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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춘대학교(남녀공학) 원문보기 글쓴이: 하니
발표 당시 ‘미술사에서 비웃음과 야유를 가장 많이 받은 작품’ 이라는 평을 받은 마네의 ‘올랭피아’ 입니다. 뭔가 좀 특이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으신지요? 마네는 프랑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법학을 전공하고자 하였지만 화가가 되었습니다. 마네는 본인이 혁명가도 예술가이거나 사교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올랭피아’ 때문에 인상주의를 선도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의 작품은 Vecellio Tiziano(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란 작품인데 마네의 [올랭피아]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다. 마네의 ‘올랭피아’ 나 ‘풀밭 위의 식사’가 당시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을 그린 기법과 모델 때문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인물을 그릴 때는 얼굴에도 밝고 어둠이 있었습니다. 코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서서히 밝아 지는 기법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람을 볼 때, 특히 밝은 햇빛 아래에서 얼굴을 보면 얼굴 전체가 환하게 보이지 밝고 어두운 곳이 정확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마네는 이 생각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겼는데, 당시의 많은 관객들에게는 낯선 그림이었습니다. 또 그 때까지의 누드화는 대개 신화에서 주제를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 했지만 마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은 실제 매춘부였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올랭피아’가 출품 되던 해에 같이 출품된 작품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묘사나 분위기로 본다면 이 작품이 오히려 더 ‘야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시의 기법이나 주제에 충실했기 때문에 호평을 받았고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 작품을 구입합니다.
아래의 작품인데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그 다음은 ‘올랭피아’의 모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불만입니다. ‘ 올랭피아’ 모델의 머리 장식, 고양이, 손님이 전해 준 꽃다발을 들도 있는 흑인 하녀등을 볼 때 모델의 직업은 매춘부였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또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당시 매춘부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뒤마의 소설 ‘춘희’에 나오는 매춘부의 이름도 올랭피아 였습니다. 그런데 ‘올랭피아’의 실제 모델은 ‘빅토린 무랑’ 이라는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서 한 가운데 누드로 있는 여자의 모델도 했는데 당시 여러 화가들이 즐겨 찾던 모델이자 포르노 사진의 모델로도 활약했던 실제 매춘부였다고 합니다.
'풀밭 위의 식사'에 나오는 빅토린 뫼랑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빅토린 뫼랑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화가였고 1876년 마네의 작품은 살롱에서 낙선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정식으로 전시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마네는 본의 아니게 비난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지만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새로운 파격에 환호를 보내고 그의 주위에 모여들게 됩니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이 세잔, 드가, 피사로, 모네 등이었고 이들은 당시 ‘마네 일당’으로 불립니다. 훗날 이들은 미술사에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어쨌거나 마네는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자기 식으로 해석 해서 그린 작품으로 곤욕을 치룹니다.
잠시 두 개의 그림을 나란히 비교해보겠습니다.
모델의 전체적인 자세는 같습니다. ‘ 우르비노의 비너스’ 발 아래에 있는 귀여운 개를 불길해 보이는 검은 고양이로 바꾸고 꽃 다발을 든 흑인 하녀를 추가 했으며 비너스 대신 매춘부인 박토르 무랑을 넣었습니다. ‘ 올랭피아’의 모델 얼굴은 비너스의 나른하고 육감적인 얼굴에 비해 딱딱하게 굳어있고 몸의 가운데에 위치한 손은 비너스의 손이 부끄러운 듯 위치하고 있는 손에 비해 도발적이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흑인 하녀를 뒤에 배치 함으로써 모델의 흰 피부를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뭔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검은 고양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 고양이입니다.
불룩 솟은 등과 꼬리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이전 여러 여성 누드에도 종종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여성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는 강아지가 더 많았습니다. 끝으로 ‘올랭피아’는 발표 당시 관객들이 이 작품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작품을 훼손하고자 하여 경비 두 명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시회가 끝나고는 가장 높은 곳에 그림을 걸어 두었는데 당시 평론가의 글에는 ‘ 사람들은 시체를구경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썩어 빠진 마네의 ‘올랭피아’를 보러 온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1889년 ‘올랭피아’가 미국인 수집가에게 팔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모네는 공개적으로 기부금을 거두어서 이 작품을 사 들인 다음 국가에 기증하고 1907년 루부르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진가를 인정 받은 것입니다. 때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지만 개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마네는 52살이 되던 1883년, 다리 절단 수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