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르는 그의 힘은 어디에서
강병철
신군부 시대 늦가을, 동학사 어디쯤에 모인 『삶의 문학』 동인들 모두 태양처럼 젊었던 시국이었다. 도마에 올렸던 조지오웰과 루카치를 갈무리하고 각자의 작품을 꺼내놓는 ‘까기 대회’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은식, 김흥수, 전인순, 이재무 전무용, 황재학 그리고 망자 시인 윤중호 등이 합석한 자리인데 그 중 이은봉과 김영호의 토론 대결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다. 김영호는 부드럽게 서두를 열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치열한 격정을 토로했고 나는 그저 구석에서 담배연기나 날리며 이따금 아, 하는 감탄사나 터뜨리는 중이었다. 40년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다산(多産)의 평론가이지만 그즈음 나에게 그는 시인으로 기억되었던 것 같다. 부안과 줄포 그리고 개태사 역장과 갈매기가 등장하던 문장들이 지금은 그냥 아스라하다.
임금은 주급인디 아픈 날이 많응게 밥값 치루면 없어/ 오히려 밥값 모자라 오사까에서 모아둔 돈을 헐었당께/ 거금 1500원이 조금씩 줄어드는디 속이 바짝바짝 타도만/ 싸목싸목 일허먼 어느 정도 흉내라도 냈을 거인디/ 일꾼들은 백병전 치루듯 아우성치며 일하는 것이여/ 실은 작업량 빨랑빨랑 해치우고 남은 시간은 노름을 혀/ 모이면 도박 앉으면 도박, 칼을 휘두르기도 허고 말여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 31 - ‘힘겨운 노가다판’」 부분
그가 기나긴 잠복을 깨고 첫 시집을 출산했으니 그게 『바람이 부르는 노래』이다.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라는 부제의 50편 연작시인데 이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식민지 민초의 고단한 증언’이 적확한 표현이다. 현장의 말투를 시인의 문장으로 변신시키는 이 작업은 기실 1980년대 초반 『삶의 문학』 젊은 동인들이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서 작업한 농민공동창작시 「옹매듭두 풀구유」 이후 몇 십 년만의 조우이다. 강제징용을 배경으로 한 식민지 시대의 지난한 서사에서 젊은 근육이 비춰지는 이유이다.
주인공 김장순님은 1922년 전북 줄포 출생으로 광복 1년 전 면서기 시험에 합격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고위직 아들과 합격증을 바꿔치기 당한 후 그해 10월 말경 일본 오사카 시바다니 조선소에 배정된다. 그 후 강제노역을 받다가 탈출하여 해방 직전인 이듬해 8월 10일 밀항선을 타고 다시 줄포로 귀향하는 신산의 스토리이다. 김장순님에 대한 사연은 일찍이 신경림 시인께서 언급한 바가 있으니.
진정서와 고발장을 써 받고
대서사는 묵은 잡지 뒤숭숭한 시렁에서
마른 북어를 안주로 꺼내놓고 한 마디 한다
사람은 착한 게 제일이랑께
신경림 「길」 부분
줄포 농민인 그는 장터 끝머리 2층에 대서방(代書房)을 차려놓고 글씨 값 대신 막걸리를 더 많이 나누던 장본인이다. 동시에 그는 농부이면서 뛰어난 기억력과 꼼꼼한 글쓰기를 겸비한 비판적 지식인이다.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고 이태준의 『문장 강화』나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투쟁기』를 읽고 설파했다. 김영호 평론가의 혈을 찌르는 기질이 부친의 핏줄이리라. 그는 ‘노름잠 다가 개꿈 꾸는’ 식으로 화두를 돌렸지만 독자들 모두 날줄씨줄의 촘촘한 그물망에 심장이 서늘했으리라.
쪼끄만 일본인 감시원은 목재더미 위에 올라서서/ 일부러 거구의 포로를 끌어내 따귀를 올려붙였제/ 가끔 다바꼬다바꼬 하며 담배 달라 애원하면은/ 피우던 담배를 슬쩍 흘리며 얼릉 주워갔제/ 사실 우리 조선인이 연합군 포로랑 함께 있었응께/ 조선소가 그 끔찍헌 공습을 모면헌 게 아니가 싶어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 27 - ‘조선소의 연합군 포로들’」
남도 사투리의 어눌한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쟁터의 복잡한 구조가 죄다 폭로된다. 키 작은 일본인 감시원과 거구의 연합군 포로 그리고 포탄의 불바다가 유독 조선소에만 빗나갔던 사연 역시 두세 번 읽었을 때에야 해독이 가능하다. (지면의 한계로 여기서 멈추고 그에 대한 무궁한 사연은 다른 지면을 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