 가게 하니까, 이거 매고 가야지. 넌 안 가냐?”
조조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였을 때는 소년을 괴롭히는 일을 거들지만 소년과 둘만 있을 때는 그런 짓을 언제 했냐는 듯 고분고분해진다. 소년은 그런 조조가 싫지만은 않다.
“난 오늘 시합 나간다. 너 몰랐냐?”
“대단하군. 난 거기 구경 갔다간 아버지한테 억수로 맞을 텐데.”
“몰래 따라와. 내가 들어가게 해줄게.”
“됐어, 난 서커스 보러 갈 거다.”
소년은 그래서 네가 아직도 어린애인 거라고 말하려다 만다. 행동이 느릿하고 둔한 조조이지만 자신을 모욕하는 말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괜히 싸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우리 아버지도 너네 아버지처럼 외국 나가면 좋을 텐데.”
조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은 힘이 들어간 주먹을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 앞까지 들이민다. 하지만 피부에 닿지 않고 멈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며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조조가 놀란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본다.
“놀랐냐? 장난한 거다. 잘 가라.”
싫지만은 않지만 좋아할 수도 없는 조조에게서 등을 돌린 소년은 당분간 아이들을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걷는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조조 탓에 잡친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오늘은 시합이 있는 날이니까. 몰래 시합장 안을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경기장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로 인해 경기를 본 적은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시합장에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소년은 오늘부터는 당당하게 들어설 수 있다. 오늘의 주인공인 미구엘의 주인이니까.
미구엘이 이기기만 한다면 마미는 떠나지 않을 것이고 한동안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소년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좋은 투계가 될 병아리 한 마리를 장만할 수도 있다. 마미의 표정이 당분간은 오늘처럼 맑은 하늘같겠지. 동생은 잘 먹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동그란 눈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파파한테서 전화가 오면 새 닭을 사서 잘 키우고 있다고 자랑해야지. 닭이 싸움에서 많이 이기면 파파도 얼른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더위가 코끝을 찌르려 할 때마다 나직하게 달래며 데리고 가는 바람을 느낀다.
5
소년은 야자열매에서 짜낸 오일을 손바닥에 비비고는 경건한 의식을 치루 듯 미구엘의 머리부터 꽁지까지 천천히 쓸어내린다. 윤기 덕분에 젊은 수탉은 한층 건강해 보인다.
미구엘이 담긴 자루를 들고 소년은 시합장으로 향한다. 둘러맨 자루가 아직 한참 자라야 할 소년의 등을 전부 가린다. 그의 그림자가 동네의 판잣집들을 한 번 씩 쓸고 지나갈 때마다 집들이 덜컹거리는 듯하다.
“시합이 끝나면 바로 돌아와.”
현관을 나서는 소년에게 마미는 그렇게 말했다. 요즘 소년에게 떠나겠다는 말 이외에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그녀도 시합에 대한 기대를 감출 수만은 없는 모양이다.
시합장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년의 기대가 긴장으로 바뀐다. 자루 속 미구엘은 끊임없이 종알종알 떠들어댄다. 소년은 녀석이 말을 알아듣기를 바라며 속삭인다.
“네가 이겨야 해. 파파에게서 전화가 오면 나는 네 소식부터 전할 거야.”
파파가 처음부터 시합에 직접 뛰어든 것은 아니다. 닭들을 훈련시켜 투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빌려주다가 파블로를 산 후부터 시합에 참가했다. 파블로와 미구엘은 수많은 우승 전적이 있지만 파파는 소년을 시합장에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기에 왜 투계를 보러 가지 못하게 하는지 원망하곤 했다. 외국으로 떠나기 전 파파는 미구엘을 시합에 빌려주기만 하라고 신신당부 했다. 지난달까지는 그렇게 했지만 직접 데리고 나가면 더 많은 돈을 딸 수가 있다는 마미의 계속되는 말에 소년은 오늘 그의 말을 어긴다. 그러나 사실은 파파도 자신이 파파를 대신하여 미구엘을 데리고 직접 시합장에 나서는 걸 바라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6
베토의 도움을 받아 그의 일행으로서 시합장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소년은 대합실로 가던 발길을 잠시 멈춘다.
“아저씨, 잠깐만 저기 들렀다 갈게요.”
시합이 시작되기 전의 빈 경기장을 본 것이다. 소년은 홀로 그곳으로 가 선다. 이곳에서 파파의 닭들이 싸웠다. 투계들은 작은 병아리일 때부터 닭들과 마주하기만 하면 한 놈만 살아남아야 싸움을 끝낸다.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닭장에 갇혀 혼자 지내야 한다. 투계만큼 외로운 동물이 있을까 생각하던 소년은 순간 오한이 온 듯 체온이 떨어진 몸을 잠시 부르르 떤다. 미구엘이 싸움에서 지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 그리고 소년은 혼자가 된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구엘은 꼭 이길 것이고, 소년은 재차 이를 꽉 물며 자신이 강하다고 느낀다.
대합실로 들어가니 경기 상대방을 찾으려는 참가자들과 관계자들로 북적인다. 소년은 자신보다 훌쩍 큰 어른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며 누군가를 찾는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베토를 지나쳐 집세를 걷는 날이 아닌 때에도 밀린 집세를 걷으려는 것처럼 위압적으로 보이는 마리오에게 시선을 고정한 후 망설이지 않고 다가간다.
“제 닭은 3파운드예요.”
동네의 집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마리오의 돈이라면 미안해하지 않고 따도 좋다고 파파가 언제나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꼬맹이를 상대해야 한단 말이야?”
마리오가 가당치 않다는 듯 껄껄거리다가 미구엘을 보고는 웃음을 멈춘다.
“이 닭이 아니었으면 너는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쫓겨났을 거야.”
둘은 오늘 경기를 치룰 닭을 저울에 올리며 무게를 확인한다. 마리오의 닭이 아주 조금 더 나가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경기 상대로 문제가 없다.
“판돈은 얼마냐?”
“제가 갖고 있는 전부요.”
페르난도가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석 장을 꺼내 보이자 마리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순간 거두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좋은 닭을 싼 값에 죽이려는 거냐? 차라리 나한테 파는 게 이득일 텐데.”
“미구엘은 지는 법이 없어요.”
“오늘은 다를 걸. 내 닭은 이기는 것만 알거든.”
시합이 시작되고 곧 처음 보는 광경에 소년은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하지만 어느새 어른들 틈에서 환호를 지르고 고함을 쳐댔다. 시합은 한 경기당 12분이었고 다섯 차례의 경기가 치러진 지금 패자가 된 녀석들이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죽었다. 그 녀석들과 싸웠던 닭들도 거의 성치 않지만 어쨌든 시합에서 이겼고 주인들은 내걸린 판돈을 전부 가져갔다. 사람들은 싸움닭 못지않게 흥분해있고, 어쩌면 싸움닭보다 더 흥분해있다. 분명 서커스에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어른들이 닭싸움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은 역시 애송이일 뿐이다.
드디어 미구엘의 차례다. 소년의 심장이 고불거리는 그의 머리칼처럼 파도를 친다.
“잘 싸워라, 미구엘!”
변성기가 시작된 목소리로 소년이 크게 외친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리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소년은 달아오른 자신의 볼이 붉게 물들었을 것 같아 그걸 감추려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싼다. 곧이어 신호가 울린다. 소년이 저도 모르게 양 볼에 올렸던 두 손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전광판을 바라본다.
수탉 두 마리가 경기장에 놓이자마자 목털을 빳빳하게 세운다. 공교롭게도 둘 다 하얀 색인 녀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내리누르려 팝콘처럼 튀어 오른다. 마리오네 닭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미구엘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따라 소년의 마음이 자루 입구처럼 조였다 풀렸다 한다. 미구엘이 더 높이 뛰어올랐으나 상대가 몸을 낮게 숙이는 바람에 녀석의 발톱은 적의 목이 아닌 꽁지 부분에 닿는다. 소년이 벌레에라도 물린 듯 몇 번이고 뒷덜미를 쓸어내린다. 마리오의 닭이 뛰어오르며 적을 내리찍으려 하지만 미구엘도 지지 않는다. 녀석(?)이 잘못 착지하며 쓰러지는 순간 얼굴을 부리로 쪼인다. 소년은 마치 자신이 쪼인 것처럼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린다.
“미구엘, 일어나! 일어나, 내 형제야!”
소년이 마구 소리친다. 그 덕분인걸까 그의 닭이 적의 목을 크게 쪼아 뒷걸음질 치게 한다. 둘은 다시 한 발짝씩 물러서 오랜 원수사이나 되듯 서로를 노려본다. 마리오가 소년을 쳐다본다. 하지만 소년은 마리오를 쳐다볼 겨를이 없다. 닭들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적을 내리 찍고 쪼기 위해 뛰어오르고 파닥거린다. 마리오의 닭이 발톱으로 어깨를 누르고 부리로는 부리를 물고 놓지 않는 바람에 위태했으나 미구엘은 어느 새 다시 힘을 내어 마구 몸을 흔들며 빠져나와 적의 몸통을 발톱으로 내리찍는다. 그걸 보는 소년은 손톱이 손을 파고드는지도 모른 채 지나치게 힘주어 손깍지를 끼고 있다.
시간은 벌써 8분을 넘겼다. 어느 한 쪽 지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해대고 있으나 둘 다 눈에 띄게 힘이 빠진 것이 보인다. 하지만 점점 더 크게 들리는 단어는 ‘미구엘’이다. 장내의 사람들이 끈기를 잃지 않고 공격을 해대는 미구엘의 승리를 바라며 목청껏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들 속에서 소년은 어느새 혼자만 화면이 정지한 듯 움직임도 없이 조용하다. 마치 동네 애들과 한 바탕 싸움을 하고 나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소년의 눈동자만이 전광판의 시간을 보았다가 경기장을 보았다가 하며 움직일 뿐이다. 미구엘이 공격을 당해도 공격을 해도 소년은 입을 다문 채 경기장과 전광판 시계만 번갈아 확인한다.
(+이쯤에서 한번 더 미구엘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묘사되어야.....)
사람들의 환호성이 고조에 다다랐을 때 경기장 안에 흐르고 있던 팽팽한 긴장이 찢어진다. 미구엘이라는 단어를 외치던 사람들의 입에서 욕설과 비명이 각자의 표현대로 쏟아져 나오며 장내는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소년이 장내로 뛰어 들어가 자신의 닭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내기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른다. 소년을 따라가려고 뛰어 나온 남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년을 따라가지 못한다. 마리오가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마리오가 갑자기 이해심을?)
“비켜.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어!”
“그만 두게. 그냥 애일뿐이라고.”
“고작 1분 남았다고! 1분!”
마리오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진정시키려 한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서 쓰나. 몹쓸 어른처럼 굴지 말라고.”
남자들은 아우성치거나 마리오의 팔을 밀치고 나가려고 하지만 결국 동네 유지의 말을 어기는 사람은 없다.
7
소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뿌리치면서 대기실이 아닌 구석진 곳에 위치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계속 나지막한 소리를 내고 있는 미구엘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가 녀석을 끌어안자 아픈 곳을 건드린 모양인지 신음을 내며 울어댄다.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좁은 화장실 안을 메우자 소년은 문득 수탉과 자신 단 둘만이 이 세상에 남은 것 같다고 느낀다. 녀석에게서 몸을 떼어 찬찬히 살피려는 때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린다. 그는 미구엘을 왼팔에 안고 본능적으로 오른쪽 주먹에 힘을 주며 돌아선다. 당장이라도 내려칠 수 있도록.
“이리 보여주렴.”
베토를 보자 소년 안에 가득 찼던 긴장이 물풍선 터지듯 순식간에 밖으로 흘러나온다. 소년은 휘청거렸으나 이내 균형을 잡고 벽에 기댄다. 베토가 수탉을 받아든다.
“여기를 많이 다쳤구나. 죽을 정도로 심각하진 않으니 걱정마라.”
베토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본 소년이 주머니에서 낡은 주사바늘을 꺼내 미구엘의 가죽에 꽂는다. 그리고 상처가 악화되지 않도록 입으로 다친 곳의 공기를 빨아들인다. 닭의 피도 함께 빨리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닭은 작은 신음을 끊임없이 뱉어낸다. 이 보다 더 심하게 다쳐서 돌아온 적도 많았지만 상처 부위를 다독거리는 손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은 후 소년은 다시 수탉을 받아 안는다. 손으로 녀석의 눈을 가리고 자신의 볼에 녀석의 머리를 가져다 댄다. 아직도 격하게 뛰고 있는 미구엘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수탉 그 자체가 하나의 심장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다, 이제야 소년은 실감한다. 녀석이 떨고 있는 건지 자신이 떨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거의 이긴 게임이었어. 10초만 버텼으면 미구엘이 이겼을 거야.”
베토가 웃으며 말하자 눈이 가려져 있던 수탉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궁금하다는 듯 주인의 손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소년의 상기된 얼굴은 더욱 빨개진다.
“담담해져야해, 페르난도. 그게 싸움닭 주인이 할 일이야.”
“아저씨 알아요. 잘 알아요.”
베토가 소년의 머리를 두세 번 어루만진 후 밖에서 기다리마, 라고 말한 후 화장실을 나간다. 걸었던 판돈은 무승부이기에 다시 돌려받을 것이고 미구엘도 자신과 함께 살아서 돌아가겠지만 소년은 갑자기 두려워진다. 그리고 화가 난다. 파파가 바로 앞에 있다면 사정없이 주먹질을 할 것만 같다. 싸움닭처럼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공격하고 또 공격할 것 같다. 왜인지 지금은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중에 꼭 생각해볼 것이다. 언제나처럼 일거리는 없을 테고 소년에게 생각할 시간은 넘치도록 많을 테니까. (????)
소년이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닭을 쓰다듬는다. 얌전히 안겨 있던 미구엘이 크게 운다. 그러자 출전을 앞둔 닭장 속의 닭들도 질세라 목청을 높인다.
1
62매
7단락장
파파가 일을 찾아 떠나고
파파 대신 싸움닭 미구엘을 데리고
투계장에 나서는 소년의 이야기다. 나름 차분하게 읽힌다.
적어도 투계장까지는 일정한 속도감과 긴장감이 있다.
그러나 투계장부터가
아쉽다.
원고량으로 보나
아쉬움으로 보나, 투계장 부분부터
그러니까 6단락장부터 다시 서술해야 한다.
소년은 당연히 실패해야 한다. 싸움의 결과까지 써야 한다면,
겉으론 실패지만, 속으로는 이기는 방식이
정답일 것이다.
아무튼
6단락장부터 다시 써야 한다.
아마도 다른 투계 싸움을 보면서 소년이 겁을 먹고
스스로 겁을 극복하는 과정을 써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미구엘이 싸우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
혹은 미구엘이 1차전 2차전을 싸워 이겨내고
마지막 가장 힘겨운 결승 3차전을 마리오와 대적하는 장면쯤에서
소년이 소년 특유의 생각과 주문을 외는 정도로
끝나도 좋을 것이다.
(3단락장도
(약간 더 보완되어야
(좋을 듯
이러한 과정에서
이제까지 나름 어리고 겁도 먹지만
맹랑하게 이겨내 온 소년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명료하게 드러나야 한다. 가령, 베토와 마리와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지면서
소년과 마리오, 베토와 마리오가 대립하지만, 그러나 소년은 어떤 면에서 마리오를 이해하는
적대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배우고 이해하는 자세를
취하는 정도의 아이러니가 확보되어야 하고,
1,2차전 투견을 통해, 감정조절이나 어른세계의 이중성을 알아채가는
소년의 모습이 드러나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투계장에 가서
어른들 세계를 보며 혹은 폭력적 현실을 보며 혼란을 겪지만,
소년이 안간힘을 다해 새로운 질서나 힘을
익히는 다짐이나 모습으로
끝을 내는 게
정석 같다.
결국
6단락장
7쪽부터 다시...!
그래서 80매쯤에서 끝내야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