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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일
6월을 맞이하는 아침 컨디션이 좋다. 일찍 거실에 나왔더니 수련회를 가는 아들을 위하여 아내는 김밥을 수북하게 만들어 두었다. 얼떨결에 식사를 하고 점심까지 김밥을 준비하여 체육관으로 가다가 BMW 주유를 했는데 6만원에 주행거리 210킬로의 비싼 가격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기준으로 서울에서 청주까지 120킬로 김제까지 260킬로를 감안하면 대전을 지나 부여나 논산을 갈 수 있는 양이다. 열심히 운동을 마치고 학원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더니 6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찔러 기분이 한층 상쾌해졌다. 낮 기온은 24도로 어제와 다를 바가 없지만 내일로 다가온 선거로 인하여 느껴지는 감정적 온도는 여름을 방불케 한다. 1시에 가져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수익금 처리를 이번 주까지 하기로 대치동 원장과 긴시간 전화도 왔다. 4시경 수도세 정산으로 신설동에 갔더니 오늘 딸을 출산한 1층 젊은이가 싱글벙글 하여 덕담을 해 주고 학원으로 돌아왔다. 수업을 마친 저녁에 내가 좋아하는 낙지와 갑오징어를 구입하여 집에서 요리를 했는데 식당에서 먹는 것하고 완전 다른 맛이었다.
2일 지방선거가 실시되는 날이라 일찍 안산초등학교에 가서 투표를 하고 돌아왔다.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이전까지는 투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집권당의 무능으로 야당 서울시장 후보에게만 기표를 했다. 언론이나 선관위에서 투표는 국민의 의무라 반드시 하라고 홍보를 해도 자격이 없거나 자신의 기준에서 멀다고 생각되면 기권을 할 수도 있다. 검증이 투명하게 되는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고는 55%~70% 투표율을 보여 서울시민 30%이상은 실제 억지 춘향식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안부 문자를 돌렸더니 우현이만 차 매입으로 지방에 내려간다는 답장이 왔다. 산행을 하려고 10시에 정릉으로 갔다가 1시간을 걸어 보국문에 올랐고 능선을 따라 서쪽 대성문으로 이동하여 고즈넉한 일선사 경내에 들어섰다. 불어오는 산바람과 함께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후 계곡으로 내려와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흐르던 땀이 사라져 버렸다. 학원으로 돌아와 시청한 오늘의 서울시장 결과예측은 백중지세 여당47.4% 야당47.2%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 늦은 밤까지 초박빙으로 치닫는 곳이 전국적으로 늘어나 다음 선거에는 내가 나서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3일 어제 늦게까지 개표방송을 보고 새벽에 다시 TV를 켰는데 아직도 서울시장은 0.2%의 간격을 두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중이다. 엊그제 여론까지만 해도 여당이 20%나 앞서더니 실제 결과는 손에 땀을 쥐는 선거전이 되었고 이런 상황은 그 동안 보기가 힘들었다. 새벽까지 간발의 차이로 앞서가던 후보가 아침이 되면서 강남 서초에서 지지를 받은 후보에게 역전을 당하여 결국 서울시장은 여당이 차지하게 되었다. 아침에 된장국으로 식사를 하는 중에 아내는 신사임당 모임에서 가평 수목원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멋을 부리고 집을 나선다. 개교기념일 휴일을 맞은 딸을 정독도서관에 태워다 주고 체육관으로 돌아와 땀을 흘리며 6월의 초순을 시작했다. 12시30분 서대문 꽃시장에 들러 토요일 친구 딸 결혼식에 보낼 화환을 주문해 두고 학원으로 가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낮 기온은 26도까지 올라 초여름 같은 오후를 보냈고 수업을 마치고는 정독도서실에서 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4일 새벽에 한국과 스페인 축구경기를 시청하고 늦게 잠이 들었다가 8시가 지나서 일어났다. 그 동안 축구경기를 많이 보와왔지만 스페인의 정교한 기술은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놀라웠고 역시 월드컵 우승 후보다운 팀이었다. 아침에 과거 경기학원의 원천징수액과 부가세액 서류를 세무서에 가서 확인시켜 주고 체육관에서 1시경 운동을 마쳤다. 오후에 학원으로 가서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고 에어컨 점검과 내일 영덕과 부산에 가는 영식이와 통화도 했다. 여전히 불투명한 사업의 상황으로 이번에는 베링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40일 동안의 모든 비용을 투자자인 자신이 걱정을 하고 있다. 선박은 운반이 제대로 되면 이익을 만들지만 심한 파도로 고장이나 선원들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막대한 손실이 생긴다. 언젠가는 파도에 휩쓸려 현지에서 선원이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작업을 중지하고 냉동고에 싣고 돌아와 처리하는 과정이 간단하지 않았다. 고등부 수업을 마친 저녁에 집으로 오면서 엊그제처럼 갑오징어를 구입했고 학원에서 돌아온 아내와 딸까지 함께 먹었다.
5일 시원한 새벽에 산행을 할까 하다가 식사를 마친 9시에 안산에 올랐다. 낮에 예식장을 가야 하는 이유로 멀리 가지 못한 것인데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내려와 기구운동을 하고 11시30분에 집으로 왔다. 산행을 하는 동안 짙푸른 신록은 여름이 왔음을 알렸고 붉게 핀 장미는 변함없이 자태를 뽐내며 6월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를 몰고 서둘러 영등포에 있는 예식장에 갔더니 고향 친구들이 먼저 도착해 있고 어제 내가 주문한 화환과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들어선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동선이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가져온 건강식품을 전달하고 형준이도 늦게 도착하여 자리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은 뒤 주말 수업을 하려고 일어섰는데 오늘은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도 일이 우선이라 내부순환도로를 거쳐 학원으로 들어와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고 일과를 마무리 했다. 낮부터 어울린 친구들은 저녁에 광화문까지 나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집으로 가던 나도 늦게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6일 어제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가 차를 시내에 두고 집에 왔다. 교회에 가면서 운전을 하려고 일단 택시로 광화문으로 이동했는데 손가방에 두었던 키가 보이지 않는다. 당황스러움으로 다시 집으로 갔다가 세피아 차를 움직여 어제 다닌 음식점들을 확인하여 다행히 마지막 집에서 키를 찾았다. 결국 시간이 늦어 교회는 가지 못했지만 오늘처럼 극적인 일이 생기면 모두 주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다. 현충일 아침 국립묘지에 간다는 대통령 때문에 불편한 광화문 거리를 빠져나와 설렁탕으로 식사를 하고 11시에 논술교실로 들어갔다. 차를 옮긴다고 광화문에 두 번씩이나 오갔던 시간이라 피곤했고 가까스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도 논술교실에 올라가 수업을 하고 저녁에 돌아오니 더운 날씨에 종일 집에만 있었다는 딸이 힘없이 앉아 있다. 중학교에 적응은 잘 하는지 생활에 어려움은 없는지 쇼핑이나 여행은 고사하고 대화조차 못해 주는 나로서는 미안함이 많았다. 딸과는 반대로 오늘도 새벽 1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아들까지 자녀들 교육에서 나는 분명히 무능한 사람이다.
7일 거실에 나왔더니 아내가 김밥을 만들고 오늘은 딸이 수련회를 간다며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다. 아침 식사도 자연스럽게 김밥으로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1박2일 내일 오겠다는 딸이 인사를 한다. 평소에 말도 없는 딸이 방문까지 열고 얼굴을 보이다니 손을 흔들어 주기는 했어도 어인 일인지 깜짝 놀랐다. 오늘은 낮 기온이 30도를 올라 여름이 되었고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는데도 땀부터 흐르기 시작한다. 1시에 학원으로 이동하여 집에서 가져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고 엊그제 늦게까지 함께 보냈던 동창들에게 전화를 했다. 오후에 기온은 더 올라 금년 최고 31도를 기록하더니 급기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변덕스런 날씨가 마치 생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고 저녁에 돌아온 집은 딸이 없어 더 휑하기만 했다.
8일 날마다 거실에서 밤을 보내던 아내가 오늘은 안방에서 잤는데 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새벽에 등교가 늦었는지 부산한 소리에 잠을 깨어 거실로 나왔더니 오늘도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을 나서는 아들이다. 아내는 날이 더워 일찍 산에 다녀온다고 안산에 오르고 식사를 마친 나도 체육관으로 나가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 12시경 다시 집으로 들어와 아내와 열무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남대문시장 안경도매점에 나가 여름에 사용할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도매로 5만원이라는 것을 억지로 우겨 3만원에 샀는데 국산 편광렌즈에 가볍고 모양까지 좋아 만족스러웠다. 새로 산 안경을 끼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의기양양 학원으로 가는 중에 얼마 전 고향에 갔던 영식이가 아파트에 미역과 젓갈류를 두고 간다는 연락이 왔다.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수업을 마친 뒤에 지하철을 이용하여 방배동으로 갔더니 강형수를 비롯한 자신의 고향 동창들을 불러 두었다. 산에 갈 때처럼 술을 마실 때도 영식이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불러 초반 적었던 인원이 일어설 때는 단체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늦은 시간에 방향이 같은 강형수와 방배동에서 시내버스를 함께 탔는데 고등학교 체육선생까지 한다는 놈이 얼마나 떠드는지 창피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9일 새벽에 눈을 떴다가 8시까지 더 잤는데 잠도 건강의 보약이니 하루 6시간 이상의 수면은 유지해야 할 것이다. 밤이 긴 겨울은 그런대로 문제가 없더라도 낮 시간이 길어 저녁을 먹으면 금방 12시가 되는 여름에는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아침 뉴스에 오늘은 32도까지 오른다니 금방이라도 땀이 흐를 것 같았고 식사를 마친 오전에 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영어를 배우고 11시경 온다는 아내를 위해서도 서둘러 집을 나섰는데 이 더운 날 안방에 누어 빈둥거리는 답답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20여 년 전 나이가 지긋한 선생님께서 남자는 할 일이 없어도 도시락을 들고 부지런히 집을 나서는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대가 변하다 보니 이런 과정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알고 어제 영식이가 보내온 경상도 쑥떡을 몇 개 들고 나온 터이다. 학원에 도착하여 점심을 하고 에어컨까지 작동하며 오후를 보내다가 수강생을 상담하게 되었는데 국어 영어 수학이 모두 1등급이라니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녁에 고등부 수업을 마치고 일찍 집으로 왔더니 수련회에 갔던 딸이 돌아와 있고 노래를 많이 했는지 목까지 쉬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10일 새벽에 허리와 등이 아프다는 아내에게 지압으로 안마를 해 주었더니 시원하다며 좋아한다. 누구나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인데 40대 초반에 벌써 허리가 아프다니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오늘도 아침부터 숨이 막히는 것을 보니 30도를 충분히 웃도는 기온이 될 것 같고 아들은 식사나 하고 학교에 갔는지 흔적이 없다. 대화를 안 한 지도 한참이 되었는데 안타까운 시간이 아닐 수 없고 식사를 마친 오전에는 재량 휴일이라는 딸을 태워 정독도서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으라고 용돈을 주었다. 부녀지간으로 잠깐의 인연을 이어가다가 머지않아 바람처럼 떠나는 인생이지만 순간이라도 딸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을 뿐이다. 차를 돌려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김치를 담근다고 분주하고 하지만 젓갈과 칼칼한 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식사를 하면서는 엊그제 영식이가 가져 온 멸치젓갈에 고추양념을 하여 익혀서 먹었더니 이것 또한 생선찜처럼 맛이 있었다. 오늘부터는 목요일도 수업이 있어 오후에 학원으로 나갔고 생각하니 사람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사업을 하든 농사를 짓든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한다면 그 가치는 동일할 수 있고 그것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을 하고 10시가 거의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은 컴퓨터를 하고 안방에서는 아내가 딸의 과제를 만들고 있다.
11일 잠을 잘 자고 6시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더니 아들은 학교에 갔는지 보이지 않고 8시가 되어 가는 시간에 딸하고만 식사를 했다. 오늘부터 착용하는 동명여중 딸의 교복이 밝고 세련되어 예쁘고 아내는 분당에 사는 정목이네 집에 간다면서 식사를 하자마자 집을 나선다. 오전에 학원으로 나가려고 도시락을 준비하는 중에 남석이 전화가 와서 장인이 충주의료원에서 별세하셨다는 부고를 알린다. 작년에 재웅이 부친상으로 갔던 곳이고 몇 년 전에는 남석이 어머니도 장례를 여기에서 거행했는데 오늘 다시 가야 하는 곳이다. 계획을 변경하여 체육관부터 나갔다가 서대문 꽃시장으로 이동하여 우리들 모임인 고목회 조화를 주문하여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 중에 학교에 간 아들이 과제물을 가지러 왔는지 물건을 훔친 도둑처럼 허겁지겁 왔다가 현관을 나간다. 남아공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는 오늘은 한국이 2002년의 신화를 다시 창조할 것인지 사람들의 기대가 많은 날이다. 학원에 가서 컴퓨터를 수리하고 수업을 마친 늦은 밤에는 강남터미널에서 막차를 이용하여 충주의료원으로 출발했다.
12일 장례식장에서 보내다가 일정이 있는 노훈이가 먼저 떠나고 재웅와 밖으로 나와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밤을 새웠다. 새벽부터 내린 굵은 빗줄기는 날이 새면서 가늘어졌고 영구차가 떠난 직후 8시에 서울로 출발하여 2시간이 더 지나 구의동터미널로 돌아왔다. 주말이라 나들이객으로 붐비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학원으로 이동하여 점심부터 사 먹고 수업을 준비하며 오후를 맞이했다. 월드컵 한국과 그리스의 경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인데 시민들은 큰 축제를 만난 것처럼 미리부터 여기저기 환호성 일색이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쉬는 중에 아내가 수업을 부탁하여 논술교실에 올랐고 마치고 돌아오니 축구경기는 시작되었다. 광화문 광장의 함성이 들려오는 밤 한국은 그리스에 2:0으로 승리를 했고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도 서전을 장식하며 1차전을 마쳤다.
13일 그저께 문상을 갔다가 밤을 새우고 어제는 늦게까지 월드컵 축구를 시청한다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함께 자던 아내가 교회에 가라고 이른 시간에 독려를 했지만 힘이 들어 계속 누워만 있었고 도서관에 간다는 딸에게도 교회도 못가는 형편이라 했더니 버스로 간다면서 혼자 집을 나선다. 늦은 식사를 하고 11시에 논술교실로 올라가 월드컵보다 배우려는 열정이 더 강한 학생들을 위해 열심히 강의를 했다. 우직하게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학생 사이에 생기는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하고 4시에 다시 수업으로 나서는데 컴퓨터를 하던 아들이 논술교실에서 배우는 국어를 다 했다며 수업에 불참한다고 말한다. 부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많고 중요한데 공부도 못하면서 더 할 것이 없다니 화가 나고 어이가 없고 가소로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6시에 정독도서관에 가서 딸을 태우고 종로5가 블랙야크 등산복 매장을 방문했더니 벌써 종료가 되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삼겹살로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있노라니 생활에 흥도 없고 아들조차 엉뚱하여 어찌해야 할지 깊은 한숨만 나왔다.
14일 요즘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눈을 뜬 새벽이 혼란스러웠다. 지난 날 당당했던 내가 왜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전락했는지 오늘따라 단란했던 어린시절이 그리운 시간이다. 어제부터 내리는 우울한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고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에 보내겠다는 수강생 어머니는 어제까지의 수강료를입금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체육관으로 나가 기구운동과 달리기를 하며 땀을 흘렸더니 그나마 마음의 안정과 편안함이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살다보면 좋은 일도 많지만 어려울 때도 있는 것이 인생이니 현명하게 헤아리고 인내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리라 다짐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종로에서 허탕을 쳐서 이번에는 불광동 블랙야크 코너에 가서 반바지와 모자 그리고 여름용 배낭을 구경했는데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구기터널을 통과하여 정릉을 거쳐 학원으로 1시에 들어가 점심을 하고 이른 오후에는 신설동에 나가 정식이를 만났다. 삼겹살로 소주를 마시고 정식이는 횡설수설 개똥철학을 내세우며 평소와 다른 나를 위로했지만 고마움을 만나기도 전에 먼저 술이 취한 밤이 되었다.
15일 새벽에 눈을 뜨니 아내는 딸하고 거실에서 자고 있고 그 사이 비가 와서 창가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식사를 마치고 운동까지 거르며 학원으로 바로 나갔는데 오전까지 내리던 소나기는 12시가 지나면서 해로 바뀌었다. 학원에 비치한 등산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성북동 한진아파트 종점 북악스카이웨이 중턱에서 내렸다. 산책로를 1시간 이상 달리고 걸으면서 하늘마루 정상에 도달했고 이어 김신조 길을 타고 성북동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남마루에 올랐다. 1968년 간첩들이 청와대로 잠입하려다가 여기에서 총격전을 벌여 대부분 사살되고 결국 김신조 생포 나머지 두 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오랫동안 개방이 되지 않다가 최근에 산행길로 이어진 이곳은 아직도 총격전의 흔적이 바위에 그대로 남아 당시의 긴박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이후 남한에서는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6.25 참전 용사 육군상사 출신인 아버지께서도 고향의 중대장을 역임하게 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다닐 때는 학교에서 훈련이 자주 있었는데 기합소리를 내며 단상에서 총검술을 선보이던 아버지의 늠늠한 모습과 동작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오후 3시에 성북천 발원지를 거쳐 삼청각 근처로 내려와 길상사를 지나면서 점심으로 시원한 냉면을 사 먹었다. 다시 학원으로 들어가서 마무리를 하고 해가 떠 있는 6시에 집으로 갔더니 저녁을 먹던 아내와 딸이 일찍 들어온 나를 의아하게 바라만 볼 뿐이다. 밤에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온 아들은 거실로 방으로 활보하며 안하무인격으로 들락거려 오늘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