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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평릉의 사변. 이 사건은 이른바 중국 삼국시대(서기 168-280)에 벌어졌던 일이지만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삼국지연의』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 치고는 사건에 대한 정식명칭조차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여하튼 오늘은 그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지요.
고평릉의 사변이란 제가 전에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렸던대로 조상 일파가 임금인 조방과 같이 조예가 묻힌 능으로 참배하러 갔을 틈을 타 사마의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은 무관파(?)와 문관파(?), 귀족과 청담문인파와의 대결에서 전자의 경우가 승리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으며 한편으로는 조위 왕조가 사마씨 왕조로 전환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1. 고평릉의 사변에 대하여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상 일파가 사냥 나간 틈을 타 사마 의가 아들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정사를 보면 조상 일파는 사냥이 아니라 임금인 조방을 수행하여 조예의 묘지인 고평릉을 참배하러 갔을 때 사마 의가 변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는 진수가 쓴『정사 삼국지』「위서 조상 열전」에서 사건의 내막과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정시) 10년(서기 249년) 정월에 천자의 수레는 고평릉을 찾았는데 조상 형제도 모두 따라왔다. 사마 선왕(사마 의)은 병마를 지휘하여 먼저 무기 창고를 점거하고, 낙수의 부교에 주둔했다. 그는 조상의 죄상을 (태후에게) 상주했다. (중략) 조상은 사마 선왕(사마의)의 상주문을 알았지만, 천자(조방)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중략) 조상 형제는 관직을 파면 당하고 제후의 신분으로 자택에 돌아왔다. (중략) 결국 조상, 조희, 조훈, 하안, 등양, 정밀 , 필궤, 이승, 환범, 장당 등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하고 삼족을 멸했다.
이 기록을 비롯해『자치통감』「위기」,『진서』「선제기」역시 아울러 참고해보면 고평릉 사변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임금인 조 방이 고평릉에 참배하러 가고, 조상 일파가 조방을 수행. 2) 사마의가 그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켜 조상의 죄목을 태후에게 상주. 3) 대치 정국에서 사마의의 회유에 넘어간 조상이 결국 궁궐로 귀환. 관직을 파면당함.(제후의 신분만 유지) 4) 사마의에 의해 조상을 비롯한 그 일파 중심 인물들의 3족이 멸해지고 처형됨.(역적 모의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일절 없음.)
고평릉의 과정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 고평릉 사변의 성격은 어떠했을까요? 모든 일에는 항상 원인이 있기 마련이니 이 고평릉 사변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기에 이런 극단적인 결과가 돌출되었을까요?
2. 조씨 혹은 문인파(!)의 거두 조 상과 귀족 혹은 무인파(?)의 수장 사마 의
고평릉 사변은 크게 두 세력의 대결로 볼 수 있습니다. 종친인 조상과 공신인 사마의의 대결인데 이 둘의 권력 입지를 짚어보면 고평릉 사변이 어떤 성격의 사건이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조상의 경우부터 살펴보지요. 앞서 글들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는 자가 소백으로 어릴적부터 왕족 특유의 위엄을 갖추었고 이는 조씨라는 프리빌리지(privilege, 특전)와 맞물려 식읍 1만 2천호에 직위는 대장군 취임 직전까지는 산기상시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동생들은 하나 같이 열후에 봉해진, 전형적인 왕족의 출세 루트를 밟은 인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순탄한 그의 일생에 있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2가지의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는데 하나는 자신이 직접 주청하고 지휘한 촉한 공격의 실패와 또 하나는 사마의의 대두입니다.
이제 사마의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그는 조상과는 달리 철저하게 능력과 공적으로 인정 받아 대장군의 직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혈통도 좋기는 했지만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조씨를 섬겼고 원로대신이란 점과 맹달을 죽이고 연나라 임금 공손연을 무찔렀으며 특히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한 공적까지 합해져 당시 위국 최고의 거두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살펴본대로 그는 처음에 조상과 사이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조상은 사마의를 원로대신으로 인정하고 존경을 표했으며 사마의도 이러한 조상의 행동을 '아첨'이 아닌 순수한 '우대'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사마의를 무시할만한 인물이 과연 (조)위 왕조에 있었는 지가 의문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역사 기록에 의하면 조상 주변의 하안, 필궤 등 여러 문사들이 모여 사마의를 이른바 '중상모략'함으로 인해 두 사이가 갈라지게 되었다고 하지요(서진 왕조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감안해야 하는 만큼 이 기록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따지고 든다면 조상과 사마의는 상극의 인물이었습니다. 조상은 종친이자 문인들을 우대하여 문인 파벌을 형성한 인물이었고 출세의 과정도 결국 종친이라는 프리빌리지였습니다. 반면 사마의는 조상과 달리 귀족 북벌 방어 등에서 동고동락했던 여러 군인들과 친하게 지내어 군벌파를 형성하고 있는 추세였습니다. 그런 고로 대략 다음과 같은 구도가 형성되었지요.
문인세력 vs 군인세력. 종친 vs 귀족. 가문의 후광 vs 철저한 공적과 능력.
조조나 조비 시대에 비하면 뭔가 야릇하게 달라진 구도입니다. 조조 시대에 종친들은 거의 군사분야에서 활약했고 귀족들은 대개 문관 노릇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1세대의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의 종친들은 철저하게 무관들이었던 반면 순욱, 순유, 사마방, 화흠 등의 귀족 출신들은 대개 문관들인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2세대 때에도 그 구도는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외라면 사마의가 군사분야에서도 서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인데 그의 형인 사마랑도 하후돈의 휘하에서 군사적인 일을 맡았던만큼 거부감은 적었을 것입니다. 이 때 조진, 조휴, 하후상 같은 2세대 종친들도 군사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한데 이러한 현상은 3세대 때 무너집니다. 조조(조휴의 아들), 하후현 등의 유능한 종친들이 대거 탈락하고 조예가 투톱체제로 전환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유능한 종친들이 활동할 수 없었던데다가 4세대 군주인 조방은 택없이 어렸습니다. 무턱대고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총명한 군주는 더더욱 아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먼저 칼을 뽑은 인물은 조상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사마의에 대하여 '불안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마의란 인물 자체가『삼국지』월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 아닙니까? 조조 없는 세상에서 그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나마 두려워할만한 인물인 제갈량도 죽은 이상 사마의를 막을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상은 마침 촉한 공격에 실패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권력을 사마의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형세였지요. 이런 가운데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그에게 접근한 자들이 있으니 바로 하안, 필궤, 정밀, 이승 등 이른바 청담문인들이었습니다.
흔히 이 대결을 무인파와 문인파로 대비하지만 그보다는 비 명문과 명문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실제 조상의 일파인 청담문인들 중 주요 인물들 출신을 살펴보면 준종친인 하후현 정도를 제외하면 명문과는 거리가 멉니다.
3.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규정된 이유
이렇게 고평릉 사변의 과정과 각 주체세력을 분석해보았습니다. 이제 고평릉 사변 그 자체에 대하여 알아보지요.
흔히들 대부분의『삼국연의』관련 책에서는 고평릉 사변을 '역성혁명'이란 그럴 듯한 이름은 커녕 '반란'이라고 조차 부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변란'이고 심지어는 '쿠데타'라는 용어나 '권력투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보통이지요.
이는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의 저서『중국중세사』와 이공범 교수의 저서『위진남북조사』평가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고평릉 사변은 그 어떤 명분도 없는 오로지 사마의 개인 혹은 그 가문의 권력을 위한 군사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반란이 '역성혁명'으로 미화(!) 되고 후세에 전해지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 반란이 성공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둘째, 명분이 있어야 하며 셋째, 이전의 왕조가 매우 무능하고 부패하여 더이상 백성을 다스릴 여력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의의 경우 첫번째 조건은 맞았으나 두번째 조건인 명분이 없었습니다. 명분의 절대조건인 천자는 당시 조 상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더욱이 세 번째 조건으로 (조)위 왕조 문제인데 이 왕조는 무능하기는 커녕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동한 시대에 비한다면 말이지요. 이런 왕조에 대해 사마의는 다만 중추 수뇌부를 점거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마의의 명분은 그야말로 엉터리 짜깁기라 비판 받아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마의가 왜 이런 변란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3가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조상을 탄핵한 상주문에 이를 첨가했습니다.
1) 조상이 파벌을 가르고 조정의 분란을 자초했다. 2) 사마의는 태후의 허가를 받았다.(고로 이번 사건은 변란이 아닌, 칙명에 따라 움직인 행동이다.) 3) 장제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자신을 도왔다.
우선 조상이 파벌을 가르고 조정의 분란을 자초했다는 것은 아주 그른 말만은 아니되 다분히 억지스럽습니다. 조상이 애써서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기 보다는 그들이 조상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 옳다고 봐야 하며 엄밀히 말해 파벌을 만든 것은 사마 의가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사마의는 조상이 전대 임금인 조예의 눈에 띄어 출세하기 전, 즉 촉한과의 전쟁 때부터 벌써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생사를 나눈 전우만큼 친한 관계가 없다고 북벌에서 제갈량의 공격군을 방어하며 곽회, 진태 등의 군인들과 거의 주종 관계에 가까운 사이를 맺었습니다. 더욱이 진태의 경우는 명문귀족인 진군의 아들입니다. 이러니 조상이 (먼저) 파벌을 만들고 패를 갈라 조정의 분란을 자초했다는 주장은 억지스럽지요.
둘째로 태후의 명을 받았다는 주장은 더더욱 말이 안됩니다. 위국은 초대 임금인 세조 조비 때 태후와 환관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천하에 알렸습니다. 즉 태후는 사마의에게 군사행동을 일으키라고 명령할 '권한' 그 자체가 없으며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가는 사마의는 물론이거니와 태후도 처벌감이 됩니다.
사마의를 전적으로 신임했던 조비가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셋째로 장제를 비롯해 여러 구신이 사마의를 도왔다는 주장도 고평릉 사변이 성사된 이후를 보면 가당치도 않은 주장입니다. 실제로 장제는 훗날 "내가 사마의를 잘못 보았다. 그는 충신이 아닌, 이리 같은 인물이다." 라고 탄식하며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한 채 병들어 죽었습니다.
장제를 제외한 대다수의 대신들은 전부터 사마의가 포섭한 세력들입니다. 고유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지요. 고유는 조조에게 발탁되기는 했어도 본래 출신이 명문 귀족입니다. 또 동생인 사마부도 유력한 대신이었고요. 노육 같은 명문 귀족 역시 사마씨 편에 섰고, 조조에게 죽음을 당한 순욱의 일가 역시 명문 귀족인데 사마씨 편에 섰습니다.
구신이라 해도 왕조를 보호할만한 1세대, 2세대 구신들은 모두 죽었으니 이 또한 이치에 닿는 말은 솔직히 아니지요.
4. 권력만을 위한 투쟁
고평릉 사변이 종결된 후 장제의 병사(病死) 이외에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사마의 자신의 이율배반적 행위와 지나친 사건 처리 방식입니다.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의 대치 기간 동안 조상에게 '대장군의 직만 포기하면 살려주겠다.' 란 반 협박조의 서신을 보냈고 조상은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 의는 결국 조상에게 반란혐의가 있다면서 그는 물론이고 그 동생들의 삼족을 멸했으며 하안,필궤, 정밀, 이승 등도 모조리 죽였습니다.
설령 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상은 이미 재기불능의 상황이었고 더욱이 종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상은 물론 그 동생들과 삼족까지 멸하는 처사는 실상 조조 가문을 보호하는 세력의 후사를 끊겠다는 의사 표시와 다름 없는 짓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 종친들은 발도 못 붙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후패 등 조씨의 친위세력 혹은 준종친인 하후씨가 촉한으로 도망치거나 혹은 출사를 꺼려한 것도 자칫 그 화가 미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그만큼 사마의의 일 처리는 잔혹했고 확실했습니다. 마치 권력을 탐하지 않는 양 행세하면서도 실제로는 착실히 권력쟁탈을 위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종결된 이 사건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까요?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수는 고평릉 사변을 '아무 것도 없는, 오로지 권력 투쟁' 이라 규정했고 이에 대해 다른 학자들(자오찌엔민 교수 등)도 대개 공통된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리동혁 작가나 김운회 교수 정도가 사마씨에게(혹은 사마 의 개인에게) 긍정적일 따름이지요.
결국 고평릉 사변은 사마의 개인의 권력쟁취를 위한 야비한 쿠데타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론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찬탈극'이라 보아야 옳지 않을까 합니다.
* 참고서적: 미야자키 이치사다,『중국중세사』/ 이공범『위진남북조사』/ 리동혁,『본삼국지』 원전: 진수(자는 승조),『정사 삼국지』/ 사마 광,『자치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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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것으로 조조가 40여년간 구축한 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죠. 나름대로 실력위주의 인사와 유교로만 국가를 다스리기 보다는 병법, 법가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가시스템을 구축하였죠. 그래서 공융(공자자손)을 죽였다는 말도 있었죠.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한왕실에 한 일이 있어서 사마씨에게 그자손이 똑같이 당했다는식으로 당연시 하지만 조조는 분명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이미 한나라는 멸망으로 향하던 시대였으니깐요. 그래서 일설에는 조조가 사마의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젊을때와 너무 비슷해서 말이죠. 조위에게는 조비의 40세단명, 조예의 39살 단명이 안타깝죠. 10년씩만 더 살았어도 조방의 나이도 어느정
도 장성하였을테고, 저리 허무하게 망하진 않았겠죠.
추모왕님의 견해에 저도 공감합니다. 조위 왕조로 보았을 때는 참으로 아쉬운 상황이지요. 다만 비 중원 세력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귀족 왕조의 창건으로 인해 상황이 유리하게 반전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여담으로 조 예는 36세에 별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