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에서는 항상 감시 카메라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고 직장에서는 지문으로 출퇴근이 관리되고,
목에 걸린 사원증이나 학생증을 통해서 그 사람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수도권
시민이 현관문을 나서면 하루 평균 83번 CCTV에 찍힌다고
한다.
우리 일상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자인
미셀 푸코(Paul Michel Foucault)는 생각해 보자 한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광인은 미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한다.
중세시대에서는 광인의 말은 피안의 시계를 엿볼 수 있는 표식이기도 하고,
인간
본성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면서 어우러져 함께 살았다.
그런데 17,18세기에는 광인들이 사회와 격리되고 감금되어 ‘비정상의 대표’가 된다.
‘인간의 표준에 못미친다’라고
판단되면 강제수용소에 넣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길들인다.
18세기에는 하나의 질병으로
취급해 정신병원이 건립되고, 격리 수용하며 감금시켰다.
그런데 왜 광기를 이전 시대와 달리 수용소에 고립시키고 격리했나?
바로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성이 역사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권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이성은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합리적 학문의 기초가 되었으며 사회적 질서와 권력의 질서와 재생산에 기여하게 된다.
근대사회에
맞는 이성, 표준에 못 미치는 비이성이 질적으로 차별화 되었고,
광기, 즉 ‘이성에 낯선 모든 것’들이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억압한다.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형벌제도의 변화를 따라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통제하고 예속시켜왔는지 보여준다.
푸코가 감옥을 선택한
것은 감시권력과 감시 당하는 자가 명확히 대비되는,
즉 보이지 않는 규율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절대 왕정시대의 형벌은 외부의 사람들에게 화형이나
가혹한 형태의 가혹한
신체형을 눈으로 보게 함으로 권력을 과시하고 통제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금형과 강제노동을 통해 감시하고
처벌한다.
18세기말 공리주의 제레미 벤담은 ‘원형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을 만들었다.
감옥의 중앙에 감시탑과 그 주위에
원형으로 감방이 배치된 구조이다.
중앙의 감시탑에 강한 빛을 통해 간수는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지만
감시를 당하는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빛으로 인해 간수를 볼 수 없다.
권력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감시를 당하는 측은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죄수들은
감시의 시선 속에서 ‘자기검열’을 스스로 하며 권력의 요구에
따라 규율에 복종하고
‘내면화’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게
하는 것이 원형감옥의 위력이다.
미셸 푸코는 현대사회는 권력이 통제와 감시를 비가시적으로 숨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은 보이지 않게 모든 생활영역에서 우리의 신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다.
학생들은 교사가 관찰하기 쉽게 분단 별로 가지런히 앉아있고 교단은 교사가 학생을 감사하기 좋게 배열한다.
교사는 한눈에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도록 감시카메라를 통해 통제한다.
권력의
눈은 모든 것을 감시한다.
감옥, 정신병동, 군대, 학교, 공장과
회사에서 감시하고 있다.
회사는 사원들을 통제대상으로 보고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 전화통화, 이메일, 사원증을
통해
위치파악과 화장실에 간 횟수까지 다 표시한다.
학교, 회사, 군대, 가정 등에서 시간 면에서는
‘지각과 결석’, ‘일의 중단’이,
활동 면에서는 ‘부주의와 태만, 열의 부족’이 품행 면에서는 ‘건방짐과 반항’이,
언어 면에서는 ‘말대꾸와 수다’가, 신체 면에서는 ‘불결함과 비뚤어진 자세, 부적절한 몸짓’이 모두 일탈이 되고 처벌 사항이 된다.
이전 시대에는 이것들이 부도덕이었지만 지금은 ‘일탈’이 되고 처벌 대상이 된다.
권력이 일상행위의 가장 미세한 측면까지
침투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규율하는 사회, 나아가
인간의 정세성과 자화상 자체를 창출하는 ‘규율 사회’이다.
그는 사회구조가 우리를 지배하며 권력이 그 구조 속에서 각종 장치를 통해
은밀하게 행사됐음을 감옥, 광기, 정신병원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알려준다.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최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