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할 만한 노인이 적은 나라의 젊은이는 불행하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그렇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절찬리 상영 중인 롯데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들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다. ‘저렇게는 나이 들고 싶지 않다.’
‘대국민 사과’ 영상 속 94세 신격호(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총괄회장의 눈썹은 과장되게 새까맣게 그려져 있었다. 입술은 지나치게 도톰하게 칠했다. 노령을 화장술로 감추려는 발버둥이 그대로 읽혀 안타까움만 자아냈다. 어려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노추(老醜)의 증거일 터다. 이 장면은 맨손으로 대기업을 일궈낸 그의 노년기의 쓸쓸함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모두 추해지는 건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이라는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인생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며 나이 듦을 찬양했다. 롯데 일가의 모래시계는 거꾸로 가는 모양인지 신 총괄회장뿐 아니라 그의 남동생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도 품격 잃은 노년을 만천하에 과시 중이다. 조카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갈등을 부채질하는 백발의 그의 모습은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
신 총괄회장의 아들 둘 모두 젊은이의 롤모델이 되긴 글렀다. 장남 신동주(61·히로유키·宏之) 전 부회장이 한국어를 못한다며 “궁민 요로븐 재손하무니다”고 재미동포 부인과 함께 일본식 90도 절을 하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형식적 사과로 멍석을 깐 후 친동생 욕을 수분에 걸쳐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반면교사 사례로 삼으면 딱일 터다. 차남 신동빈 회장의 한국어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의 『슬픈 외국어』에 빗댄다면 ‘슬픈 모국어’에 가깝다.
나이 듦의 품격이 사라지면서 국격까지도 위태로운 듯하다. 한 영국인 경제전문지의 서울특파원은 사석에서 롯데 사태를 두고 “94세 재벌의 집안 싸움이라니, 덕분에 하한기인데도 기삿거리는 많아서 좋아”라고 뼈있는 농담을 했다. 올해 초 본국으로 돌아간 어느 외신기자와 e메일을 나누던 중 그가 “난 롯데 사태 관심 없다”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답이 이랬다.
“한국 재벌들 나이 들면 다 집안 싸움하는데 뭐가 새로워?” 창피했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은 연금저축 가입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내가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의 마지막에 배치했을 거다”라고 했지만 그도 우리도 신이 아니다. 노년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늙는 게 두렵다.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소설가
20년 이상 외국에서 살다 귀국한 지인이 우리 사회에서 만나는 극명한 변화를 ‘노인들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의 노인들이 “품위 있고 존경 받는 지위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목격하는 노인들은 “대체로 화가 나 있고 조급하며 불만이 가득 차 있더라”고 했다. 물론 그것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성장 견인차 역할을 했던 그들이 노년에 느끼는 허망함을 왜 모르겠는가. 경제적으로 발전한 풍요사회의 신화가 떠안기는 상대적 박탈감도 작용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개인들이 더디게 나이 드는 현상도 이전과 다른 노인의 탄생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 모든 요인을 염두에 두어도 끝내 기이한 대목은 우리 사회에 나이 듦에 대한 담론이 없다는 점이다. 노년에 대한 인식, 노년의 삶에 대한 모색, 노년에도 가능한 삶의 소망 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노년을 마치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긴다. 그것을 입에 담는 것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문학에서도 만화에서도 늙음은 금지된 주제다. 내가 노년에 관한 에세이를 준비한다고 말하자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했다. 참 이상한 생각을 하셨군요.”
프랑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70년에 출간한 『노년』이라는 책의 서문 중 일부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자들의 인권이 소홀히 취급되는 세계의 음모를 깨뜨리고자 한다는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노년을 주제로 하는 남성 저자의 책도 드물지 않게 만났다. 인상적인 책으로는 기원전 철학자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와 현대 일본 작가 세키 간테이의 『불량하게 나이 드는 법』을 꼽을 수 있다. 두 책 사이에도 시대적 변화가 명백히 읽힌다. 키케로는 노년을 유연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성숙해 가는 존경 받는 스승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2000년에 출간된 세키의 책은 나이 듦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정신적 젊음을 유지하는 쪽에 초점을 맞춘다. 첫 장에서 저자는 여든 살에도 자기가 ‘색골’로 소문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어떤 노년을 보낼 것인지는 온전히 개인적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하지만 노년을 보편적으로 무용함·소외감·박탈감 등의 이미지와 쉽게 연결시키는 우리 사회는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때 큰 목소리로 노래했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가사가 노년기의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 있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김형경 소설가
기억의 술래
김지희
#1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여기서 내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래경은 다음 정거장까지 가는 길이 순전히 여분의 일처럼 느껴져 따분하고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가는 내내 되돌아갈 길을 미리 익혀두기라도 하듯 차창으로 반대편 도로만을 바라봤다. 마침내 버스가 멈췄을 때 래경은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레 해원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아무래도 다음 같은데" 흘리듯 말했을 뿐 확신하진 않았다. 고집스러운 어조도 아니었다. 오히려 여행 온 실감이 난다며 웃어 넘길만한 일이 생긴 것도 같았다. 정작 해원이 믿은 것은 래경의 지리 감각이 아니라 그럴 것 같다, 라는 느낌이었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그랬으니 버스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 것 까지도 래경을 따랐던 것이다. 해원은 가고 있다는 상황이 주는 일시적인 불확실함이 어디까지, 라는 결정을 최대한 미룰 수 있기를 바랬다.(?)
뜻밖에도 래경의 표정에 자신감을 찾아준 것은 잘못 내린 이곳이었다. "저기 봐"하고선 혼자서 뛰다시피 보도블록의 끝까지 갔다. 그 앞으론 차들이 지나다녔다. 정류장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거나 적어도 갈 곳이 정해져 있는 듯한 사람들이 내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순식간에 뒤섞였다. 어수선한 가운데 자기들과 다르게 생긴 사람이 갑작스레 나타나 큰 소리를 질렀으니 원하지 않았더라도 눈길을 끄는 상황이 됐다. 래경이 팔을 뻗어 가리키며 다시 강조하지 않았더라도 둘은 이미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배가 그보다 작은, 그렇지만 그 배가 옆에 없었더라면 충분히 커 보였을 다른 배들을 양쪽으로 거느린 듯 서 있었다. 하도 거대해서 카메라에 담으려면 어디까지 물러서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거 바다지? 이 주변에 강이 있다는 얘긴 없었으니까."
바다라고는 하지만 해변이나 그 비슷한 모래밭조차 없이 잔잔하게 물결만 치고 있어서 보기 드물게 큰 강처럼 보이기도 했다. 래경이 압도적이야, 라고 정리하듯 말했을 때 해원은 동의하면서도 어쩐지 그 말이 큰 배가 있는 곳과 자신들을 더욱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 것 같아 조금쯤 뒤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멀리, 도로가 크게 휘어지는 지점에는 한 눈에 봐도 둘의 나이를 합한 것보다 더 오래 됐을 법한 다리가 있었다. 그 너머로 상대적으로 조그만 해 보이는 배들이 떠 있었고 착각으로 느껴질 만큼 조금씩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해원이 무심코 "숙소보다 바다와 가까워졌는데"(?) 라고 말했지만 어느새 래경은 또 저만큼 가 있었다. 사방이 관광 엽서에서나 볼 법한 풍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현실적인 말을 꺼내봤자 모두 겉돌다 사라질 것 같았다. 역이나 큰 길과 가까운 호스텔 같은 데가 아니라 민박이 가능한 가정집을 굳이 고집한 것은 래경이었다. 이웃엔 평범한 가족이 사는 곳. 평범하다는 게 뭔지, 혼자 살거나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괜히 트집 잡듯 대꾸했지만, 결정을 바꾸게 할 만큼 반대하지는 않았다. 실은 해원도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래경이 말하는 그 가족이라는 것도, 다른 곳에 사는 보통의 사람들도.
저만큼 떨어져 있는 래경은 그저 신이 나 있었다. 일부러 여기 오기 위해 한 정거장 놓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원은 모르는 사람을 관찰하듯 하나하나 새롭게 래경의 모습을 지켜봤다. 한 가지 감정이 벅차서 다른 것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일 정도로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어디에 있어야 좋을지 잘 아는 사람처럼 주변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해원은 자주 그래왔듯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기분을 확인했다. 저만큼 기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씩 떨어진 채로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이나 몸짓, 어디라고 뚜렷이 짚어낼 순 없지만 공통적으로 안정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 곳에 정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와 같은.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자유스러움은 곧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긴장감으로 바뀌기도 했다. 해가 지려면 아직도 꽤 시간이 남았지만, 무턱대고 이곳에서 저녁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 먹고 배를 타보자, 오늘은.”
어느새 바짝 다가온 래경이 탑승 티켓을 사서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기대감에 차서 말했다.
“두 가지를 다 하려면 우선 숙소를 찾아야 해. 계속 들고 다닐 생각은 아니지?”
해원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살짝 올려보였다.
“숨 좀. 여기 공기가 좀 다른 것 같지 않아?”
그러나 자신이 방금 건넨 말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듯 래경은 해원의 손에서 가방을 빼내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보니 양손에 비슷한 크기의 가방을 들게 돼 이제야 몸의 균형이 잘 잡힌 것 같기도 했다.
(?) 첫단락의 실제 사건 내용 치고 너무 길고, 다소 어수선하다
#2
좁은 골목 안에서 둘을 따라 오는 것은 트렁크 바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박힌 길에 고양이와 개가 마치 무늬처럼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다 둘을 보곤 몸을 움직였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접어들 때마다 한 번은 고양이, 다음엔 개가 뒤에서 속도를 맞춰 따라오거나 안내하듯 둘을 앞섰는데 골목 끝에 가서는, 여기서부터는 다른 애가 알려 줄 거야, 라고 신호를 주듯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정해놓은 영역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보기엔 지나온 곳과 가고 있는 길을 잘 구별하기 힘든 골목(?)이 계속 이어졌다. 둘 외엔 오고 가는 사람도 없어서 누구라도 만나면 눈에 익은 길에 들어선 것처럼 반가울 것도 같았지만, 막상 낯선 누군가 나타나면 서로 놀랄 것 같은, 햇빛도 비껴갈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얼마쯤 가다보니 개나 고양이가 더는 보이지 않았고 앞서간 사람들이 양쪽 벽을 옆으로 힘껏 밀어놓은 것처럼 길이 넓어지고 상점과 사람들이 나타났다.
"봤어? 여기 애들은 누가 기르는 것도 아닐 텐데 꼭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겼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말을 붙였는데 해원은 다닥다닥 연달아 있는 건물과 지붕을 살피느라 래경과 보폭도 맞추지 않고 몇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 외엔 알려주는 것 없이 무심한 푸른색(?)이었다. 둘은 같은 길에 있었지만 다르게(?)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에서는 기념품으로 사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는 큐빅이 잔뜩 박힌 조명과 거울, 요란한 카펫이 진열되어 있었다. 래경은 숨이 조금 가빠 왔지만 해원의 걸음에 맞췄고(?), 둘이서 나란히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뜸 자기 이름을 말하고 이름이 뭐냐고 묻는 싹싹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입고 있는 옷을 칭찬하면서 어울릴만한 스카프가 있다며 들어와서 보라는 적극적인 중년의 여자도 있었다. 둘은 언뜻 보기에도 장사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단 하나뿐인 것>정도로 이름 붙이면 딱 어울릴만한 분위기의 가게(?)인데 낯선 언어로 된 소박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얼핏 봐도 세상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만한 물건들(?)이 벽에 걸려 있거나 이리저리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쉽게 이곳을 떠날 것 같지 않은, 누구의 관심도 끌 것 같지 않은 장신구들뿐이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도 딱히 팔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는데 누가 지나가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인가 또 열심히 만드는 중이었다. 아마 그것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 될 것 같았는데 남자는 어쩌면 자신이 모으거나 갖고 싶은 것만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해원이 조금 더 관심을 보이며 이끌리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중하고 있던 남자를 방해한 것(이미 방해 아닌가?)은 래경이었다. (-골목 분위기 묘사 부분과 더불어, 가게 묘사가 재밌지만, 정영문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감아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골목 분위기나 가게 묘사나 모두 정영문이 바라본 풍경처럼 별로 주목할 만하지 않은 채로 하릴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정밀 묘사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
"혹시 여기 쓰여 있는 주소가 어디쯤인지 아세요?"
더듬더듬 말했는데 역시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말하려 하자, 해원이 가로채며 바꿔 물었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요? 근처 같긴 한데..."
그제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래경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바라봤다.
"...글쎄요. 주소를 보고 다니는 건 아니라서. "
가게 안에 조용히 흐르던 음악 속의 가수처럼 낮지만 리듬감 있는 목소리였다.(나즈막한 목소리의) 남자는 자기 집 주소도 제대로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래경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의무감에 어디 살만한 게 없나 하는 시선으로 둘러보는 해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가게에 들르기 전과는 딴판인 세상이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곳이었는데 거리는 조금 전과 다름없었고, 이제 막 어둑해지려고 했다. 생김새부터 옷차림은 물론, 말을 거는 방법도 제각각인 상인들이 거의 같아 보이는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졌다. 이 골목에서만큼은 물건보다 파는 사람을 보고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길가에 테이블을 몇 개씩 내놓은 음식점들이 이어졌다. 드문드문, 두세 명씩 모여 앉은 사람들이 술이나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다양한 언어가 한 데 섞인 데다 토막토막 끊기고 이어져서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나 몇 개월 안됐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도 있었는데 해원이 그곳에 오래 시선을 두었다. 여자를 보는 것도, 아기를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3
아이는 몇 살쯤부터 기억을 가질까. 해원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곧잘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부추기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스러워 하다가도 대부분 친한 친구 이야기를 꺼내듯 조금씩 이야기를 부풀려가며 말했다. 그중에서도 해원은 윤필의 기억을 좋아했다.
누나가 나보다 여섯 살이 많으니까. 학교에서 간식을 받으면 꼭 내걸 남겨왔어. 다른 친구들이 먹을 때 꾹 참았다가 가방에 넣고선 쉬는 시간마다 열어 보곤 잘 있으니까 뿌듯해 했다는 거야. 그때부터 생색내는 게 특징이었던 거지. 어쨌든 대개 노란 크림이나 생크림이 들어있는 빵이었는데 그런 날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신나서 집까지 거의 뛰듯이 왔대. 그러면 내가 꼭 대문 문턱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야.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그랬던 것 같은데 누나는 그게 그렇게 뭉클했다나봐. 나중엔 가여웠다는 말로 살짝 바꾸더라고.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서 내 얼굴을 보면 장난이 치고 싶어졌는지 빵 봉지를 꺼내 흔들고는 먹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도망을 치는 거야. 누굴 닮았는지. 아무튼 쫓아갔어. 따라잡을 듯 말듯, 그 정도로 달렸어. 그 때 난 하루 종일 어디 뛰어 나가 놀 일이 없나 찾아다니고 그랬었거든.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윤필은 꼭 말을 멈췄고 해원은 숨을 죽였다. 이번엔 래경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생각이 잘려 나갔다.
"이 집인 것 같은데 이 집이 아니었으면 싶은데."
래경은 오래된 건물 현관 앞에 서 있었고 옆 건물을 봐도 별로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는데 그런 집들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공장처럼 이어졌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게 계속됐다. 거의 똑같아서 아무 집이나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조금 덜 실망한 듯한 해원이 짓궂게 물었다.
"옆집에 평범한 가족이 살고 있을 것 같아?"
"현재로선...아무도 살고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래경이 의기소침하게 대답을 하고선 의심쩍은 표정으로 벨을 눌렀다. 주소대로 3층을 세 번쯤 눌렀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어 혹시, 하고 다른 층 벨을 누르려는데 전화가 혼선됐을 때의 소리 비슷한 게 났다. 이어서 달칵, 하고 문에 살짝 틈이 생겼는데 래경은 여자가 마중 나올 수고를 덜어주려는 듯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해원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따라 들어갔다.
#4
며칠 간 지내게 된(그) 집은 손님을 맞으려고 정돈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 흔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했다. 주인 여자는 키를 건네고, 간단히 주의사항을 말한 뒤에 집에서 가까운 볼거리에 대해 손짓을 곁들여가며 유난할 정도로 길게 설명했다. 금이 간 벽을 가리려고 그 앞에 화분을 놓듯이. 가까운 곳에 큰 시장이 있고, 아주 오래된 성당이 있으며, 산책이나 운동 삼아 걸어가면 바다가 금방이라고 했다. 그건 꼭 그렇지 않다는 걸 둘은 이미 알았지만. 그러고선 자기는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고 했다. 여자의 집은 다른 거리에 있었다. 집을 아예 떠넘기기라도 한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지내기에 좋을 거라고 덧붙였는데 비어 있는 게 옆집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둘은 여자의 말이 되도록 밖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말처럼 들렸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마음이 맞았다고, 서로 위로의 말을 대신할 때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 -주인여자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침실에 가려면 간단한 음식을 할 수 있는 간이 부엌을 거쳐야만 했다. 방은 세로의 길이를 떼어다 양옆으로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로가 한참 긴(?), T자 모양이었다. 래경은 침대 두개가 기차처럼 이어져 있어서 몇 시간 뒤 정수리와 정수리를 맞대고 자게 될 둘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져 웃음이 났다(?). 그러고 나선 서로 불평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처럼 애써(?) 침묵했다. 각자의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으니 침대 앞쪽의 공간이 꽉 차 버려 얼핏 보기에 짐만 보관하는 창고 같기도 했다.(?)
"사진에 속았네."
래경이 결국 한 마디 했지만, 부엌 타일에 걸려있는 대부분의 요리 도구들처럼 별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해원은 짐을 좀 더 줄였어야 했다고 말했다.
주인 여자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안에서 오래 있을 게 못됐다. 래경이 싱크대와 욕실 수도꼭지를 열어보고 옷장과 침대 커버를 살피는 동안 해원은 침실 안쪽에 있는 조그마한 창문 앞에 서서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이제야 간신히 혼자가 된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
해원은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말했지만 래경에게도 들릴 만큼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두 달 전에 봤을 때처럼 다른 사람의 배를 만지듯 자기 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자꾸 말을 걸어주면 좋다고 했어. 처음엔 어색했는데 계속 하다보니까 나도 꽤 수다스러워졌는데."
래경은 어느 날 아기를 가졌다고 했을 때처럼 어느 날, 아기를 잃었다고 말하던 해원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둘 다 해원이 바라던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쩌다 그렇게 됐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익숙해져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얼마 뒤에 만나서는 그게 아마 혼자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윤필과 둘이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기를 가졌을 때 래경은 이제 정말 혼자가 아니잖아, 하고 고쳐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해원이 이제 겨우 혼자라는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에.
래경은 오래 전, 해원이 첫 번째로 기억하는 일에 대해 물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아무리 더듬어 봐도 어떤 게 가장 먼저인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것은 그저 강렬한 일이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어 답답하고 머리가 울리듯 아파 빨리 물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그럴수록 코와 입에 쉼 없이 물이 찼다 빠지길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고 있는데. 아주 크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온몸으로 물에 저항하면서 나던 마찰음도 점점 먹먹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보이는 것은 물속의 침착한 고요함과 가끔 물 밖으로 머리가 나왔을 때 아득하던 물결들이었다. 그 때,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한 것은 한참이나 자란 후였다. 해원에게는 물에 빠졌던 기억 같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가 아무래도 자기보다 사나웠던 옆집 아이한테 세 발 자전거를 뺏겼던 때 같기도 하다고 금방 바꿔 말했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붉은색 개미를 손으로 집었던 게 첫 기억 같기도 했다. 따가워서 놓치면 다시 바닥에 있는 아무 개미나 집어 들거나 빠르게 도망가는 걸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가리기도 했던. 그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아직도 희미하게 따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기억이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어떤 것 앞에서는 자꾸 도망치게 됐다(?). 해원이 갑작스레 묻는 바람에 오히려 자신이 기억의 한 부분을 조금 붙잡은 것도 같았다.
평소 해원은 주로 질문해 놓고 자기 생각에 잠기곤 했지만 래경이 어렸을 적 기억을 들려줄 때만큼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기억에 같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여태껏 한 번도 해원의 기억에 대해서는 반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 역시도 말하고 싶을 때가 되면 말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런 게 아니라면 꼭 듣지 않아도 될 말이라고, 막연하게 넘겼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런 게 있을까, 하면서.
#5
문을 잠그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아까와는 다른 모습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숙소 건너편에 있는 식료품 가게는 처음 올 때 놓치고 보지 못한 곳이었다. 우산도 팔고 선글라스도 팔았다. 직각의 비슷비슷한 건물들 너머에 있는 뾰족한 탑은(반듯한 건물 너머의 뾰족탑은?)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어 주변 건물까지 경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두워지니 오히려 더 눈에 비치는 게 많아졌다. 첫 인상과 달리 꽤 근사한 동네 같다고 해원이 말할 때까지 둘은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였다.
래경은 해원이 자신을 따라 가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여기까지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되짚어보면 둘이 특별히 가까워질만한 이유나 계기도 없었는데. 우연히도 자주 마주친 것, 얼굴을 익히고 나서는 잠깐씩 이야기를 나눈 것. 따로 약속을 잡고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런 만남이 끊이지 않았다는 게 전부였다. 서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해원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면서였다. 이상하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먼저 묻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기도 했지만 더 깊게 알려는 마음도 크게 없었으니까. 래경은 그것이 일종의 보호, 라고 생각했다. 누구로부터 누구를? 하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수는 없는. 생각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서로 가까워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저 어쩌다보니 다른 사람들보다도 오래 지켜봐 왔다는 게 다였다. 마치 가족처럼. 가족도 아닌데.
결국 주인 여자가 말한 대로 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시장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커 도시 전체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좌판마다 몇 명씩 모여 길을 막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걷고서 부터는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보다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으로 빠져나갈까 망설이다가도 처음 보는 물건이 나오면 어쩔 줄 모르고 정신을 뺏겼다. 이곳에선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까지 팔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헤매다 길고 북적한 시장을 빠져 나오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시장 묘사가 초점이 없어 아쉽다) 그 앞에 각각 바다와 배 모양, 그리고 성당 그림이 그려진 푯말이 있었다.
"여기는 비슷하면서 자세히 보면 다른 게 참 많은 것 같아." (?)
"표지판이 두 개인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이럴 거면 표지판이 하나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빠져나온 길까지 말이야."
둘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왼쪽으로 갔다. 안내판이 없었어도 바다가 어디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곳에서 유독 끈적이는 바람이 불어왔고 생선 굽는 냄새가 가득했는데 둘처럼 시장을 빠져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와 트럭이 열 개도 더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에서 두 세 번째쯤 됐을 곳에서 콘 아이스크림을 샀다. 해원과 래경이 거의 동시에 "초코", "바닐라"라고 말했는데 평소 같았으면 서로 반대로 골랐어야 맞는데 어쩐지 둘 다 무엇인가 다른 걸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가볍게 풀었다.(-,.-;) 이제 가로등, 자동차 전조등, 식당과 건물 불빛들이 사라지거나 꺼지면 완전히 캄캄할 정도의 한밤이었다(?). 단순히 낮과 밤으로 나뉘어 밝거나 어두운 모습만으로 알았던 하루가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아침에는 서서히 불을 켜더니 저녁쯤 되자 다시 하나씩 끄듯 점점 어둑해지는 걸 온전히 지켜본 것 같았다(?). 밤이 되면서 대신 상징적인 건물들에 인공적으로 불이 켜졌는데 그런 곳이 워낙 많다보니 도시 전체에 조명을 켜고 몇 곳만 불을 꺼놓았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 사이 사이에 있는 골목들이 바로 불 꺼진 부분이었다. 좁고 어두웠다. 여행객과 이 곳 사람들은 그런 길을 피했다. 거기는 아이들 차지였다. 의아하게도 혼자 다니는 아이들은 그런 골목에서 불쑥 나타나 우리 앞에 끼어들고선 손을 벌리거나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가까이에서 보니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둘은 먹고 있던 걸 줄 수 없어 난감하기도 또, 한 명에게만 주면 혹시 다른 어디에선가 지켜보던 아이가 달려들까 싶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속도를 내어 걸었다. 한 아이가 꽤 멀리까지 둘을 따라왔지만 끈기가 있지는 않았다. 주변엔 둘 말고도 다른 여행객들이 손에 뭘 쥐고 있거나 먹을 걸 사려고 줄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실망하지 않고 그들에게 갔다.
해원은 갑자기 졸린 것인지 그냥 피곤한 것인지 몸이 무거웠다. 퇴원하기 전, 의사가 다 괜찮다는 말을 했을 때도 이처럼 무거웠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연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 답을 하기가 귀찮았다. 괜찮냐는 물음이나 괜찮아질 것이라는 예언 같은 말이(위로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괜찮다는 대답도 괜찮아질 시간도 모두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그 말이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되뇌었다. 그럴수록 괜찮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런 말이 낯설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모르는 척 하는 게 낫겠어? 라는 윤필의 질문도 듣는 순간에만 따끔했을 뿐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해원은 자신이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원래부터 그랬었다고, 그래왔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그러고 나서는 진단, 이라는 말이 또 낯설어 몇 번이고 다시 발음했다. 며칠 만에 병원에서 오고가는 말에 익숙해졌지만 그런 말들은 이 안에서만 쓸모 있을 것 같았다.
래경이만 괜찮다면 함께 다녀오라고 한 것은 윤필이었지만 자기만 빼고 둘 다 별로 괜찮지 않거나 불편한 마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윤필은 아기를 잃은 것보다 해원이 아기를 별로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부터 괜찮지 않았으니까.
#6
배가 조금 더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일어서 있던 몇몇이 중심을 잃으면서 기우뚱했다. 이십 분 전에 올라탄 배는 아직도 같은 곳에 있었다. 이십 분이나 삼십 분 후,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는 게 아니었다. 시동을 켜려면 적어도 삼사십 명 쯤 되는 인원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선장이 직접 뱃머리에 서서 사람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는데 가격이 저렴하고, 타기만 하면 곧장 출발할 것처럼 서두르는 목소리에 둘은 고민 없이 올랐지만 기다림이 길어졌다. 배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들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새로 사람이 올라설 때마다 이제 출발하겠지, 하고 조금씩 기대하듯 자세를 바로 잡았고 선장의 목소리가 약간만 작아지는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지막일 것처럼 한 명이 올라타고 나서도 네다섯 명쯤 더 오른 후에야 선장은 겨우 두꺼운 밧줄을 풀고 떠날 준비를 했다. 어느새 작은 배엔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둘이 배에 오른 후 한 시간 가까이 지난 후였다. 주변의 다른 배들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고 낡은 배는 제법 속도를 냈다. 주말 가족 나들이를 나온 듯한 젊은 부부와 여자 아이가 둘 앞에 앉아서 바나나를 나눠 먹었다. 아이가 먹기 싫다고 했는지 껍질을 벗겨서 내밀었던 여자는 손을 거두고 반대편 팔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럴수록 아이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는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까부터 낯설게 생긴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래경과 해원을 번갈아 보며 수줍게 웃음 지었다. 아이가 결국 여자 품에서 벗어나 배 가장자리까지 뛰어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깜짝 놀란 부부가 동시에 아이의 팔과 어깨를 잡아 당겼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아이의 충동적인 행동에 긴장해서 몸을 들썩였다. 밤이 깊어 까맣게 보이는 바닷물은 아무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앞으로, 뒤로 출렁이고 있었다.
"저 아이, 방금 전에 얼마나 아찔했었는지 당연히 모르겠지?"
해원이 래경에게 조용히 물었다. 래경은 배에 오르고 난 후부터 하루 종일, 어쩌면 그동안 계속 미뤄왔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먼저 기분이 좀 어떤지 물어야할까. 어색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그럼 자신의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볼까. 가령 얼마 전에 차를 팔아서 뭘 했는지. 하지만 해원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놀라지도 않을 것 같고 괜히 걱정만 하게 만들 것 같았다. 래경은 아이를 가져보지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겉도는 일일 수 있는지 짐작해봤다. 그렇다고 돌려 말하거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래경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앉아있는 게 우스웠는지 해원이 조그맣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게 발단 부분, 적어도 전개 부분에선 나와야...!!!)
"저기, 네 뒤로 아까 그 다리. 조명까지 켜져 더 멋있다."
래경이 등을 돌려서 보자, 길고 커다란 다리에 정말 여러 가지 색깔의 불빛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있잖아. 윤필이 기억력은 대단해. 머릿속에서 이렇게 계속 사진을 찍고 있는 것 같아. 길을 알려줄 때도 큰 사거리에서 왼쪽, 이러는 게 아니라 사거리마다 어떤 상점이 있는 지랑 내가 가야할 곳은 그중에 초록색 간판으로 된 약국,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래경도 그 길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없는 거지. 가끔 누가 먼저 아는 척 하며 인사만 해와도 당황스러워 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바다를 둘러싼 곳들을 하나하나 사진 찍었다(?). 캄캄한 가운데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낮은 건물과 불 켜진 레스토랑, 바다 쪽으로 정원을 만들어 놓은 호텔, 가로수 사이로 곧게 뻗은 도로.
"태어났을 때부터 봐왔던 사람이나 사진 같은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기억하려는 의지를 자꾸만 꺾어. 그 기억을 나눌 수도, 고칠 수도 없으니까."(?)
배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둘이 배에 올라탄 지 두 시간 가까이 지난 후였다. 같이 바닷바람에 한 번씩 시달린 탓인지 말 한 번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멀리 항해라도 떠났다 무사히 돌아온 것처럼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 명씩 배에서 내릴 때는 앞 사람이 땅에 발을 디딜 때까지 뒤에서 차분히 기다리며 조금씩 비어가는 배와 그 너머를 아쉽게 바라봤다. 래경도, 해원도.
#7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깼는지, 잠이 깰 무렵 창 밖에서 나는 소리가 좀 더 세졌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레 비 내리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래경은 눈만 뜬 채로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혀 뒤편 침대에서 해원이 아직 잠들어 있는지 확인한다. 이대로 빗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면 자신도 곧 다시 잠에 빠져들 것 같아 조금 고민하다 몸을 일으켜봤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생각나진 않았다. 래경은 문득 엄마 집에 맡기고 온 하나를 떠올렸다. 하나는 군데군데 노란 털이 있는 하얀색 말티즈 종이 섞인 강아지인데 좀체 꼬리를 흔들지 않는(았)다. 발바닥 색깔이 이제 막 갈색으로 변하면서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어렸고 작아서 며칠간이긴 해도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조심스러웠지만 걱정과는 달리 금방 적응했다. 손을 흔들고 잘 있으라며 딴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인사를 했는데도 끝까지 쫓아 나오지 않고 방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현관문을 나설 때면 조그맣게 내던 특유의 얇고 칭얼대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래경은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오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했던 것과 달리 창문을 닫아두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의 빗소리만 났다. 허리를 조금씩 굽혀가며 건너편 건물을 천천히 살폈다. 1층 식료품 가게 앞에 제법 큰 개가 그대로 비를 맞으며 엎드려 있었다. 빗방울이 꽤 굵은 편이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걱정됐는데 혹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싶어 제대로 보려고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개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식료품 가게 주인이 나와 차양 아래 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제는 어색하게 미소만 짓고 말았는데 오늘은 친근한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같이 손을 들었다 내렸다(?). “열한시쯤 그친대요. 걱정 말아요.” 남자가 싹싹하고 큰 목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입술은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털을 말끔히 밀고 난 후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위장하듯 덥수룩하게 수염이 나 있었다. 광대뼈 아래까지 수염이 있어 큰 눈이 더 깊고 도드라져 보였다. 좀처럼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풍성하고 곱슬거리는 털 때문에 얼마쯤 나이를 손해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마침 뒤에서 해원이 몇 시야, 하고 조그맣게 물으며 몸을 뒤척였고 래경은 열한 시 되려면 세 시간은 남았어(?), 하고 엉뚱하게 들릴 만한 말로 대답했다. 빗소리가 듣기 좋아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1
래경과 혜원의
여행담이다. 혜원은 아마도 아이를 유산하고
여행할 만큼 친하지는 않아서 약간은 불편한 관계의 혜원과
여행을 떠난다.
2
이러한 설정이라면
혜원이 중심화자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래경이 중심화자로 읽히고, 그러나 래경과 혜원이 헷갈릴 만큼 비슷하다.
둘 사이에
있어야 할 갈등이
너무 희미하게 그려져서
두 인물이 변별되지가 않는다.
둘 사이뿐만 아니라,
둘이 여행하면서 낯선 이방 세계에 대해
특별한 갈등을 하지 않고 않아서, 갈등으로 빚어지는 스토리라인이
살아나지가 않는다.
3
일단 문장을 보자.
파란 문장 같은 잘 읽히는 부분들이 있다.
가령 다음 #2단락장을 보자.
일단
파란문장부분은 잘 읽힌다.
그런데 이들 문장이 정영문 문장과 너무 닮았다.
#2
좁은 골목 안에서 둘을 따라 오는 것은 트렁크 바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박힌 길에 고양이와 개가 마치 무늬처럼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다 둘을 보곤 몸을 움직였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접어들 때마다 한 번은 고양이, 다음엔 개가 뒤에서 속도를 맞춰 따라오거나 안내하듯 둘을 앞섰는데 골목 끝에 가서는, 여기서부터는 다른 애가 알려 줄 거야, 라고 신호를 주듯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정해놓은 영역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눈으로 보기엔 지나온 곳과 가고 있는 길을 잘 구별하기 힘든 골목(?)이 계속 이어졌다. 둘 외엔 오고 가는 사람도 없어서 누구라도 만나면 눈에 익은 길에 들어선 것처럼 반가울 것도 같았지만, 막상 낯선 누군가 나타나면 서로 놀랄 것 같은, 햇빛도 비껴갈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얼마쯤 가다보니 개나 고양이가 더는 보이지 않았고 앞서간 사람들이 양쪽 벽을 옆으로 힘껏 밀어놓은 것처럼 길이 넓어지고 상점과 사람들이 나타났다.
"봤어? 여기 애들은 누가 기르는 것도 아닐 텐데 꼭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겼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말을 붙였는데 해원은 다닥다닥 연달아 있는 건물과 지붕을 살피느라 래경과 보폭도 맞추지 않고 몇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비나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 외엔 알려주는 것 없이 무심한 푸른색(?)이었다. 둘은 같은 길에 있었지만 다르게(?)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에서는 기념품으로 사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는 큐빅이 잔뜩 박힌 조명과 거울, 요란한 카펫이 진열되어 있었다. 래경은 숨이 조금 가빠 왔지만 해원의 걸음에 맞췄고(?), 둘이서 나란히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상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뜸 자기 이름을 말하고 이름이 뭐냐고 묻는 싹싹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입고 있는 옷을 칭찬하면서 어울릴만한 스카프가 있다며 들어와서 보라는 적극적인 중년의 여자도 있었다. 둘은 언뜻 보기에도 장사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단 하나뿐인 것>정도로 이름 붙이면 딱 어울릴만한 분위기의 가게(?)인데 낯선 언어로 된 소박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얼핏 봐도 세상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만한 물건들(?)이 벽에 걸려 있거나 이리저리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쉽게 이곳을 떠날 것 같지 않은, 누구의 관심도 끌 것 같지 않은 장신구들뿐이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도 딱히 팔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는데 누가 지나가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인가 또 열심히 만드는 중이었다. 아마 그것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 될 것 같았는데 남자는 어쩌면 자신이 모으거나 갖고 싶은 것만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해원이 조금 더 관심을 보이며 이끌리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중하고 있던 남자를 방해한 것(이미 방해 아닌가?)은 래경이었다.
골목 분위기 묘사 부분과 더불어,
가게 묘사가 재밌지만, 정영문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감아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골목 분위기나 가게 묘사나 모두
정영문이 바라본 풍경처럼 별로 주목할 만하지 않은 채로 하릴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정밀 묘사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사실
더 좋은 표현은,
진한 파란 문장 부분과 같이
공감이 잘 가는 심리 묘사 부분이다.
"봤어? 여기 애들은 누가 기르는 것도 아닐 텐데 꼭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생겼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말을 붙였는데 해원은 다닥다닥 연달아 있는 건물과 지붕을 살피느라 래경과 보폭도 맞추지 않고 몇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 집 주소도 제대로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래경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의무감에 어디 살만한 게 없나 하는 시선으로 둘러보는 해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가게에 들르기 전과는 딴판인 세상이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곳이었는데 거리는 조금 전과 다름없었고
반대로
노랑 형광펜 부분들
즉 물음표 밑줄을 단 문장들은
무얼 뜻하는 거지? 하고 의아한 기분이 들 만큼
잘 이해나 공감이 가지
않는다.
3
이렇게
갈등 없이 감아치는 서술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면서 여행담으로서의 낯선 세계도
두 인물도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가령
주인 여자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가 않고...
#4
며칠 간 지내게 된(그) 집은 손님을 맞으려고 정돈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 흔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했다. 주인 여자는 키를 건네고, 간단히 주의사항을 말한 뒤에 집에서 가까운 볼거리에 대해 손짓을 곁들여가며 유난할 정도로 길게 설명했다. 금이 간 벽을 가리려고 그 앞에 화분을 놓듯이. 가까운 곳에 큰 시장이 있고, 아주 오래된 성당이 있으며, 산책이나 운동 삼아 걸어가면 바다가 금방이라고 했다. 그건 꼭 그렇지 않다는 걸 둘은 이미 알았지만. 그러고선 자기는 그만 돌아가 봐야겠다고 했다. 여자의 집은 다른 거리에 있었다. 집을 아예 떠넘기기라도 한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조용히 지내기에 좋을 거라고 덧붙였는데 비어 있는 게 옆집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둘은 여자의 말이 되도록 밖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말처럼 들렸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마음이 맞았다고, 서로 위로의 말을 대신할 때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 -주인여자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침실에 가려면 간단한 음식을 할 수 있는 간이 부엌을 거쳐야만 했다. 방은 세로의 길이를 떼어다 양옆으로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로가 한참 긴(?), T자 모양이었다. 래경은 침대 두개가 기차처럼 이어져 있어서 몇 시간 뒤 정수리와 정수리를 맞대고 자게 될 둘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져 웃음이 났다(?). 그러고 나선 서로 불평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처럼 애써(?) 침묵했다. 각자의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으니 침대 앞쪽의 공간이 꽉 차 버려 얼핏 보기에 짐만 보관하는 창고 같기도 했다.(?)
시장 골목도
제대로 살아나지가 않고..
결국 주인 여자가 말한 대로 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크다는 시장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커 도시 전체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좌판마다 몇 명씩 모여 길을 막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걷고서 부터는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보다 같은 곳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으로 빠져나갈까 망설이다가도 처음 보는 물건이 나오면 어쩔 줄 모르고 정신을 뺏겼다. 이곳에선 물건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까지 팔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헤매다 길고 북적한 시장을 빠져 나오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시장 묘사가 초점이 없어 아쉽다) 그 앞에 각각 바다와 배 모양, 그리고 성당 그림이 그려진 푯말이 있었다.
"여기는 비슷하면서 자세히 보면 다른 게 참 많은 것 같아." (?)
혜원이 집착하는
처음 떠오르는 기억의 상징성도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없는 거지. 가끔 누가 먼저 아는 척 하며 인사만 해와도 당황스러워 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바다를 둘러싼 곳들을 하나하나 사진 찍었다(?). 캄캄한 가운데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낮은 건물과 불 켜진 레스토랑, 바다 쪽으로 정원을 만들어 놓은 호텔, 가로수 사이로 곧게 뻗은 도로.
"태어났을 때부터 봐왔던 사람이나 사진 같은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기억하려는 의지를 자꾸만 꺾어. 그 기억을 나눌 수도, 고칠 수도 없으니까."(?)
그나마
가장 인물 심리가 깊이 드러나는 대목은
다음 대목인데, 이러한 심리가 이미 발단 부분에 적어도 전개 부분에
배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원이 래경에게 조용히 물었다. 래경은 배에 오르고 난 후부터 하루 종일, 어쩌면 그동안 계속 미뤄왔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먼저 기분이 좀 어떤지 물어야할까. 어색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그럼 자신의 얘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볼까. 가령 얼마 전에 차를 팔아서 뭘 했는지. 하지만 해원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놀라지도 않을 것 같고 괜히 걱정만 하게 만들 것 같았다. 래경은 아이를 가져보지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겉도는 일일 수 있는지 짐작해봤다. 그렇다고 돌려 말하거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래경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앉아있는 게 우스웠는지 해원이 조그맣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게 발단 부분, 적어도 전개 부분에선 나와야...!!!)
결국
마지막에
빗소리를 접하는 래경 모습에
별다른 공감이 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갈등, 문제의식, 화두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물론 정영문 소설처럼 비-서사의 소설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그때는 그만한 사유력과 유희 정신이 있어야 한다.
또 설령
비-서사의 소설일지라도
갈등-문제의식-화두가 없는 소설이 있을까?
다만 그 표현방법이 다를 뿐...
4
갈등,
문제의식 혹은 화두...
이것을 통해 화자 및 주인공 되기가 가능하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문제제기를 찾아야 한다는 건
정말 재밌는 과제 같다.
왜냐하면 보통 문제는 가리거나 숨기거나 도망치는 대상이니까..
그런데 살아보면 큰 문제가 자신을 작은 문제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래서
대중과 달리
작가는 예술가는 무당은
문제를, 지금 자기가 갖고 있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