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누군가 와서 외 9편
이우걸
차단된 가슴 사이에 두 개의 잔이 놓이고
떨리지 않는 손이 친절처럼 가득해 올 때
만남을 포기한 나는 저 가면의 잔을 쳐든다.
설익은 눈빛까지도 웃음으로 부딪쳐 와서
얼마쯤 뜻을 만드는 이 무서운 응접실에서
무수히 고용당해 온 한 세대의 시간이여.
슬픔이 슬프지 않고 기쁨이 기쁠 수 없는
잃어버린 우리 향방의 차디찬 배경 속으로
지금은 누군가 와서 돌아가는 바람이 분다.
저녁 이미지
은회색 연기들이 마을을 싸고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이승의 깊은 비애가
비워 둔 서편 하늘에 노을로 엉켜 있고
꽃들은 지고 있었다 또 꽃들은 피고 있었다
빈 들에 놀고 있던 하느님의 새들은
진흙과 잔가질 물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가난한 식구를 위해 두 손을 모은 어머니
주기도문 몇 음절이 문틈으로 새어 나가는
그 작은 불빛을 향해
아이들은 오고 있었다.
비
구인 벽보판을 빗방울이 때리고 있다
광포한 빗방울들이 자모字母를 때리는 동안
무노동 무임금주의의
깃발이 지나간다
넥타이
넥타이를 매고 나면 나는 뱀 같다
교활한 혓바닥과 빈틈없는 격식으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이 도시의 터널에서.
나의 너털웃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내 웃음이 꾸며 주는 청록빛 넥타이 속엔
지난밤 내가 숨겨 둔 간계가 있다는 걸.
넥타이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눈을 뜬다
예리한 핀 아래 눌려 있던 욕망들이
일제히 사슬을 벗고 제 얼굴을 드러낸다.
기러기 1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머니가 날아간다
비어서 비어서 시린
저 하늘 한복판으로.
다리미
한 여인이 떠났습니다, 월요일 자정 무렵
아들, 딸은 멀리 있었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가끔은 들렀다지만
온기라곤 없었습니다.
식은 다리미처럼 차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 다리밀 데우기 위해 퍼져 있던 코일들이
전원을 찾아 헤매다
지쳐 눈을 감았습니다.
바퀴는 돌면서
길은 달리면서 바퀴를 돌리지만
바퀴는 돌면서 길을 감고 있다
모나고 흠진 이 세상
둥글게 감고 있다
아침 식탁
오늘도 불안은 우리들의 주식主食이다
눈치껏 숨기고 편안한 척 앉아 보지만
잘 차린 식탁 앞에서 수저들은 말이 없다
싱긋 웃으며 아내가 농을 걸어도
때 놓친 유머란 식상한 조미료일 뿐
바빠요 눈으로 외치며 식구들은 종종거린다
다 가고 남은 식탁이 섬처럼 외롭다
냉장고에 밀어 넣은 먹다 남은 반찬들마저
후일담 한마디 못한 채 따로따로 갇혀 있다
가을
타계한 친구의 전화번호가 남아 있다
마지막 메일도 지우지 못했다
그걸 안 귀뚜라미가
밤새 울고 있다
자화상
먼 곳을 향해 가는 삼등 열차였다
누가 타고 내려도 그저 앞을 보면서
정해진 종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사변을 만나고, 기아에 허덕이고, 독재를 만나고, 시위에 휩싸이고
내 생이 스친 역들은
늘 거런 화염이었다
그러다 돌아보니 내가 안 보였다
다른 짐은 그대로인데 나는 어디에 있을까
맞은편 신호등 앞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 『이우걸 시조전집』 2025. 개정증보판, 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