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민주화 그리고 연암의 화두를 빌어
- 임타래, 이영, 이석구 시인의 신간 시집에 부쳐
강병철(소설가)
대면하지 못한 글지들의 문맥을 더듬다가 문청의 감성을 두근두근 누르는 중이다. 농익은 연륜에 풋내 서린 문장의 합종 그리고 한 땀 한 땀마다 고목의 살을 찢는 새순처럼 봄물이 쑥쑥 오르는 것이다. 임타래의 『돼지밥 바라기별』, 이영의 『어쩌겠어, 지금』 그리고 이석구 시인의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까지 세 권의 시집에 대한 촌평을 들이대는 마음이 참으로 민망한 이유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세상, 그 엄혹한 시국을 비집고 그들이 세운 문장의 촉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 모두 늦깎이 문사들인 만큼 다져온 시간의 이력을 가늠할 수 없어서 더 궁금하다. 부랴부랴 스캔부터 한 다음 메스를 들고 행간을 조근조근 나누다보니 낱낱의 문장의 신산한 내공들이 날줄씨줄로 엮여진다. 문득 아리고 시리다. 모두들 문단정치나 마케팅을 멀리한 채 묵묵히 원고지만 채웠으리라. 청탁이 오지도 않고 먼저 청하지도 않다가, 한밤중에 목이 말라 잠에서 벌떡 깨어 원고지 채우고 자판기를 두들겼으리라. 하염없이 쓰고 마셨으리라.
착한 눈, 순한 귀를 지닌
-임타래 시집 『돼지밥 바라기별』
그의 첫 출산을 펼치며 긴장의 순간들을 되새김질한다. 바람 부는 뚝방에 엎드려 올라오던 잡초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던 시인의 공간이다. 그리고 궁금하다. 그는 왜 돼지우리의 가축들이 꿀꿀거릴 때 세상에 태어나서 하필 ‘돼지바라기별’이 되었을까? 갸웃거릴 찰나 어머니가 등장하니 옷깃을 여밀 수밖에.
오늘 텃밭에 쑥갓은 쑥쑥 자라고
한쪽에 곱게 피어난 샛노란 꽃
어머니 쓰신 호미 하나 걸려있고
쑥갓 커가듯 그리움이 자란다
「쑥갓꽃 1」
미수(米壽) 직전에 아파트에 모셨다가 길을 잃어 관리사무소를 통해 찾으신 그 노모가 아직도 붙박이로 남는다. 기름진 들판과 흐르는 강물에 하염없이 몸담으셨던 그 이력의 삶이다. 봄비 내리면 생강을 심고 짚을 덮던 젊은 아낙네 표정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아랫목 이불 뒤집어쓴 채 온기 채우던 그 밥식기도 뙤똑 떠오른다. 채우면서 기다리고 비워서 배부르던 노모는 지금 은하수 아파트 납골당 로얄층에 자리잡고 계시다.
그의 태생적 체질일까? 사유의 공간마다 흘러간 필름을 재생시키는 생생함과 일체한다. 산수유 가지에 매달린 별 무리 지고오던 그 봄밤이 확실하다. 수십 년 전 어느 날 복학생의 심장박동 울렁이던 별다방 그미의 가느다란 손길도 둥두렷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춘기 첫사랑 소녀의 딸 결혼식장에서 예전에 그 소녀가 다시 나타나 아주 잠깐 상큼하게 회춘하기도 한다. 그렇게 초가집 섬돌 위로 덩그러한 눈빛의 여인들이 기습적으로 가슴을 두들기니, 아, 지나간 사연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부동산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많다네
땅 아파트보다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저장 공간이 돈이란 걸 아직 모르나 보네
- 「진짜 부자」 부분
시래기 묶어 시렁에 걸고 항아리 김칫독 채우는 포만감으로도 그는 여전히 행복하다. 찬바람이 불기 전에 마루 밑에 쌓아놓는 장작토막의 따뜻함으로 쳐다만 봐도 훗훗한 것이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그렇게 울타리 공동체끼리 김치 수제비 한 그릇씩 돌리고 싶은 것이다. 깨끗이 빤 속옷을 입을 때의 뽀송뽀송함으로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지금은 낯선 곳으로 떠날 차표를 끊어놓고 국수집 목로에 웅크려있으니, 천상 시인이다.
디테일 그리고 뜨거운 하모니
-이영 시집 『어쩌겠어, 지금』
소도시 여성백일장에 무심히 발을 딛었다가 덜컥 몸이 묶였으니 그의 몸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결박되었다. 행을 더듬고 자르다가 거울 앞에 서면 아뿔싸, 검은 상처의 뿌리가 시나브로 골 깊은 문장으로 변신했으니 바야흐로 시에 몰입할 타이밍이다. 그래서 하필 시집 제목도 『어쩌겠어, 지금』이다. 어쩔 것인가, 강산이 몇 바퀴 구르면서 등이 굽고 이빨 틈새가 벌어졌지만 운동화끈 졸라매고 본격 마당으로 진출해야 한다.
우리가 보려는 것은 꽃이 아니야
모가 난 세상에서
너와 내가 둥글게 굴러
가까이하고 편안하게 하여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베짱이의 꿈」 부분
어금니 갈며 뛰던 몸짓을 거부하고 둥근 새순 틔우겠다며 잠시 걸음을 세운다. 가끔은 신산의 조급함을 멈춘 채 거울 속에 발가락 담그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차가운 직각보다 부드러운 유연이 되어야 숨통도 트일 것 같다, 며 주억거리는 중이다. 그랬다. 취한 그림자로 농염을 토하던 원산도에서 필사의 힘으로 시의 텃밭을 만들던 그 등대섬이다. 더러는 석탄 먼지 날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나팔꽃 지키는 소리로 귀를 열겠다며.
진한 시문 하나 느리게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창문이 사방으로 열린 평온의 달이 뜨니 비로소 「빨간머리 앤」이나 「성냥팔이 소녀」처럼 드라마틱하고 디테일해진다. 그렇다. 뜯긴 상처의 연민에서 새순의 희망도 보일 것이다. 그 대신 안을 것만 안고 버릴 것에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곁가지를 쳐내면 문장이 확연해진다.
보라, 출근 버스 안으로 뛰어오르는 소녀의 운동화 끄트머리 얌체 공처럼 동그란 곡선 하나도 놓칠 수 없다. 생머리 사이로 터지는 샴프 냄새와 방울토마토 입술을 가슴에 훔치고도 모른 체 창밖만 바라보는 중이다. 그렇게 수수꽃 고개 숙인 가을 풍경을 가슴에 담으며 포만감으로 활자를 만든다.
아파트 숲 어지러운 빌딩은
밤마다 빈 깡통을 두들겨
귓속으로 ‘난청입니다’를 밀어 넣을 테고
나는 깡통소리를 피해 날마다 옷을 벗을 게다
- 「애증 법칙」 부분
능소화 한 송이 올려놓고 기다리던 시인의 사슴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니 의자를 내줄 수 없는 이유이다. 채워지지 못한 필생의 사랑을 화장(火葬)시키겠노라 뽀드득뽀드득 어금니 깨무니 그게 미래의 시문을 예고하는 약속이다. 지금 그는 비상을 위해 날개의 습기를 터는 중이니 이제 문장이 봇물처럼 솟구칠 수도 있다. 사랑을 토로했으니 한 판 붙어야 한다.
삶의 관조와 아스라한 동심
- 이석구 시집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구름도 울고 넘던 소년의 등허리가 배경이다. 그는 그렇게 적막의 터에서 신산의 유년을 보냈단다. 햇살 눈부신 어느 이른 봄, 쌓아온 꿈자락이 흩어지면서 어울림이 버거웠던 시국도 있었다. 그렇게 이 폭우가 그치고 햇발 나오기만 목메어 기다리던 지난 기억들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툇돌에 앉아 신산고초 그림자들을 회상하는 아득한 감칠맛도 느낀다. 중딩 시절 그 사연들은 자작시 한 권의 갱지로 묶었으니 시적 자산의 자양분이 되리라.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잘록한 허리선에 시선 다 빼앗기고
해종일 가슴앓이 하던 그 시절 내 마음도 그랬다
- 『청춘』 부분
한밤중 찬장 문 뒤져 동치미 국물 삼키던 그의 청춘도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괜찮다. 혼신으로 끌안던 것들은 저만치 허옇게 뒹굴고 있지만 이제 빛의 속도로 흐르는 세월도 편안하게 관조할 시점이 되었다. 서두르지 않는다. 산이 높으면 하늘 빛 닮은 능선을 확인할 수 있고 벌판이 넓어지면 시야가 편안해진다. 물소리 하나에도 저마다 사모(思慕)의 결이 다르므로 고집할 만한 질곡이 없다. 느리게 가다 보면 날빛 밝은 평화도 올 것이다.
졸졸졸
여인의 흐트러진 옷가지
뒷전에 음한 골 한 자락 깔아두고
가볍게 지어진 아담한 집 한 채
- 「산소골 다락논」 부분
여름땡볕 한때 ‘제발 비를 달라’며 하늘로 삿대질도 하던 그 천수답이다. 산소골 경사진 다락논이 그의 촉에 낚여 수채화 문장으로 변신했으니, 운명이다. 그게 ‘사유의 눈’이요 ‘시인의 오지랖’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만든 시의 계단이 아득할수록 구체성 풍경으로 잡히는 것이다. 시인 혼자 진하게 껴안는 것은 그늘 서린 언덕마루의 깊은 사랑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관조와 동심을 합체한 시인이 되었을까? 저 벌판의 미루나무처럼 너그럽게 관조하는 동시에 나뭇가지 미세한 흔들림에도 설레는 소년의 심장박동으로 합체되는 것이다. 쥐불놀이로 까맣게 탄 벌판에서 샛노란 씨앗들이 단비처럼 뿌려지는 그런 희망을 주워 담고 싶다. 하여, 두 팔 벌려 연두색 창문도 껴안으며 아픈 세상 달랠 채비가 되리라.
맺으면서
무릇 소설이 엉덩이 붙이기를 검증하는 노가다 근성의 작법이라면 시는 직관과 감성의 산물이다. 뭇 중생들에게 무심히 스쳐가는 일상의 스크린을 섬광 같이 낚아채서 ‘나만의 눈’으로 변신시키는 게 시인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벌판을 걸어도 모두 자양분으로 축적된다.
연암 박지원이 유금의 시를 읽고 슬쩍 덧붙였던 사연으로 이 글을 가름한다.
“이 시집을 흑룡의 여의주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을 본 셈이요, 소똥 경단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을 본 셈이다.”
하여, 쇠똥구리는 여의주에 무심한 채 작업에만 몰입하며 마찬가지로 용은 여의주로 우쭐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키 큰 고목과 키 작은 떡갈나무가 서로 교만하게 흔들리는 것은 ‘대자연의 이치’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너그럽고 넉넉한 울타리로 어울리되 저마다의 자존을 세우는 심성이다. 필자는 그렇게 세 늦깎이 벗님들의 시집들을 읽으며 감히 ‘문학의 민주화’를 강변한다. 벗들의 비상으로 우주의 중심축이 그들로부터 움직이기를 기대하며.
(kbc57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