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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크신 족적(足跡) 올 추석은 외로운 날이었다. 설과 추석이면 우리 형제 가족은 모두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 형님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한 합동 성묘다. 조카 형제, 우리 집 아들 형제 가족이 모이면 열여덟 명. 해마다 이어온 성묫길에 형님은 이제 못 오시는 몸이 되셨다. 집안에는 상례 후라 올 추석을 각 가정에서 보내라고 했다. 오늘은 아내와 단 둘이서 성묘를 했다.
나의 형님 문광호(文光鎬) 1934년 2월 20일(음) 출생 2019년 8월 7일(음) 타계
아버지 35세에 탄생한 귀한 분이다. 3년 터울로 누님 두 분, 그리고 나의 태생까지 꼬박 9년이다. 우리 4남매는 부모님의 지극정성으로 굳건하게 자랐다. 맏이이신 형님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통을 바르게 이으시고 여덟 자녀를 두어, 형제로 외롭게 자라신 아버님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셨다. 열아홉에 스무 살 형수에게 장가를 드셨으니 조혼이었다. 그러나 장남으로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자식들에게 소중한 아버지의 역할을 다 하신 분이다.
엊그제 소천하신 형님을 그리면 자꾸 눈물이 난다. 장례를 마치고 형님 자손과 우리 집 자손이 모두 모여 경건한 회식을 가진 자리에서 나는 형님과의 애정과 숭조 정신을 얘기해 주었다. 가신 분의 고귀한 유업과 형제 우의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이 따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돈: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쓰느냐 -시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며 쫒기는 시간 가난뱅이가 되지 말라. -친구: 친구가 많으면 인생 후반부의 진짜 부자다. -취미: 즐기는 일이 있으면 생기가 넘친다. -건강: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 여기에 7쾌가 붙는다면 금상첨화다. 쾌식, 쾌면, 쾌변, 쾌뇨, 쾌한(땀), 쾌성(목소리), 쾌정(정력)
형님은 돈이 많은 편은 아니나 공무원 생활 25년 연금이 큰 힘이 되었다. 퇴직 후 연금을 받으시면서 부업을 하셨고 형수님의 절약 저축 자립의지로 광주에 집도 장만하시어 8남매를 고이 기르셨다. 8남매 모두 생업에 충실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으니 형님의 홍복이다. 공무원 시절, 성실하게 근무하셨고 교우가 많으셨다. 퇴임 후에도 열 분 가정의 부부모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친구 많고 정이 많기로는 형님은 고수다. 그 진한 정이 흘러넘치고 거기에 약주라도 곁들이면 흥이 萬山이다. 또한 농촌 출신이라 밭을 일구시고 화초를 재배하는 좋은 취미를 가지셨다. 50년 간 만나는 고향 동네 모임(초우회)을 이끄셨고 그 모임엔 나와 항상 동행하셨다. 동네 친구, 아우들과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시고 고향의 정을 누구보다 짙게 간직하신 형님의 향토애엔 항상 고개가 숙여졌다. 건강하기로는 100세까지 사실 줄 알았는데. 원래 건장한 체격과 체력, 그리고 뛰어난 외모를 타고 나셨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운동을 하시고 계신 터라 86세라고 해도 강건, 쾌활, 활력이 넘치셨고 최근까지 이가 상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7쾌, 어느 하나 빠짐이 없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타계를 하셨다. 운명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위급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전남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장 정지 상태였다. 인공호흡으로 가슴만 움직이고 계셨다. 한동안 조카들과 말을 잃었다. 9988 234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리. 단 몇 분 만에 소천 하시다니...
형님. 애지중지 태어나신 형님. 그러나 부모님은 아주 엄격하게 장손을 훈육하셨다. 물론 들은 바로는 유아기에 과보호였지만 학령기부터는 엄격한 교육을 받으셨다. 해방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셨고 열네 살 때 6·25사변이 발발하여 반란군들의 횡포에 떨기도 하셨으니 어린 시절 시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늦으막에 조선대학교 부속중학교에 다니셨다. 자취도 하고 친척집에서 하숙도 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직장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다. 귀향하여 농업을 거드셨고 양반 댁 규수 형수님(정순심)에게 19세 장가를 드셨다. 군대 3년간 복무를 마치고 다시 부모님을 도우셨다. 자녀들은 하나 둘 불어나고 살림은 넉넉하지 못해 도청공무원으로 취직되었고 평생 동안 직장에 충실하셨다. 원래 양반 댁 형수님은 이런 저런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팔을 걷고 삶의 현장을 뛰지 않을 수 없으셨다. 8남매의 어머니 아닌가! 우리 백부님께서는 딸만 4자매를 두신 터라 형님은 양자를 스셨고 두 분을 모시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광주로 이거했다. 형님은 그래도 모든 일이 순조로우셨다고 봐야지. 자녀들 모두 고등학교 졸업은 필수 코스였고 스스로 모두 다 대학을 졸업했다.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들도 쟁쟁한 양봉 경영자, 현역 사장, 수도권 풀나무농장 경영자, 교사, 교수, 간호사, 노무사, 세무사, 유아원장, 철도공무원 등등 하느님의 도움인지 조상님의 은총인지 잘 풀렸다. 이제 살만하다. 그런데 갑자기 가시다니... 나와 형님과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협력하는 동기간이었다. 특히 형님께서는 나의 제안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시고 단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숭조 사업도, 가족 대소사도 모두 합심 일심이었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애달프다.
이제 우리 형제는 3남매만 남았다. 함께 고락을 나눌 시간이 많아야 할 텐데...
형님은 가셨지만 후손은 여족하다. 고통 없이 가신 분의 홍복으로 더욱 번창하길 빈다. 장례를 행하던 날, 태풍 ‘링링’이 상륙했다. 그런데도 봉분이 완성 되자 밝은 햇살이 비치었다. 마치 밝은 저승에 도착했노라 하는 신호처럼.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지. 좋은 분이 가시면 저런 서기가 나타나는구나.
형님의 묘전은 내가 가꾸었다. 광주공원묘원에 고이 모신 부모님 산소 바로 곁에 오래 전 가족봉안묘를 준비했던 것인데 이번에 형님을 모신 것이다. 묘소는 묘지 소유자가 자유로이 조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형님 임종 직후 확인하고, 바로 둘레석과 제단을 마련했다. 위로는 종조부모님, 백부모님 네 분이 모셔졌고 형님 내외분을 모셨다. 그 밑으로 우리 내외가 묻히겠지. 조카들은 안심하고 있다. 편히 가신 혼백을 쾌적하게 모신 것에.
형님! 형님 생전에 자주 만나지 못하고 고이 저 세상으로 보낸 저를 용서하세요. 그러나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형님의 생전 족적을 거울삼아 후대에게 귀감이 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일은 다 잊으시고 저 하늘나라에서 그리던 형수님과 부모님 만나 극락왕생하소서. 엊그제 장조카(하봉) 내외가 고향 선산 벌초를 했답니다. 생전 형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훈을 잘 받들고 있는 장손에게 한없는 축복이 있기를 아울러 빕니다. (2019.9.13. 추석날) -----------------------------------------------------
조카들과 나눈 이야기
김문호 질녀서의 글과 나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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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곡님. 지난날 9월5일(음8월7일) 형님께서 운명을 달리하셨군요. 얼마나 상심하셨습니까? 유발나게 남곡님은 형제간 우애가 각별하고 집안의 대소사에 헌신하셨는데--그 이틀전 9월3일 남곡님과 점심을 같이 했었는데 몰랐군요. 고인의 명복과 유족분들께 위로의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남곡님, 힘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