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과 잉어빵 / 강호형
내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 슈퍼마켓, 정육점, 치킨집,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 제과점, 중국음식점 외에도 무슨무슨 학원들까지 있지만 단지 규모가 겨우 오백 가구 정도여서 모두가 그에 걸맞게 작은 편이었다. 자연 한 업자가 한 가지 업종을 독점하게 되어 주민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불만이었다. 상인들 편에서도 규모를 늘릴 수 없는 불만이야 있겠지만 그 대신 천적 없는 연못을 독차지한 물고기들처럼 안정감은 있을 것이다. 입주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폐점하거나 주인이 바뀐 가게가 없는 걸 보면 그런대로 현상 유지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성업인 듯하던 슈퍼마켓이 작년에 문을 닫았다. 담뱃가게를 겸하고 있어 내가 가장 자주 드나들던 이 가게의 처음 주인은 오십대 부부였다. 점포 관리나 손님 다루는 솜씨가 ‘프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능란했다. 점포라야 채 열 평이나 될까말까한 규모였지만 계절 따라, 시세 따라 진열하는 과일이며 채소류가 주부들 취향에 맞고, 주인 내외가 친화력도 있어 한번 잡힌 단골손님에게 이탈할 빌미를 주지 않았다.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갔더니 낯선 처녀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데 담뱃값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빠, 에세원 얼마야?”하자 저쪽 구석에서 낯선 청년이 다가오면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어제 가게를 인수했는데 재가 장사가 처음이라 담뱃값도 모르네요.”했다. 알고 보니 꼭 내 아들 또래의 신혼 부부였다. 신혼이니 꿈도 한껏 부풀었을 듯한데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가녀리고 순진해 보이는 새댁이나, 장사 경험이라고는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해본 것이 전부라는 청년이 왠지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제법 잘되던 가게를 넘기고 떠난 전 주인의 의도가 미심쩍었다.
어쨌던 젊은 부부는 그럭저럭 장사를 익혀가는 듯했고 주민들도 예나 다름없이 드나들었다. 그래도 나는 만날 때마다 물가에 선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자 아파트 정문 바로 옆에 있는 큰 창고를 수리하는 공사가 벌어졌다. 대향 할인마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었다. 수리가 어지간히 진척되고 마당에는 아스콘을 깔더니 “초대형 〇〇할인마트 〇월 〇일 오픈!”이런 현수막이 걸리고 인근 곳곳에 같은 내용의 벽보까지 나붙었다. 건너편 언덕바지에 작은 아파트 단지 하나가 더 들어선 것이 화근이었다. 먼저 주인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젊은 부부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죄도 없이 젊은 부부에게 미안해서 ‘어르신’소리 듣기가 민망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얼굴을 익힌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침내 마트를 개업하는 날이 왔다. 지붕 위로는 애드벌룬이 뜨고, 마당 위로는 만국기와 오색 고무풍선이 너울댔다. 때 아닌 각설이 엿장수가 등장했는가하면, 벗은 건지 입은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미녀들이 요란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기세를 올렸다. 매장은 온종일 입추의 여지 없이 붐비는데, 사은품을 받으려고 식구대로 두세 번씩 드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잔치가 사흘이나 벌어지고서야 조용해졌지만 마트 측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요일 따라 품목을 바꿔가며 파격 세일을 한다는 전단을 뿌려대는 품이 내친김에 바닥가지 훑어버릴 기세였다. 이건 분명 피라미들이나 사는 연못에 느닷없이 뛰어든 잉어꼴이었다.
날이 갈수록 아파트 주부들은 마트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바구니를 들고 거리낌없이 옛 단골 슈퍼 앞을 지나쳐 마트로 가고 슈퍼에는 담배 손님 아니면 코 묻은 돈 들고 까까나 사러오는 꼬마 손님뿐이었다. 슈퍼는 결국 석 달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한동안 비어 있던 슈퍼 자리에 김밥집이 들어서더니 어느새 아파트 주부들과도 꽤 친해진 눈치였다.
안쓰럽던 마음도 꽤 사그러든 요즘 근처에서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려 차도 밑 통로를 자나면 바로 오른편 모퉁이에 안경 쓴 할머니가 상자떼기에 서툰 글씨로 쓴 <추억의 붕어빵>이란 간판을 걸고 붕어빵을 굽는 포장마차가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나도 추억이 되살아나 가끔 한 봉지씩 사 들고 오곤 했다. 할머니는 손이 굼뜨고 장사 솜씨가 서툴기는 했지만 푸근한 맛이 있어 좋았다.
그러저럭 용돈 벌이나 되는가 싶을 무렵, 바로 맞은편에, 웃음이 헤픈 청바지차림의 젊은 아줌마가 어묵에 떡볶이까지 겸한 잉어빵 마차를 차렸다. 그래도 나는 붕어빵만을 고집했는데, 요 며칠째 할머니의 마차는 포장을 내린 채 비닐 끈으로 질끈 묶여 있었다. 어제도 할머니는 여전히 휴업인데 건너편 마차에는 손님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잉어빵’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해서 건너가 빵틀을 들여다보니 모양만 조금 다른 붕어빵이었다. 빵 대신 쓴 웃음만 한입 머금고 발길을 돌렸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