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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의 상실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겪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회 생활에서 동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자도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교회에선 장로요 집사인데 교회 밖 사회에선 그가 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나 동료들이 나중에 '너도 신자였어?, 그 사람도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당황해 하기도 합니다. 왜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거나 표현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나타낼 때 사람들의 편견, 거리 두기, 외면 또는 무시 당할 것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신앙이 책망 받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이 도리어 멸시 받는 시대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거나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재산을 빼앗기고, 그리고 심지어 감옥에 투옥되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쉽게 세례를 받거나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겪고 박해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세례를 받았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다 순수하고 진실한 신자였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도 가롯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례자와 신앙고백을 하는 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이름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수치와 모욕과 핍박을 받던 기독교는 4세기 후반이 되면 로마 시민의 60%이상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결국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됩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호칭이 결국 명예와 영광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운전 중에 차 뒷면에 물고기 표시(익투스)의 스티커를 붙인 차들을 자주 봅니다. 그것은 운전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입니다. 또 SNS를 보면 프로필에 십자가나 성화, 또는 성구가 적혀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스티커를 붙이거나 SNS 프로필에 십자가나 성구를 적은 사람이 모두 실제 삶에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물고기 스티커를 붙은 차량이지만 신호 위반을 하거나, 과속 또는 난폭 운전을 합니다. 때로는 그 운전자가 상대차 운전자와 다투기도 합니다. SNS 프로필에 십자가를 넣고 성구를 적는다 하더라도 대화 창에 욕설과 험담과 거짓과 외설로 도배된다면 그 프로필은 종교적 위선에 불과한 것이지요. 외적 표시와 실상의 삶은 다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표식은 책임있는 '결단과 실천’의 표시였습니다.
당시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 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는 순간 불이익과 투옥과 사형까지 당해야만 했습니다. 익투스라는 물고기 기호도 세상에 드러내는 기호가 아니라 감추는 암호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임을 외적인 표식보다, 삶을 통해서, 선행을 통해서, 신앙고백과 순교를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가 많습니다. 세계 종교 분포를 보면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 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세상은 그리 정의롭고 평안해 보이진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정복했지만, 지금 세계 인구의 30%나 차지하는 그리스도인은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미국에는 전쟁, 폭력, 마약, 포르노, 차별과 증오 등 그리스도께서 미워하는 것이 가장 많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성경 속에 그리스도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와 닮지 않는 자들이 많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스티커를 붙이거나, 주일에 교회를 나가거나, 현관문에 출석 교회의 명패를 붙이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거나, 심지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문신을 해서(성경은 문신을 금지하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 표식에 비해, 그들의 말과 행동, 생각과 생활은 매우 세상적이고 그리스도와 무관합니다. 그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끔 볼 때도 있고, 평생 안 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이 습관적입니다. 그들은 예물을 준비하여 정해진 예배처소에 나오기 보다, 어수선한 환경에서 라디오, TV, 온라인 방송으로 대체합니다. 자그레브에는 여러분들 외에 분명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어디서 예물을 드리고, 누구와 성령의 교제를 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규정은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규정(인정)은 성령에 의해 삶으로 증거됩니다. 태양은 열과 빛을 숨길 수 없습니다. 소금은 짠 맛을 숨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그리스도를 숨길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인정을 받습니다. 숨기려 해도 세상이 알아차립니다. 혹시 '교회 다니나 봐요? 예수 믿으세요?'.. 숨겨도 세상이 알아봅니다. 티가 납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불려진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표가 너무 나서 예수쟁이로 불렸습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3~14)
초보 영적 면허증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사단의 간계로 혼란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세례는 현재의 세례와 달랐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신앙고백과 달리 아주 느슨해져습니다. 사단은 이런 세례교인들과 신앙고백자들을 매주마다 생산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계략에 속아 호칭만 있고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말입니다.
크로아티아는 운전면허 시험이 까다롭습니다. 비용도 비쌉니다. 오랜 시간 운전 연습과 도로주행, 또 시험을 거쳐서 마침내 면허증을 발급 받습니다. 반면 한국은 자동차 학원에 등록하면 일주일 안에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세례는 까다롭고 영적 비용도 비싸고 오랜 시간 훈련과 시험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례자는 곧장 세상에 나가도 안전한 영적 순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례는 과거와 다릅니다. 세례를 받아도 곧장 세상에 나가 안전한 순례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갑자기 세례를 받은 남성이 곧장 영적인 삶을 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세례와 신앙고백 자체가 엉성해져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떡합니까? 3일만에 딴 면허증으로 차를 타고 도심이나 고속도로에 들어간다면 아마 큰 사고를 내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영적 면허증) 후에도 두려운 마음으로 순례를 더욱 긴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또 곁에 영적 안내자인 목자를 두고 지도와 교육을 받으며, 세례와 신앙고백을 채워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목사라고 부른다는 것은 내가 목사 같이 행동하고 있어야 만이 목사가 되는 것이지요. 제가 목사된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완벽한 목사로서의 자질을 다 갖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였지만 목사가 된 후 그 직분에 걸맞게 배우고 훈련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동일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고 지은 죄가 더 크다’(눅12:47~48)고 하셨는데 호칭에 합당한 삶을 살면 축복이되지만, 그렇지 않는 삶을 살게 되면 더 많이 책망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명예 훼손죄'입니다. 그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편견을 갖게 하며, 그리스도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게 합니다. 세상에서도 신분에 따라 더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그들이 가진 직분과 호칭에 따라 의무와 책임도 못지 않게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짜 골드바의 시대, 순금 신앙을 증명하라
지금은 지폐의 가치가 폭락한 곳이 많습니다. 베네수엘라나 쿠바, 이란 등에는 지폐의 가치가 폭락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식료품 한 봉지를 사려면 그 봉지 만큼의 지폐 뭉치를 줘야 할만큼 지폐의 가치가 형편없어졌습니다. 원화 환율도 떨어져 송금을 받을 경우 작년에 비해 30%가 더 떨어진 것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 지폐가 아닌 안전한 자산인 금 값이 고공행진을 합니다. 근데 금값이 오르면서 가짜 금이 시장에 대거 유통되고 있습니다. 보기에는 완전히 똑같은 골드바입니다. 하지만 그 골드바를 자르거나 깨어보면 안에는 불순물과 혼합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가짜 골드바를 만드는 이유는 순금의 가치 때문입니다. 누구도 돌이나 자갈같이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여 만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높은 가치 때문에 금과 은에는 위조 금과 은이 있고, 미국 달러에 위조 달러가 있습니다. 위조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진짜에 대한 가치가 높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 위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은 이유는 그만큼 진짜 그리스도인의 높은 가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금처럼 너무나 가치있고 복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신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과 영생의 축복을 보장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계속적으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중보를 받고 보호를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의 축복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안전한 도움과 보호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치는 어떤 금화보다 귀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가치때문에 위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집니다.
골드바를 깨어보면 그 안에 금이 없는 것처럼, 위조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의 삶을 열어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보기에는 그럴 듯 합니다. 그들은 질 낮은 위선으로 자신을 도금했을 뿐입니다. 예수님 표현으로는 ‘회칠한 무덤’(마23:27)입니다. 보기에는 99.999가 적힌 골드바, 참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해도 실제는 아닌 것입니다. 위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농도와 성분이 미달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라’(마7:21).
한국 유리 설립자, 故 최태섭 장로
한국유리(現 한글라스)의 대표였던 故 최태섭 장로의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그는 625전쟁 전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은행에 돈을 빌렸다고 합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난리 통에 사업을 접고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은행에 빌린 돈이 있어 피난 떠나기 전에 빌린 돈을 갚고자 은행을 방문했습니다. 은행도 전쟁으로 정상 영업이 불가능했고, 모든 직원이 피난을 하고 마지막 남은 직원이 잔무를 처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직원에게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으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하는 말이 "이 난리통에 빌린 돈을 다들 떼 먹고 도망가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처리할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젊은 최태섭 장로는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올 기약이 없고, 다시 갚을 수 있을 지도 모르기에 갚고 가겠다"고 했고 기여코 그 직원에게 빚을 갚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사업을 위해 은행에 방문했습니다. 그 때 자신이 전쟁 중에 빚 갚고 간 신뢰의 사람으로 이미 은행에 소문 나 있었습니다. 은행장은 그를 보자 아무런 조건 없이 큰 돈을 대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돈은 한글라스(舊, 한국 유리)라는 한국 최초의 판유리 국산화의 이룩한 유리 공업회사를 설립하는 종자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정직은 숨길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제였습니다. 전쟁 통에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때에도 그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 안에 사업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업장에서 탈세와 허위 고용과 유령 직원을 두고 돈을 법니다. 임금을 체불합니다. 그 돈으로 십일조와 감사와 주일 헌금을 합니다. 그들 속에 진정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과 하늘의 중보자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연약하고 갈등하고 어리석고 실족하고 유혹 받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잠재적으로 미움 받은 것을 싫어하고, 고통을 싫어하고, 손해를 싫어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웃음에 목말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기 보다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속이고 감추려고 하는 육신의 본성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결단하였다면 이 모든 것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마6:13)라고 기도하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결단하고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회심한 삶을 살아가기에 대단히 부적당한 환경에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수 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아무리 양심적이고, 선하고, 인자하고, 계획적이고, 부지런하며, 학식이 뛰어나고,명예가 있고,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결혼식이나 장례식, 아니면 병상에서 필요한 것일 뿐 일상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어쩌면 낙심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들로부터 오는 비웃음과 조소, 희롱과 무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혼자만 그들 속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혼자 있게 되는 소외감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그런 모든 감정을 싫어합니다. 비웃음, 조소, 희롱, 무시 받은 것, 소외감 등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을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잠언 29장 25절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느니라'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사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께 변호해 주시고 중보해 주시는 전지전능한 친구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매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가 믿는 신앙을 삶을 통해 확실하게 나타내며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