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이 될 무렵
팔순이 될 무렵이면 사람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이제는 쉬셔야지요. 무리하지 마세요. 건강만 챙기세요.
말은 고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 해 보면 조금 억울하다.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이 이제 와서 겨우“쉬는 일”만 하라고 하면 그건 팔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팔순은 인생의 폐점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 묵은 술이 제맛을 내기 시작하는 때다.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렸다.
돈 벌어야지, 자식 키워야지, 집안 세워야지, 사람 만나야지, 세상 눈치 봐야지, 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때는 내가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인생이 나를 몰고 간 것 같았다.
그런데 팔순이 가까워지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환해진다.
이제야 세상이 보인다.
사람도 보이고, 돈도 보이고, 욕심도 보이고, 무엇보다 내가 보인다.
예전에 "메밀꽃 필 무렵"에는 달밤에 봉평장을 지나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피어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젊은 날 읽을 때는 그저 문장이 곱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다시 생각 해 보니, 그 장면은 꽃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다.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꽃은 피어 있다. 젊은 사람에게만 꽃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늦은 밤에도, 먼 길에도, 늙은 장돌뱅이의 발밑에도 메밀꽃은 환하게 핀다.
그러니 팔순이 될 무렵에도 꽃은 핀다. 다만 꽃의 모양이 달라졌을 뿐이다.
젊은 날의 꽃이 사랑과 야망이었다면, 팔순의 꽃은 감사와 여유다.
젊은 날의 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꽃이었다면, 팔순의 꽃은 내가 조용히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꽃이다.
하지만 감사만 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팔순의 인생에도 할 일이 있다.
먼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집 안에 앉아 텔레비전만 보고, 경로당에서 장기 두고 화투 치며 세월을 보내기에는 아직 다리가 아깝고, 머리가 아깝고, 세월이 아깝다.
파크골프채 하나 들고 밖으로 나가도 좋고, 테니스 라켓을 잡아도 좋고, 걷기라도 꾸준히 해야 한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인다. 마음이 움직이면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다.
팔순이 무서운 까닭은 나이 때문이 아니다. 멈추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사람은 멈추는 순간 늙는다. 달력의 나이가 아니라 생각의 나이가 문제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끝난다.
그러나 “아직 하나 더 배워 보자, 하나 더 가르쳐 보자, 하루 더 걸어보자”고 말하면 팔순도 청춘의 다른 이름이 된다.
팔순에는 또 할 말이 많다. 그런데 잔소리로 하면 안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잔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는 듣는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귀를 닫지만, “내가 살아보니 이런 건 조심해야 하더라.” 하고 말하면 마음을 연다.
그러니 팔순의 어른은 목소리를 낮추고 깊이를 높여야 한다.
많이 산 사람의 말은 길 필요가 없다. 한마디가 묵직하면 된다.
또 팔순에는 화를 줄여야 한다.
젊을 때 화를 낸 것은 세상과 싸우느라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팔순에도 매일 화를 내면 그것은 세상 탓이 아니라 습관 탓이다.
이제는 얼굴에 웃음이 있어야 한다.
어른이 웃으면 집안이 편해지고, 마을이 편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다가온다.
팔순의 가장 큰 권위는 호통이 아니라 넉넉함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팔순쯤 되면 돈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
돈은 없으면 불편하지만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면, 팔순에는 돈을 잘 쓰기 위해 살아야 한다.
밥 한 끼 사주고, 후배에게 책 한 권 사주고, 좋은 일에 조금 보태고, 손자에게 용돈 주면서 웃는 일도 인생의 큰 재미다.
움켜쥐기만 한 돈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잘 흘려보낸 돈은 사람의 마음에 남는다.
팔순이 될 무렵에는 친구도 다시 귀해진다. 젊을 때는 친구가 많아야 좋은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 수록 진짜 친구 몇 사람이면 충분하다. 만나서 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밥 먹었나?.” “요즘 다리는 괜찮나?.”
이런 말 한마디면 된다.
팔순의 우정은 거창하지 않아서 좋다. 살아 있다는 확인만으로도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순에는 감사해야 한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넘어질 고비도 있었고, 속을 끓인 일도 있었고, 억울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 지나왔다.
지나오고 보니 원망할 일도 있었지만 배울 일도 있었다.
미운 사람도 있었지만 나를 단련시킨 사람도 있었다.
실패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이 깊어졌다.
돌아보면 감사뿐이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다고 팔순을 조용히 정리하는 나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팔순은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펴고 오늘 만날 사람에게 웃어주고, 젊은 사람에게 좋은 말 한마디 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나라 걱정도 하고, 마을 일에도 마음을 보태야 한다.
늙었다고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 한가운데 서야 한다.
나는 팔순이 될 무렵 이렇게 살고 싶다.
늙었다고 숨지 않고, 나이 들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남은 세월을 아끼지 않고 쓰고 싶다.
몸은 조금 느려져도 생각은 앞으로 가고, 머리는 희어져도 마음은 푸르게 살고 싶다.
젊은이들과 다투기보다 그들의 등을 밀어주고,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보다 꿈을 심어주고, 같은 노년들에게는 우리 아직 끝난 것 아니다.” 하고 말해주고 싶다.
메밀꽃은 달밤에 더 환하게 보인다.
인생도 그렇다.
젊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팔순의 저녁빛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인다.
무엇이 소중한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니 팔순이 될 무렵 나는 조용히 말하고 싶다.
인생은 아직 장이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길은 있고, 달빛은 있고, 메밀꽃은 핀다. 그리고 나는 아직 걸어갈 수 있다.
팔순은 인생의 폐점 시간이 아니라, 오래 묵은 술이 제맛을 내기 시작하는 때다.
= 옮겨온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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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이 너무 젊어져서 팔순은 중년이래요.
동내 경로당엔 호적도 못 올린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