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란 providence라는 말로 라틴어의 'pro'(미리) + 'videre'(보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자어에서 섭리란 攝(다스릴 섭) + 理(이치, 다스릴 리)다. 기독교에서는 이 섭리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심'이란 말이다.
섭리란 단어는 곧 pro(앞으로) + videre(보다)이다. 이 뜻을 '앞을 보다' '내다 보다'라는 뜻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 단어의 뜻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다. 지탱해 주다 또는 지지하다의 뜻이다. 섭리라는 명사는 목적에 맞게 공급하는 행위, 또는 세계를 지탱하고 다스리는 행위를 뜻한다.
영어 관용구에 I' ll see to it.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 뜻은 '내가 조치할게' 라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확실히 할게'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섭리란 그 분이 사태가 어떤 방식으로 벌어지도록 조치하겠다는 뜻이다. (존파이퍼)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모리아산에 올라가기 전에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보여주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공급하시리라)라고 불렀다. 존 파이퍼 목사는 창세기 22장에 '공급하다'란 단어가 히브리 단어인 '보다'로 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그런즉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하나님이 스스로 어린양을 보실 것이다"(창22:8)로 말한 것이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심'이 왜 그의 공급하심(섭리)를 가르키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그저 수동적 방관자로서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과 관찰자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세계의 수동적 관찰자가 아니고 미래에 대한 수동적 예언자도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어디나 그 분은 행동하신다. 그 분의 '보신다'는 뜻은 '주관하신다'라는 뜻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질문27.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답변: 하나님의 전능하신, 모든 곳에 현존하는 능력이 만물을 그분의 손으로 만드셨으니, 그 분이 여전히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늘과 땅을 붙들고 계시고 식용식물과 풀, 비와 가뭄, 풍성한 해와 메마른 해, 고기와 음료, 건강과 질병, 부유함과 가난함 등 진정 우연이 아닌 아버지의 손에 의해 생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
벨직 신앙고백(1561)
제13항 하나님의 섭리와 교리
이 선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우연이나 행운에 맡기지 않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다스리시되 하나님의 질서정연한 배열이 없이는 이 세계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648)
질문18. 섭리의 행위란 무엇인가?
답변. 하나님의 섭리 행위는 그의 모든 피조물을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강력하게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 그 분의 영광을 위해 만물과 만물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모든 피조물"의 존재를 "보존하고" 또 붙들 뿐만 아니라 "만물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보존행위와 지시의 목적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섭리'라고 부르는 합목적적 주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6)
제5장 섭리에 관하여
5.1. 만물의 위대하신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받기 위해, 그의 무오한 예지와 자유롭고 변함없는 그 자신의 뜻의 방침에 따라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해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과 행동과 사물을 붙드시고 지도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
섭리와 운명의 차이란 무엇인가?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운명과 섭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섭리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이든 목적이 없이는 정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큰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운명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운명은 단지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반면에 섭리는 하나님이 바퀴들을 움직이시므로 그것들이 거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어떤 것이 고장나면 하나님이 그것을 바로잡으십니다. 그리고 만일 잘못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 분이 손을 대어 그것을 고치십니다. 이는 동일한 것에 관한 얘기지만 목적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운명과 섭리간의 차이점은 눈이 좋은 사람과 맹인 사이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운명은 눈이 멀었습니다. 그것은 아래쪽 마을로 돌진해서 수천명을 죽이는 눈 사태입니다. 하지만 섭리는 눈사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산비탈에 흘러내리는 실개천 같다가 작은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 영원한 사랑의 넓은 바다로 굽이치며 흘러가는 강, 인류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그런 강입니다. 섭리의 교리는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유익을 위해, 특히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의 유익을 위해 다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바퀴들은 눈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눈 먼 바퀴들이 아닙니다.』스펄전
이 섭리 신앙은 모든 성도들에게 두려움에서 용기를, 슬픔에서 위로를, 파멸에서 소망을 제공한다. 폴 틸리히는 현대에 들어 섭리의 의미가 '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희망적인 생각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차례의 큰 세계 전쟁을 치루면서 인류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한 섭리 신앙에 의심과 회의를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인류에 이런 참혹한 전쟁과 고통의 상황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실까? 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특히 그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의 발흥국이면서도, 20세기 세계 대전의 가해자가 된 독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대 사람들은 섭리라는 용어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운명이나 과학을 믿는다. 과학 우월적 세계관의 현대에서는 창조주 신앙과 관련이 있는 섭리라는 말은 거부한다. 또한 그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증명할 방법도 없다.
사람들은 섭리보다 이젠 희망을 꿈꾸고 노래한다. 그들은 지식과 교육, 과학의 번영을 통한 더 나은 유토피아를 꿈꾼다. 종속적 운명론도 거부하지만 원대한 신적 계획의 섭리 또한 거부한다. 대신 스스로를 믿기로 결정했으며, 그에 따른 노력과 결과, 그로 성취될 현재와 미래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이 부여하는 희망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 즉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 일으키긴 하지만, 현실 삶에 있어서는 절대 공허하며 모호하며 상당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과 위험에 직면하여 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바울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라고 말하며 삶의 현장을 묘사했다.
『섭리 신앙은 확실히 그것의 결국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미리 세워진 계획-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자연이라고 부르던, 혹은 운명이라고 부르던-을 따라 진행되는 믿음이 아니다.
섭리 신앙은 신앙의 총체이다. 그것은 운명을 내모는 힘이다. 또 그것은 매일의 실존의 불안정성에서, 실존의 재앙과 의미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일반에 대해서 "예"라고 말하는 용기다.
섭리란 삶 이상의 것의 능력을 힘입어 삶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말하는 천사적인 동시에 악마적인 사랑의 특성을 초월한다. 이 사랑은 궁극적인 결합의 능력, 즉 분리에 대한 궁극적 승리다. 이 사랑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서 삶을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중의 얼굴을 지닌 삶의 지배자들, 그들이 제공하는 매혹과 근심, 또 그들이 제공하는 영광과 두려움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아무것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완성에 이르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안에서 극복되는 무언가의 능력을 힙입어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우리는 피조물이 아닌 분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도 그 분의 창조적인 기반을 피괴할 수 없는 분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파괴할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삶의 의미를 파괴할 수는 없다. 즉 우리는 설령 내일이 역사와 우주 전체가 망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가 그것의 일부를 이루는 자연에서든 역사에서든 우리의 삶이 갖고 있는 의미를 파괴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이런 궁극적인 용기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결합을 유지하려는 용기는 생명과 죽음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까지 맞선 싸운다. 하지만 죄책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키면 넘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마주하지 못한다. 왜냐면 죽음의 독침(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은 죄이기 때문이다. 죄책이 삶을 비극적인 자기파괴 속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당신의 죄의식조차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용납될 만하지 못하다는 사람까지도 용납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은 이 의미다. 그 분은 마음의 승리자다. 우리에게 있는 마음, 자기에 대한 정죄, 자신에 대한 절망조차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분과의 궁극적인 결합에서 그리고 삶을 용납하기 위한 용기의 근원이자 근거에서부터 끊어낼 수 없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폴 틸리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