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며칠 동안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정태는 창가에 서서 잿빛하늘을 올려보다가 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관상수에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두 팔을 머리 위로 힘껏 뻗고 두세 번 몸을 비틀었다.
극심한 협심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투병생활 중인 조현욱 회장을 대신해서 경영을 책임진 지 넉 달 만에 대표이사로 취임할 수 있었다. 주식을 상장해 명실상부한 중견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점에서 장기적 경영부재상태를 주주들은 급격히 경계했다.
“오정태 사장한테 회사전권을 맡겨야해. 우리 회사가 완전히 자리 잡으려면 오 사장한테 힘을 실어줘야지.”
“맞아. 조현욱 회장의 건강이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어. 안타깝긴 하지만 회사를 성장시키는 게 우선이지.”
“그러려면 유럽에 나가있는 이정후 부장이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이젠 이 부장이 국내시장에서 뭔가를 보여줘야 해.”
주주총회를 앞두고 정태는 의결권을 지닌 주주들을 만나 그들의 견해를 하나로 통일시켜 일단 3년의 대표이사 임기를 보장받았다.
- 이젠 이 부장을 국내본사로 불러들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됐어.
정태는 2년째 유럽지사장으로 나가있는 정후를 본사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바야흐로 성공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정후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유럽을 맡겨 내보내야 할 때도 그는 그리 가주었다. 이젠 내수시장을 겨냥할 때다.
부가가치가 높은 국내시장을 폭넓게 확장시키려면 그의 기획력이 절대적이긴 하다. 그렇기는 한데…. 주주들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그가 들어오긴 들어와야 하는데 몇 가지 꺼림칙하게 걸리는 게 있다.
- 잘 될 거야. 이 부장이 귀국하더라도… 남 비서관님 생각대로만 된다면 문제될 게 없어.
남경수 비서관. 그가 아니었으면 명실상부한 사업주로서의 위치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조현욱 회장의 가까운 친구이자 고향선배, 고향사람 중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인물. 금융감독원과 재경부의 중요요직을 거쳐 현재 청와대 금융경제비서관으로 새 정권의 부름을 받았다. 다음 지방선거 때는 전북 도지사에 출마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 그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은인이야.
정태는 남경수 비서관과 조현욱 회장, 그리고 자신까지 셋이 찍은 사진을 들여 보다가 사진틀을 손으로 문질렀다. 남 비서관과는 단순히 고향선후배의 인연을 넘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생의 최고 동반자로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태화물산은 자네가 운영해야 하는 거 아냐?”
“네?”
“며칠 전에 조 회장 병문안을 다녀왔었네. 회복되기가 힘들겠더구먼.”
남 비서관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며 친구인 조현욱 회장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음을 언급했다.
“지금도 제가 경영을 맡아하고는 있습니다만….”
“태화물산도 알이 꽤나 굵어졌어. 대행딱지를 달고 회사를 제대로 굴러가게 할 수 있겠어? 나도 이 회사의 대주주야.”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고민이란 건 빨리 털어내야지, 안고 있으면 쓰나.”
“…….”
“다음 주총에서 자네가 경영권을 인수하게.”
“네? …어떻게?”
“내가 보유한 태화물산 주식을 모두 자네에게 무상 양도하겠네. 그러면 길이 열리겠지?”
남 비서관의 제안은 실로 어마어마한 거였다. 내가 준 주식에 자네와 유럽지사장으로 간… 이정후 부장이라고 했던가, 그 친구의 소유주식을 합하면 어떤 안건이라도 의결 통과시키는데 문제가 없을 거야.
“이정후 부장의 주식을 말입니까?”
“조 회장은 자네보다 그 친구를 훨씬 더 신뢰해. 진작부터 태화물산의 후계자로 점찍어뒀더군.”
“그럴 리가요? 아무리 이 부장이 회장님의 신뢰를…”
“그래서 자네의 한계가 드러나는 거야. 아무리 유능하기로서니 회사총주식의 10퍼센트를 거저 주는 오너가 어디 있겠나?”
“…….”
말허리를 자르고 꾸짖다시피 언성을 높인 남 비서관의 말이 마냥 틀리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친구를 경계해야 해. 그러려면 자네가 먼저 선수를 쳐야 되고.”
남 비서관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굵은 침이 삼켜졌다. 그렇게 되도록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비록 태화물산을 고향선배이며 손위처남이 된 조현욱 회장이 창업했고 그의 수하에서 일을 해왔지만 처음부터 2인자는 나였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정후는 굴러온 돌에 불과하다.
여기서 1인자로 부상하지 않으면 급격히 추락할 수도 있다. 역시 남 비서관은 경제전문가답게 일이 되게끔 세세히 방법을 일러주었고 편법이지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묘안을 제시했다.
“제가 해드릴 건요?”
“조 회장의 그 땅을 갖고 싶네.”
남 비서관은 특유의 스타일 그대로 막힘없이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조 회장의 그 땅, 조 회장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북 전주의 서쪽외곽에 위치한 2만여 평의 초지와 임야.
“조 회장에게 그 땅을 양도했으면 하고 운을 떼 봤는데 전혀 그럴 맘이 없더군.”
정부에서 호남개발정책이 발표될 거라는 소문이 나돌기 훨씬 전부터 남 비서관은 일가나 측근명의로 전북일대, 특히 중심도시인 전주의 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부동산이나 주식의 시가추이에 관한한 그의 정보는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현욱이 땅만큼은 금전적 투자가치 때문에 욕심내는 게 아냐. 현욱이가 거기다 건물을 지어 노인들 먹여 살린 게 3년이 넘었지?”
“네. 순전히 사비를 들여 봉사를 하고 계시죠.”
남 비서관은 “바로 그게 내가 그 땅을 원하는 이유야.”라며 말소리를 낮췄다.
현재시세의 두 배를 쳐주겠다는 제안에도 꿈쩍 않더니 그 땅에다 실버타운을 조성해서 정부차원의 복지사업으로 운영하겠다면 무상으로 기부하겠다는 조 회장의 말에 남 비서관은 혀를 내둘렀다.
“내 친구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돼. 허참,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야. 그 땅을 왜 나라에 준다는 거야? 또 현욱이가 원하는 대로 하려면 보건복지부랑 각 지방자치단체의 의결이 있어야하고 대통령재가도 받아야 되는데 말이야.”
“그러니 저라고 뾰족한 방안이 있겠습니까?”
방법만 있다면야 남 비서관의 제안에 무조건 따르고 싶었다. 축재의 차원을 넘어 그의 도지사당선을 위해 그 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남 비서관을 바라보며 그저 마른 입술을 다셨다.
“자네 몫이야. 내 제안을 자네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방법은 무수히 많아. 세상은 선택하는 자의 몫이거든. 적극적인 사람만이 원하는 걸 취할 수 있는 게 세상이치야.”
“선배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아직….”
“자네 죽마고우, 내 사촌동생인 태민이를 만나게. 지금 내 지역구활동을 돕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