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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경기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장애물을 ‘허들’이라고 일컫는데, 이러한 장애물을 건너야만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허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을 ‘허들을 넘는’ 것으로 칭하고 있으며, 기존의 남성중심의 문화가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속표지에 시록된 다음의 구절이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허들을 넘고 싶은, 허들을 넘으려는, 허들을 넘은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성 평등’이라는 주제가 여전히 사회적인 주제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기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각 ‘허’와 ‘들’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여성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연대하고, 서로 도와 치유하는 장을 만들고’ 싶어 이 책을 기획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에디터 ‘들’이 쓴 ‘여는 말’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 겪었던 자신의 성폭력 경험으로 인해 힘들었던 시절을 제시하면서, ‘죽을 것 같은 고통에서 살아남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아닌, ‘성폭력 가해는 가해자의 삶을 망가뜨’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 이후에 가장 먼저 자신의 경험과 상처를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온전하게 극복하려면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을 찾아 상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된 이 책의 ‘첫 번째 라운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기술한 ‘허들을 넘는 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기에, 기획진은 ‘허들을 넘는 여자들의 작성 규칙’을 마련하여 가급적 필자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과거의 경험과 극복하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과 더불어 ‘꿈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모두 10명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바를, 모두 가명으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첫 번째 항목의 주요 내용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허들을 넘는 방법’으로 성범죄 대응 매뉴얼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허들을 함께 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세 번째 라운드’에서는 다양한 이들의 추천사와 응원의 말들을 수록하고 있다. ‘허들을 넘는 여자들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최종적인 목표는 허넘여의 해체’라는 ‘기획자의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남성중심의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전히 ‘성폭력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에게 시선을 던지는 사회적 관음증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행실 따위를 문제 삼으며, 피해자를 거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는 반드시 지양되어야만 한다. 절도나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물건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범죄의 표적이 된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범죄의 경우 유독 가해자를 비난하기보다 피해자의 행실 따위를 문제 삼는 시선이 적지 않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여겨진다. 이 책이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지침서로 역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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