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문학기행은 유쾌하다 못해 야단법석 속에 진행이 되었다. 어디 글을 좋아한다고 해서 묵직하게 자리 잡고 천리길을 갈 필요가 있던가. 선산을 떠나면서 회원가입건이 끝나자마자 버스는 금세 덕담과 흥겨운 가락으로 채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래도 질서정연하게 앉은 순서대로 마이크를 잡았다. 세 시간이 꼬박 걸릴 길은 이렇게 해서 금방 가 닿았다.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고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한다는 말의 묘미를 우리 회원들이 터득했음일까.
문학관을 두루 돌아다니다 1층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위대한 작가의 출생과 학업이 소개되고 드디어 아버지 황찬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일로 1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작가는 어머니 장찬봉과 시골집에서 지낸다.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앞세워 면회를 갔었고, 작가는 일흔이 되어서 그때를 회상하며 시를 지었는데 해설사는 그 전문을 낭독해 주었다.
어머니가 김을 매는 조밭머리 긴긴 한여름 뙤약볕 속에 혼자 메뚜기와 놀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눈이 좀 어두운 어머니의 길잡이로 말승냥이 늘쌍 떠나지 않는다는 함박골을 앞장서 외가에 오가던 그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장차 어떻게 살아가나 어머니가 짐짓 걱정할라치면 나귀로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기미운동으로 옥살이하는 아버지를 힘들여 면회 가선 내내 어머니 젖가슴만 더듬었네. 불도 켜있지 않은데 눈이 부셔 부셔 아버지가 눈부셔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네. 지금은 일흔 살짜리 아이가 되어 이 추운 거리 다시 한번 아버지를 면회 가서 당신의 젖가슴을 더듬어 봤으면, 어머님이여 나의 어머님이여.
일흔의 작가가 5세 적 일을 떠올리면서 어머니와 함께했던 유년기를 회고하는 이야기 속에서 평생을 간직해온 작가의 가치관이 발견된다. 불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셔 아버지를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행위는 두고두고 들여다 본 거울이었음이 틀림없다. 명예와 재물에 대한 초연함은 인간의 순수한 본질을 지향하게 하여 작가로 하여금 장인으로 거듭나게 했을 것이다. 일흔 노인이 된 작가는 자신을 “일흔 살짜리 아이”로 호명하며, 다시 아버지와의 면회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일흔 즈음에 부재하는 부모를 추억 속에서 불러내 현재화함으로써 여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봄과 동시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에 대한 올곧은 다짐을 보이고 있다.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에 유종의 미를 대비하는 것이리라.
지금은 모두가 장수시대라고들 하지만, 일흔이 넘게 되면 노년임은 분명하다. 서사물의 구성단계로 치면 주제를 명확히 하고 그동안의 활동과 사건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기껏 잘 봐준다 해도 절정 부분으로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가 실마리를 찾거나 인물들이 화해하는 결정적 순간이 되겠다. 물론 인생 3모작이란 말도 있듯이 봉사나 나눔 등으로 새로운 일을 조금 벌일 순 있겠지만, 그건 황순원 작가가 지향한 것처럼 절제와 엄격함이 바탕이 되어야 할 터이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싱싱한 힐링을 맛보고 노년을 재정의하는 큰 수확을 했다.
지금은 따스한 봄볕 쏟아지는 정자에 앉아 기념관 벽에서 본 글귀를 떠올리는 평온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작은 창에 많은 빛이 들어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는구나小窓多明使我久座.
첫댓글 좋은 글을 많이 쓰시는 선생님.
선생님 얼굴에서 빛이 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작은 창에 많은 빛이 들어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는구나"
좋은 글귀를 필사해 봅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참으로 즐겁고 흥겨웠던 문학기행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에 같이 문학 기행을 다녀왔지만 서재원 전 회장님의 복기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감동으로 와 닿았던 순간 순간을 깊이 몰두하여 듣고 익히셨다고 여겨집니다
해설사 님과 함께 견학하며 학습한 황순원 작가 님의 생애와 유명 작품을
덕분에 다시 한 번 곱씹으며 맛보게 됩니다
한편의 수필로 완성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그 자리에 있도록 하십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
일흔 살짜리 아이~~!!
그 아이가 말하는 인간의 순수한 본질을 읽고 생각해 봅니다.
뜻깊은 문학기행 후기로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