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몬/손중하
블러그: 시몬의 뜰(blog.daum.net/simon-farm)
나를 묶어 놓았던 도시를 빠져나와 곡식이 영그는 땅에 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앞으로는 땅과 풀이 나를 먹여 살리리라.
벌판의 바람이 나를 보호하리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며
오직 사랑만을 키워가리라.
신에게 감사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도시에서 지쳤던 몸도 쉬게하리라.
그러면서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리라.
게으름 피지 않으리라
해가뜨면 허리 굽으려 땅을 파고 일구어 씨를 뿌리리라.
왕이라 해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으리라
옹달샘
태산을 품고도
넘쳐나지 않고
품은 거목 흔들리는데
물결치치않네
달빛
그 안에 들었는데
대지가 밝구나
나 또한
그 안에 들었는데
물 흐려질까 두렵다.
농장에는 모두가 꽃이다
사람의 꽃 ,자연의 꽃, 동물의 꽃
모두가 푸른 그리움 무릎에 누이고
농장에 바람 한줄기 불러
지친 가슴있다면 쓸어주고 싶다.
(농장의 잠자는 돌을 깨워 일으켜 세웠더니 그는 내 안에서 기도가 되었다)
(농장에서)
온동(溫洞)마을 가족이 되다.
따뜻한 동네 온동마을을 찾아주시어 감사합니다.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은 사소한 일로 마음이 변하여 왔다 갔다 하는 분 보다는 마음에 중심을 잡고 항상 우거지처럼 처음 그 맛을 유지하는 그런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내도 옆에 함께 있음에 시간이 빨리가는 그래서 자주 찾고 싶은 따뜻한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삶을 이루소서.
내가 있어 세상이 즐거운 그런 사람이 되소서. 오늘도 온동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온동촌장 김기태 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초대인가.
온동마을 촌장이신 김기태님의 인사말처럼 이곳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내가 이 온동 마을 사람들과 인연이 된 것은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시웅교수의 배려 때문이었다.
2005년 12월 17일(토요일) 그 날도 눈이 많이 내렸다. 이 날에 장항에서 열리는 계간 문예마을행사에 나를 초대 해 준 것이다.
대전 중구청에서 출발한 이 교수의 에쿠스 승용차에는 이 교수를 비롯하여 대금연주가이신 김주태 선생님과 행위예술가이신 유환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동승하였다.
호남고속도로에는 전날에 내렸던 눈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이교수의 능숙한 운전 솜씨는 불안해하는 우리 일행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주기는 했다.
그러나 운전 중 끊임없는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들을 초초하게 만들었다.
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군산쪽 산업도로로 달릴 때에는 눈발이 더욱 두터워지고 끝내 폭설로 바뀌면서 여기저기서 사고 차량들이 늘어나기 시작 했다. 약속시간보다 늦어지자 이 교수의 핸드폰에는 끊임없이 진동음이 울려왔다. 운전 조심하라는 이야기부터 보고 싶었다는 정겨운 이야기까지 이 교수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그들의 정의 두께를 짐작 할 수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각보다 세네시간 늦게 행사장에 도착하니 눈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며 낯선 얼굴인데도 반갑게 맞이해 주어서 차가운 날씨에 시린 몸에도 그들의 따뜻한 정으로 추위조차도 잊을 수 있었다.
행사장에는 나은 김우영 자가님을 비롯하여 전국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 시낭송가 그 외의 많은 분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마음씨가 고운분들이였는지 전혀 처음 만나는 느낌이 아니었다.
초대되어 간 것도 아니고 친구 따라 간 손님에게 시상대에 올라가 부분별로 주는 상에 수여자로 안내 해주시는 그 분들의 배려는 온동마을 사람들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식의 일부에는 행위예술가이신 유환 선생님의 포퍼먼스가 있었는데 작품의 내용이 인간이 인간스스로 만들어 낸 속박에서 탈출하려는 고뇌를 담은 것이 아닌가하는 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 보기도 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얽힌 사슬을 풀어주며 살라는 작가의 메시지인지도 몰라서 스스로를 뒤돌아보게도 하였다.
대금연주자 김주태님의 대금연주는 행사장의 뜨거운 열기를 조용히 가라앉혀주는 청심제 같았는데 지금도 가끔은 내 심장의 고동소리에서 그때 그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행사의 일부를 마치고 2차에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강하구뚝에 자리한 이 찻집에서 멋진 시 낭송을 들으며 차를 마시는데 찻집의 창밖을 통해서 보이는 처마 밑에 매 달린 수정 같은 고드름과 별이 초롱초롱 뜬 하늘을 품은 강물을 보면서 마담이 특별히 빚어내어 만들었다는 생강차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마담이 읊은 시 한 구절이 감동적이었는데 건망증이 심한 탓에 시귀를 잊어버려 언젠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귀를 찾으려 그 하구 둑을 다시 찾으려 한다.
밤 깊은 줄 모르고 여관방에 모여든 우리 일행은 일배 일 배 또 일 배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입담 없는 내 이야기도 껄껄 웃으며 어찌나 재미있게 들어주는지 그 날 내 속내를 다 들여다보이고 말았다.
바로 이분들이 온동마을의 식구들이다. 그 식구들이 한 식구가 되어 달라고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대한민국의 우표를 붙이어 초대를 해 준 것이다.
송홧가루 날리는 춘사월 호시절 따스한 만남의 날 알림
2006년에도 따뜻한 마을 사람들과 만남을 주제로 소중한 인연을 실타래처럼 이어 갑니다.
이 지구상의 최고와 최상만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가의 우리 가족 따뜻한 마을 사람들이 송홧가루 날리는 춘사월 호시절 만남의 날을 아래와 같이 마련하고 초청하오니 함께 하시어 흐뭇함을 같이 하기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온동마을의 한 가족이 되었으며 머지않아 이 온동의 마을의 훈훈함이 지구의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 해 본다.
아련한 鄕愁 보습 오르가즘
시몬/손중하
“이랴, 이랴!”
“워! 워-어!”
소 몰아 밭갈이하던 농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1970년대 만해도 소나 말에 쟁기나 극쟁이를 매달아 논밭을 갈았는데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요즘은 경운기나 트랙터 또는 관리기에 보습을 달아 밭을 일구고 밭고랑과 이랑을 만든다. 그래서인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끔은 옛날의 밭갈이 하던 모습이 아련한 향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쟁기나 극쟁이는 그 구조가 보습을 끼우는 술과 성애, 한마루, 자부지, 멍에로 이루어져 있다. 술은 윗부분은 손잡이로 아래 끝부분은 보습을 끼우는 것이며 성애는 소의 목덜미에 얹어주는 ㅅ자 모양의 멍에와 끈으로 연결 해 주는 부분이고, 한마루는 술과 성애를 삼각구도로 연결하는 부분이며, 자부지는 술 윗부분에 구멍을 내어 60센티 정도의 막대를 가로로 끼워 소를 몰 때 손잡이로 사용하는 부분을 말한다.
극쟁이는 술에 끼우는 보습 모양이 밋밋한 삽과 비슷하지만, 쟁기는 술에 끼우는 보습모양이 버들잎을 옆으로 약간의 나선형 모형으로 되어 있어 논을 갈면 자연스레 흙이 한쪽으로 엎어지게 되어 있다. 특히 쟁기의 보습은 중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논을 가는 사람의 의중에 따라 흙더미가 엎어 지지도록 만든 것도 있었다.
대부분 쟁기는 논이나 질 좋은 밭을 가는데 사용하였고 산골 밭은 주로 극쟁이를 이용하였다. 쟁기나 극쟁이는 소나 말을 길들여 앞에서 끌게 하고 사람은 뒤에서 조정하여 논밭을 갈았는데 가축이 없는 집에서는 사람이 끌기도 하였다.
내가 처음 극쟁이를 접한 것은 중학교 다닐 때이다. 보리타작 시기가 다가오면 보리를 베어내고 보리 골에다 콩을 심었다. 시간이 지나 콩밭의 풀이 콩과 함께 자라면 이랑과 이랑 사이를 극쟁이로 갈아 풀도 메고 콩 포기에 붓을 주기도 하였다. 대부분은 소를 이용하였으나 당시 우리 집에는 소가 없었다. 내가 소 역할을 하고 아버지는 극쟁이를 조정하셨다. 극쟁이를 앞에서 소처럼 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더구나 힘을 쓸 나이도 아니고, 결국 몇 골 갈지 못하고 지쳐서 더 이상 갈 수 없음을 아버지도 느끼셨는지 내가 극쟁이를 조정하게 하고 아버지가 소처럼 앞에서 극쟁이를 끌어 당기셨다.
“이랴!”
얼떨결에 아버지는 소가 되셨다. 그러데 얼마쯤 가다가 극쟁이가 멈추어 섰다.
“이랴!”
재차 소리를 질렀다. 분명 아버지는 줄을 끌어당기며 힘을 쓰시고 계셨는데 극쟁이는 꿈적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극쟁이를 살짝 들어야지 이 멍충아!”
아버지가 힘이 드셨는지 버럭 화를 내셨다. 그도 그럴 것이 보습이 나무뿌리에 걸린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아무리 장정일지라도 그 뿌리를 끊어내고 앞으로 당길 장사는 없었다. 내가 살던 곳은 충남 금산군의 진산이다. 지역 이름만 산이란 글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가 시골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산골마을의 밭은 돌과 대추나무나 감나무뿌리들이 뒤엉켜 밭 갈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극쟁이를 쓸 때에도 돌이나 나무뿌리에 보습이 걸리면 손잡이로 술을 들어 보습이 걸리지 않도록 손에 감각을 익혀야 하는데 어린 나이에 처음 접한 극쟁이이니 그 감각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 후 몇 년이 지나 우리 집에도 밭갈이하는 소를 기르게 되었다. 이제는 소를 모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극쟁이에 일구어진 흙더미가 콩 포기를 덮을 경우 콩 포기를 흙에서 빼내주는 일을 하였다.
“이랴!”
“워!”
“저 저저-!”
소는 잘 길들여져서 주인이든 이웃집 아저씨든 이 말만은 잘도 알아들었다.
콩밭을 가시다가 아버지가 잠시 비운 사이 나는 극쟁이로 소를 몰기 시작하였다
“이랴!”
자부지(손잡이)가 키에 맞지 않아 조금은 버거웠지만 소가 천천히 내 심중을 아는 듯 콩포기도 밟지 않고 아주 천천히 잘도 가 주었다. 얼마쯤 가다가 소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금,
“이랴!”
고삐를 내리치니 소가 힘을 주는 듯하다. 이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재촉해도 출발할 자세가 아니다.
‘어허, 요것 봐라. 어리다고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구나.’
슬쩍 부아가 치밀어 소고삐를 힘껏 내리쳤다.
소가 힘을 쏟는가 했더니 이내 보습을 끼운 술 끝이 부러지고 말았다. 밭가에 심어 놓은 대추나무 뿌리에 보습이 걸린 줄도 모르고 소만 내몰아쳤으니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하신 ‘워’와 ‘이랴’는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소가 힘을 어떻게 쓰는지 보습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습이 작은 돌에 걸렸는지, 큰 돌에 걸렸는지, 아니면 나무뿌리에 걸렸는지를 알고 돌이나 나무뿌리가 모습에 걸린 듯 하면 바로 술을 들어주어 보습이 돌이나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도록 소를 몰기 위함이었다. 같은 논밭을 갈면서도 숙련된 농부는 보습 끝에 전해지는 느낌으로 소나 말을 힘들지 않게 부렸고, 일에 서툰 농부는 쟁기나 극쟁이를 부러뜨리거나 동물을 힘들게 몰았다. 그래서 서툰 농부에게는 소나 극쟁이나 쟁기를 잘 빌려주지도 않았던 게다.
그 후 내가 소를 몰아 밭갈이를 한 것은 군을 제대한 그 해 봄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 술을 부러트린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들려 주셨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농부는 나를 알고, 땅을 알고, 일기를 보며, 나와 동행하는 자를 아는 사람이다.”
‘나와 동행하는 자’. 그가 누구일까? 농사를 지으면서 동행하는 자. 그 때 아버지 말씀으로는 소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으며 보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지금도 아버지의 의중을 다 파악하기엔 지혜가 모자란다. 하지만 군을 제대하고 소를 몰아 밭갈이 할 때 보습을 통하여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대어를 낚았을 때 느껴지는 그 손맛 때문에 낚시를 즐긴다고 한다. 내가 밭갈이를 하는 것은 낚시를 하는 사람들처럼 보습을 통하여 느껴지는 손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습 끝으로 크고 작은 돌들이나 나무뿌리에 걸렸을 때 소가 힘들지 않게 술을 약간 들어주어 돌이나 나무뿌리에 걸리지 않고, 돌이나 나무뿌리의 등을 타고 보습이 넘어가는 순간의 오르가슴(organism)을 농부가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전율이다.
땅은 피워내는 꽃으로 말을 한다.
땅은 맺어 놓은 열매로 말을 한다.
쟁기나 극쟁이를 이용하던 옛 농부는 이미 땅이 꽃을 피우기 전이나 열매를 맺기 전, 부어도 부어도 주는 사랑이 모자랄까봐 애타하는 땅의 심중을 소가 짊어진 멍에와 보습 끝으로 읽어 냈지만 지금은 트랙터에 매단 보습만으로 땅을 읽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 소를 몰아 보습 끝으로 느껴지는 땅의 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이제는 땅의 기운을 호미 끝으로 느낄 줄 아는 농부가 되려 한다. 새벽 동틀 무렵 김을 매며 호미 끝으로 느껴지는 짜릿함의 오르가슴을 나는 안다.
오늘도 작은 동산의 농장에서 호미 끝으로 보습을 대신하여 땅을 읽고, 땅의 전율을 느끼고 사랑하며, 흙속의 작은 생명을 키워낸다. 크고 강한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나의 모든 것은 작게 하되, 오직 온화함과 사랑만은 크게 하여 ‘나와 동행하는 자’의 힘을 절반에 절반으로 줄여 주고자 하는 마음. 그 옛날 보습에서 손끝으로, 손끝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전신으로 읽어냈던 땅의 기운. 이제 호미 끝으로 그를 읽으며 살아가려 한다.
첫댓글 좋습니다 시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