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국 국회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신성한 곳으로서
회 회의를 거처 민의를 바로 세우고
의 의사봉을 뚜드릴땐 신중에 신중을 기해 뚜드리고
사 사적인 이해득실이 가미되어서는 안되며
당 당리당략에 치우친 결정은 금기되어야 한다.
'당'
*국회의사당National Assembly , 國會議事堂
본회의장과 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하여 국회기관인 의장실·부의장실·교섭단체실과 소속기관인 국회사무처·국회도서관 및 부속시설인 의장공관·의원회관 등의 건물을 말한다.
현재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있다. 여의도를 횡단하는 너비 200m의 5·16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뚫린 도로를 통해 마주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어서 조형과 규모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서 볼 때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를 세워 건축되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대립된 다양한 의견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열주에 받쳐져 처마가 있고, 그 위에는 밑지름 64m의 돔이 있어 지붕을 이룬다.
돔은 원만한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상징한 것으로 건물에 안정감과 웅장미를 더하여준다. 총 대지면적은 33만㎡(10만평)이고,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한층의 높이는 5.2∼6.5m) 지반에서 기단면까지는 5.44m, 기단면에서 돔 상단까지는 63.75m, 연건평은 8만 1444㎡ (2만 4680평)이다.
의사당은 국회양원제의 실시에 대비하여 두 개의 대형 회의장이 있는데, 현재의 본회의장은 민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950㎡(288평)이며, 의석은 이동식으로 4백석까지 확장이 가능하고 방청석은 350석, 기자석은 80석이다.
한편, 현재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회의실은 참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의석 1백석, 방청석 250석, 기자석 40석이다.
양원 본회의장은 사방 40m인 ‘로턴다 홀’의 좌우 양측에 위치하고 홀의 천장 돔까지 장쾌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의사당 전체의 구심적 대공간을 형성한다.
홀의 네 귀에는 좌대가 놓여서 장차 국가의 중흥에 기여한 지도자의 동상을 건립할 수 있도록 했다. 홀의 대리석바닥, 각층 발코니의 난간, 그릴 등은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문양 중에서 전아(典雅: 사물이 격에 맞아 고상하고 우아하다)한 고유의 문양을 현대화한 도안으로 되어 있다.
바닥은 신라의 와당문양 중에서 길하다는 무늬를 사용하여 전국행정구역을 나타낸 도안으로서 단합을 상징하며, 석굴암 천장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높고 길게 굽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천장)의 모양을 응용하여 주위를 깔고 외부선에는 조선시대의 내부장식에 많이 쓰인 띠문을 현대식으로 장식하였고, 난간은 근정전 꽃살무늬 창구를 현대식으로 표현하였다.
홀은 필요에 따라 옥내행사나 기념축연 등에 사용할 수 있는 크기로 하였으며, 의원식당과 로비로 통한다. 본회의장의 의석배치는 의장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하고 의장단 오른쪽에는 의석과 나란히 국무위원석이 있다.
한편, 부속건물과 시설로서 의장공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서 건물 높이 7.8m, 연건평 1,264㎡(383평)이다.
의원회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도로 건너편 왼쪽에 건립된 아파트 5동을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각 동 모두 5층으로 연건평 6,725㎡(2,038평)이다. 기타 부속건물로 경비대 건물과 차량정비고·온실이 있다.
경비대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건평 1,495㎡(453평)이고, 차량정비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건평 1,043㎡ (316평)이며, 온실은 241㎡(73평)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은 처음 제헌국회가 개원된 1948년 5월 31일부터 1950년 6월 27일까지는 서울 세종로 중앙청 중앙홀이 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으로 남하한 국회는 임시수도였던 대구에서 문화극장을 임시의사당으로 사용하여 이곳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8월 17일까지 임시회를 개최하였다.
전세가 악화되어 정부와 함께 부산으로 이동한 국회는 그 해 10월 6일까지 부산시 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정부가 서울로 귀환하자 국회도 다시 중앙청 중앙홀을 그 해 11월 26일까지 사용하다가, 12월 8일부터 1951년 1월 3일까지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1·4후퇴로 정부가 다시 부산으로 남하하자 국회는 1951년 1월 4일부터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6월 27일부터는 경상남도청 무덕전을 1953년 8월의 서울 환도 때까지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국회는 1953년 9월 27일부터 1954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중앙청 중앙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제3대 국회가 개원한 1954년 6월 9일부터 1975년 9월까지 다시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양원제가 실시된 제5대국회 때 참의원은 서울 시청 뒤 대한공론사를 의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75년 8월 15일에 현재의 여의도 의사당이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의사당 건물은 1968년 제7대 국회에서 의사당 부지를 선정한 뒤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졌다.
공사기간 6년 동안의 총공사비는 135억 원으로 시멘트 64만 부대, 벽돌 850만 장이 들었으며, 연인원 1백만 명이 투입된 대역사로 이루어졌다.
현재 국회의원 이외에 의원보좌관·비서·사무처직원 등 2,200여 명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국회의사당은 잘 정리된 주위의 조경과 회색의 화강석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매년 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