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 전례년 나해
서문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나름대로 성서를 직접 대하게 될
기회를 찾아 얻기까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 직후 가톨릭 신자들은
Douai Version 두에 성서를 출판하여 세계대공황의
시기까지 각 가정마다 성경책으로 집안에 보관해 왔다.
그 기간 동안에 가톨릭 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유럽으로 가야 했었으며 일반 교우들은
라틴어로 봉독되는 서간경과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학자나 일반 교우 할 것없이, 성서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가지고 하나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가톨릭 신자들 수 천 명이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1945년에 대학교
교제로 출판된 성경책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고,
학자들로부터 성경책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즉 바르나바스 아른 Barnabas Ahern, 조셉 피츠마이어
Joseph Fitzmyer, 래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
로날드 머피Roland Murphy 같은 학자들이었다.
1955년에 우리 미국 가톨릭 교우들은 브루스 바우터
Bruce Vawater의 저서 4복음 해설 A Popular
Explanation of the Four Gospels를 통하여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죤 L 메켄지John L. McKenzie의
저서 양날 선 장검 The Two-Edged Sword를 통하여
구약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의 성서에 대한 성장에
또 하나의 다른 단계를 펼쳐 주게 되었다. 공의회는
성서를 새로운 전례의 중심으로 놓아 주었고,
교의나 도덕신학 중심의 설교를 강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강론은 그 날에 봉독된 서간경과 복음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강론 안내서 Homily Helps”와 다른 여러
가지 연구 논문들과 안내서들을 통하여 신자들을
도와주게 되었다.
강론은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알고싶어
하도록 해 주었으며: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1970년도에 제롬 성서 주해서 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를 25만 부까지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1980년도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고대 전통을 내면 생활에 새로이
다시 도입하게 되면서 속도 조절 장치들이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 주게 되었다:
즉 성서와 함께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
베데딕도회 수도원에서는 1500 여년에 걸쳐서 벌써
성서 읽기/영적 독서 lectio divina/divine reading묵상을
해오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와 시골의 본당에서,
흔히 성령 기도회 운동으로 영감을 받아, 조용히
깊은 생각을 한다든가, 묵상을 한다든가, 그리고
성서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오늘 날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서에 대한 이해와 성서 해설, 그리고 성서와
함께 기도를 올리는데 많은 도움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임을 통해서는 그렇게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데 대한 하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거룩한 성서 말씀이 저자 거리에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게 될까? 거룩한 성서 말씀의 강력하기는
하지만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빛은 포스트모던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계시해 주실까?
그 거룩한 성서 말씀은 여성주의와 탐욕의 문화에
대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해 수실 수가 있을까?
과학만능주의가 거짓 믿음으로 판정이 되고, 심층
심리학이라는 것이 중독과 충동에 대한 해설을
어설프게 하게 되며, 냉전의 긴장이 고삐풀린
민주화에 대한 긴장으로 변하는데 대하여 거룩한
성서 말씀은 무엇을 약속해 주실까?
거룩한 성서 말씀은 개인주의 시대, 자기도취증
시대, 그리고 생태학적인 위기의 시대에 우리에게
무엇을 확신시켜 주실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무슨
추상적인 개념이라든가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포스트모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문제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로 우리가 진리라고
말한 것에 따라오는 그 후속적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결과를 받아
들인다는 것 – 본 강론집의 저자 어니스터
퍼얼리타가 논하는 모든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과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지,
결코 그런 사람들을 낯선 사람들을 대하듯이
그저 동정심이나 가지고 앝보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삶이라는 것이 수 억 년에 걸쳐서
수 많은 별들과 함께 준비되어 온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식을 했다면, 감히 우리는 계속
남들이 죽어버리기를 원하며, 사헝제도를
도입하고, 낙태수술을 실시하며, 파괴적인
빈곤을 그냥 뒤로 미루기만 하게 될까?
이와 같은 접근을하면서, 본 강론집의 저자는
그 기간을 통한 미국 가톨릭교회의 움직임과
이제는 손에 직접 쥐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어떻게 이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요지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실례(實例)를 들어서 말하자면, 본 강론집의
저자는 조아킴 제레마이어스Joachim Jeremias
같은 사람들의 학문적인 작품과 존 소르비노
Jon Sobrino와 제라르드 슬로이안 Gerard
Sloyan같은 사람들의 성서 해설을 익히 잘 알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사색하는 기질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고있다: 이를 테면, “복음 말씀은오늘
우리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가 주십니다,”
라는 말을 하는데, 마치 본인이 직접 그 다락방에
갔다온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다. (부활 제7주일 강론)
그렇지만 만약에 본 강론집의 저자가 성서를
알고 성지를 안다면, 그 저자는 포스트모던 인류의
정신에 대한 지형도 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믿음이 수 십년에 걸친 격변의
시대를 이기고 견디어 낼만큼 강인하다는 것을 알고,
희망은 70년 전쟁 (1917-1989) 이 끝날 수도 있고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세상에서
불안정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저자는 소외된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정확하게 잘 가늠하고 있다. 단순성은 우리를
짜증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갈등과 투쟁에
대한 느낌을 전달해 주고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정신속에 들어 있는
애매모호함을 예의바르게 잘 나누고 있으며,
역설과 긴장 속에서 우리가 얻어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명확성을 지적해서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행복하게도, 한사람의 극작가이며 저자가
소유하고 있는 연극인의 안목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의 일에대한 개인적인 입법제정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관찰할수 있게 해 준다.
이를 테면 저자는 주님의 수난에는 시몬이라는
사람 세 명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무덤에서 살아나 밖으로 나오는 라자로는 수의로
몸이 감싸인채 나오는데 그 이유는 라자로가
결국에 가서는 다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는 수의를 잘 개켜서 따로 놓아 두고
무덤에서 나오셨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힐데가르트 폰 빈겐 (Hildegard of
Bingen1098-1179), 제라르드 멘리 홉킨스 Gerard
Manley Hopkins, 그리고 플레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 1925-1964) 같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서 구체적인 연극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만약에 저자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그것들 나름대로
자질구레한 일들이라면 그것들은 마치 수류탄과도
같이 현재의 조건을 폭발적으로 개방시켜 주게 된다.
어니스티 펄리타 Ernest Ferlita의 출중한 언어능력은
이런 모든 내용을 가장 짧은대화 속에 명쾌함과
생생함을 잃지 않고 잘 담아 놓는다.
그렇지만 그의 저서는 선교적인 이론이 아니다;
즉 저자는 자신의 저서를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는
강론으로 쓰지 않았다. 저자는 성서를 대역해서
이 세상에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저자는 세상을 대역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저자는 영성신학이라고도 말할수 있는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 내용이 그 어떻게 언급이 된다 하더라도
그 내용은 우리가 세기말에 즈음하여 우리들
중에 선포할 필요가 있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