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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시 들여다보기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봄이 곧 올 것이다. 어김없이 이 시기가 되면 오지 않을 것 같은 시 원고가 날아온다. 메일이라는 수단이 생겨 이제는 아무 때나 원고를 전달받을 수 있어 내심 기다리고 있다는 심증일 것이다. 메일을 보내는 행위 정도는 육체노동처럼 힘든 것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정신적인 집중이 있을 뿐이다. 시도 그렇다고 봐야 한다. 힘든 노동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집중으로 야기되는 극심한 피로가 육체노동을 대체한다. 시인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밤을 지새워야 한다. 도무지 미궁 속처럼 가망 없던 시가 산고를 거쳐 완성이 되곤 한다. 신기한 일이다. 밤을 새워 풀잎에 영롱한 이슬이 맺히듯 시가 만들어지다니, 시를 통해 시인이라는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이다. 시인이 낳은 시 속에는 시간과 공간을 문자라는 기호로 치환해내는 치열한 흔적들이 배태되어 있다. 산고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면을 통해 내보인 순간부터 시의 소유권은 시를 쓴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이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독자를 찾아가는 일을 서슴지 않고 호불호에 따라 시의 존재도 판가름 난다. 여기 열 분의 시인들(문지아, 박봉철, 박위훈, 서지숙, 신화정, 윤혜련, 이윤희, 임승현, 전표건, 채동선)이 쓴 시는《문예감성》봄 호라는 실재 공간에서 존재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다. 결국 시인은 시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시에 내재된 정서도 개개의 삶이 다르듯 관점과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이번 발표된 시들을 보면 충만한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 봄에 덧댄 시편들이 삶과 밀착되어 사유한 시적 경향으로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
종일
콘크리트 속을
밀려다닌
등 처진 고등어
굽은 등은
삶에
질려 푸른 것일까
밟혀 멍든 것일까
내일도 또 내일도
또 기어 나오는
파란 정장의 고등어
-(문지아, <고등어> 부분)
이 시가 갖는 의미를 통해 시어에 대한 단초를 알 수 있다. 흔히들 시는 우리의 일상일뿐더러 그 범주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흔하게 식탁에 오른 ‘고등어’가 식용으로 소비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적 환기를 넘어 현대인의 고단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어부의 그물에 갇힌 ‘고등어’는 그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필사의 고투를 벌였을 것이다. 고등어가 맞닥뜨린 죽느냐 사느냐의 위급한 순간처럼 매일을 긴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현대인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고등어의 모습이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투사된다. 사실 ‘고등어’는 시인들이 즐겨 쓰는 시어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마지막 “내일도 또 내일도/ 또 기어 나오는/ 파란 정장의 고등어”로 형상화한 시인만의 변별성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주름 마디마디 닳아가는
극열한 바닥의 모퉁이에서
바깥의 그늘이길 자청하면서 길게 이어졌다
겅중겅중 달려가는 선과 면을 펼치고
고단한 멧부리에
묵묵히 가장자리까지 뿌리를 내리며
돌부리에 꺾였다가 다시 샛길을 캐어낸다
생의 폐부 깊숙이 뻗어가는 그늘의 시간
손의 음영을 기울이는 경계를 칭한다
마디마디 이어가던 흔적의 단상들
省筆 한 켠이 천 길을 내고 있다
-(박봉철, <손의 계보> 부분)
‘손의 계보’를 읽으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들에 밑줄을 그어본다. 박봉철 시인의 생각이 그렇다면 함께 수긍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회상을 통해 떠올려지는 애틋함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강렬한 삶의 근원이 된다. 박봉철 시인의 시가 바다의 수면을 밀치고 올라오는 작은 물고기처럼 연민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손의 안쪽에 못이 박힌”이라고 한 첫 행에서 이미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내력을 예감하게 한다. 그런 세월이 더해져 “나날이 잦아드는 굴고도 가는 실선과 점선”을 통해 쇠약해져 가는 인생의 유한함을 은연중 암시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시적 화자는 아직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안타까운 마음에 과거 속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늦출 수가 없다. “생의 고단한 철필로 새겨진 모친의 문장”은 진행형의 문장이어서 가슴에서 멈출 수 없다. 그 몫은 시인이 이어가야 할 업보이기도 한 인생의 계보인 것이다.
누가 저 애면글면한 풍경에 방점을 찍는다 해도
다만, 어미의 어미의 길을 쫓을 뿐
떡국, 풀국, 박국도 다 울음이어라
마른기침이 보리까끄라기처럼 버석거리던
보리누름께 당신,
곤비로 지핀 숨이 내내 홧홧했다
-(박위훈, <봄밤> 부분)
요즘의 시속에는 진정한 삶보다 문장만이 난무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시의 외형에 치중한 화려한 감각적 기교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시의 내재된 울림보다 시어의 화려함이나 수사적 언사에 능한 시들이 유행처럼 보편화되고 이에 편승한 부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반면 박위훈의 시 두 편에 내재된 정서는 삶의 체화가 단단함을 보여준다. <봄밤>은 소란해진 자연의 혼란을 야기한 계절의 변화처럼 이면에 내재된 인간적 욕망과 갈등을 잘 보여준다. 세월이 흐른 만큼의 시적 정서는 깊어지는 법 “세상의 귀란 귀는 다 닫아걸고/ 나를 들어줄 눈은 먼데다 두고 왔다”라며 세상의 변화에도 이제는 둔감해진 연륜을 말해준다. 둔감해진 심상을 파고드는 짠한 아픔 같은 심연 속 ‘뻐꾸기도 제 울음 한껏 불어재꼈던 그때’를 떠올리며 ‘애끓는 탁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뻐꾸기의 고약하여 특별한 습성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던 ‘탁란’을 통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고단한 희생을 깨달은 것이다. “떡국, 풀국, 박국도 다 울음이어라/ 마른기침이 보리까끄라기처럼 버석거리던/ 보리누름께 당신,/ 곤비로 지핀 숨이 내내 홧홧했다”라며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 속 ‘어머니를 떠 올렸을 것이다. 애면글면한 ‘봄밤’을 통해 삶 깊숙이 자리했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뇌가 짙다.
해풍이 거친 날에는
심하게 어지럼을 타는 바위섬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는 외포리 해물전 여인네들
서리 내린 반백의 머리에 분홍색 챙 모자를 쓰고
그래도 이 손으로 따개비 같은 자식들 잘 키웠노라고
자글자글 웃는 손 주름들이 외지 손님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흥정을 하는 곳
외포리에서는 바다 값을 깎지 말자
살가운 바다이야기 들려주는 갈매기와
덤으로 주는 아름다운 낙조가 있기에
-(서지숙, <외포리에서> 부분)
시적 풍경 속 강화도 ‘외포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찾아간 것은 아닐 것이다. 아슴아슴 생의 색깔들이 풍경 속에 지워졌다 다시 살아나는 포구의 바닷가 장터 속 풍경이 시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시적 충동의 전형은 심상적 이미지의 교차와 굴절로 파동한 전율에서 전이된다. 그것은 마치 강화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거듭하며 장터의 활력으로 변주되듯 시인의 가슴에 묶인 닻을 풀게 했을 것이다. 어느 바닷가와 다르지 않은 그곳에도 밀물의 크기만큼 요동치는 삶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 안에서 울고 웃는 고단한 삶의 일상이지만, 가족(사랑)을 위한 믿음을 희망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지숙 시인의 시선은 “늦봄, 비릿한 해 그림자를 되작이는 짠한 이력들이 보인다”며 “자글자글 웃는 손 주름” 깊은 외포리 바닷가‘여인네’들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시라는 형식을 통해 진술한 시인의 시적 위로는 고된 일상을 탓하지 않는 그분들을 향하고 있다. 그 ‘여인네’들은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을 지난 이슬이 찬바람을 게워내며 싹을 틔운다
계절을 돌아 찾아온 해를 본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이 봄을 기다렸지
겨울을 오래 앓고
나는 안개처럼 내려앉은 깊은숨을 들이마셔
파랗게 얼어붙은 꽃잎 속에서 잠들지 못할 이유를 찾아낸다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온도를 지켜주는 노란 동백꽃들
그 속에 밤이 끼어들 자리가 없구나
나의 낡은 무릎에 그리다 만 줄기가 남았다
겨울옷을 벗어야 할 시간
-(신화정, <백야의 꽃> 부분)
새벽은 시간을 경계로 하루를 맞이하는 첨병이다. 계절을 통해 조심스럽게 본색을 드러낸 것이 자연의 변화라면 탐색을 나선 척후병은 차가운 땅을 헤집고 나온 새싹들이다. 시인은 새벽을 통해 발아한 새싹을 보았고 계절을 경과한 시간 앞에 무기력하게 말라 떨어진 나뭇잎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맞이한 ‘겨울’ 속 동면의 시간에도 파랗게 얼어붙은 동백 꽃잎을 보며 생명의 끈질긴 근성에 천착하게 된다. 그런 변화의 천이遷移를 통해 계절이 바뀐다 해도 결코 순조롭게 전환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시적 대상으로 다가온 ‘노란 동백’은 봄이라는 계절의 형용으로 투영된다. 아름답게 핀 ‘노란 동백꽃’ 모양처럼 아픔 없이 그냥 핀 것이 아니라 과거 시간 속 절정만큼 고통의 긴 여정을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절정’의 만개처럼 결말은 쇠락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겨울을 오래 앓”아야 한다. 그에 따른 필연적 고통을 반복해 감당해야 한다. 계절의 변화가 그렇듯이 시도 삶이라는 심연을 극복해야만 온전한 결실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노란 동백꽃’은 실재한 꽃이 아니라면 노랗게 핀 ‘생강나무 꽃’을 일컫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청춘
그 빛나는
이 세상 잠든 영혼은
바람이 흔들어 깨운다는 기타 소리
골목 벽화에서 통기타를 매고 걸어 나오는 김광석
가락과 음표들도 흘러나왔다
한때 나무였던 기타, 기타리스트는
주술처럼 다시 나무의 영혼을 불러내
함께 울어주는 사람
조명등을 휘감은 은행나무가
가지 끝에 잭을 꽂고 반짝이고 있었다
지나간 것은 그립고
그리운 것은 추억이 되는 김광석 거리
지금쯤 어느 별자리를 스치는 것일까
마음을 치는 소리 들린다
-(윤혜련, <기타리스트> 부분)
시가 소리가 되는 순간이다. ‘기타’를 구조하고 있는 ‘현’의 소리는 연주자의 감성에 따라 발성이 달라지기 때문,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즉 분위기에 따라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도 그와 다르지 않다. 시라는 문장이 시간의 흐름과 같이 사라져 버린다면 시를 쓸 이유가 없다. 그 말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심금을 울려줘야 한다는 변별성에 대한 문장의 진동(진폭)을 일컫는 것이다. 시인은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거리’를 걷고 있다. 때마침 김광석의 노래 속 기타 소리에 붙잡힌 발길까지 들떴을 것이다. 육성과 어우러진 기타의 음색이 묘하게 얽혀 절절하게 가슴을 두드렸을 것이다. 무명의 기타 연주자가 혼신으로 ‘현’을 어루만져 울려 내는 소리를 들으며 인간과 기타의 유기적 상관성相關性을 깨닫게 된다. “한때 나무였던 기타, 기타리스트는/ 주술처럼 다시 나무의 영혼을 불러내/ 함께 울어주는 사람”으로 일체를 이룬다.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심미적 감상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시적 충동으로 진전시킨 결과다. “지금쯤 어느 별자리를 스치는 것일까/ 마음을 치는 소리 들린다”며 서정 깊은 여운을 시적으로 환기시켜준다. 1990년대의 사회 현실이 담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통해 깊숙이 내재된 민중들의 고뇌에 찬 시대 의식까지 공감할 수 있었다.
엄마 고양이가 우는 고양이의
등을 물고
사라지는 저녁
딸은 엄마 팔자(八字)를 닮는다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온
그 세계에서
엄마의 팔자(八字)를 나누어 가졌다는,
그것은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일이다
그러므로
난 더 새로운 울음으로
그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윤희, <조금씩 깊어진다는 것은> 부분)
이윤희 시인의 시 속 도입부 “엄마 고양이가 우는 고양이의/ 등을 물고/ 사라지는 저녁”은 혈연적 의미로 환기된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혈연에 대한 의식도 많이 느슨해졌다. 요즘 당연시되는 사회 풍토를 친연성親緣性에 근거한 존재론적 의미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시다. 새끼 고양이의 등을 물고 가는 어미의 행동은 혈연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거의 본능에 가깝다. 문제는 “딸은 엄마 팔자(八字)를 닮는다고” 말한 시인의 의식에 있다. 유전학적遺傳學的인 제제製劑로 본다면, 외모나 체질은 닮지만, 삶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도 안다. 다만,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 생존 환경의 답습을 강요한 것으로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삶을 닮지 않겠다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 새끼 고양이가 시적 화자라는 것을 알게 한다. 성장기 기억 속 특정한 기억된 상처가 지금껏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을 잠재우려고 목 넘김을 한 “약봉지를 들고 불을 켜는/ 흰 눈이 호수 위에 스며드는/ 그 아득한 식후 30분”은 지금껏 가져온 부정적인 인식에 대한 반성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조금씩 깊어진다는 것은’에 삶에 대한 긍정이며 의식의 전환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때로는 기억에 대한 의식의 퇴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 왼손 검지에 봉 없는 무덤의
쓰러져 누워있는 비석 같은 검은 상처는
내가 고아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누나는 심심하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한강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놀리며
방으로 도망쳐 문고리를 걸었다
-(임승현, <한강 다리에서 주어온 아이> 부분)
소싯적 누구나 한 번쯤은 듣고 자란 말이 있다. ‘다리 아래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부모나 주변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리는 단골 메뉴다. 어린 시절 시인도 그 말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 우스갯소리를 요즘 아이들한테 한다 해도 걱정할 것도 안되는 영악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순수했던 시절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도 서울의 ‘한강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 치면 호사한 족보다. 필자가 서울이란 도시를 구경한 것은 중학교 시절에나 가능했고 그 이후에도 머나먼 나라로 여겨왔다. 그 우스갯소리가 빌미가 되어 몸에 난 상처가 구실이 되어 되레 피붙이를 확인하는 징표가 되어준 셈이다. 나이 지긋해져 돌이켜 보니 ‘누나’와의 추억은 애절하다. “내 동생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라는/ 누나의 울부짖음은 폭포소리가 되어 보름 만에 나를 깨워”낸 누나의 간절한 온정이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피붙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지극 함이다. 밤 깊어 산정에서 울려오는 ‘새끼 사슴’이 애타게 울부짖는 것마저 귓속으로 파고드는데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피붙이에 대한 간절함이 깊어 더 그렇다.
그대 몸에 흠뻑 배인 효험을 알고서야
통째로 내 몸안에 옮겨 소중히 안으니
용감히 싸워 이겨내는 힘을
한가득 쟁이고파
아릿다운 봄처녀 호미 들고
마중나온 나를 본 길바닥 길손은
피식피식 비웃더니만
재빼기 고개턱 너머로 꼬리 감추네
-(전표건, <질경이> 부분)
“흔들리는 마음 다잡아/ 에멜무지로 봄볕에 나 앉았지만/ 세상살이 결코 헛되지 아니한 것인데”에서 ‘에멜무지로’란 시어가눈길을 끌었다. 사전적 의미는 ‘결과를 꼭 바라지 않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란 뜻이다. 시적 대상인 ‘질경이’를 통해 투영된 험난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 대상은 척박한 땅에서 어김없이 돋아나 끈질기게 살아남은 ‘질경이’의 형상과 같다. ‘질경이’를 통해 되살아난 과거의 기억은 고단 함이었을 것이다. 시에서도 충분히 그런 정황을 말해주듯 “그옛날 냅다 욕먹으며 갔다버린 쓰라린/ 천덕꾸러기 고난의 버림받은 그의 삶”으로 투사透寫된다. 그런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견뎌낸 지금은 여러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그대 몸에 흠뻑 배인 효험”이 있는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질경이’이다. 전표건 시인이 천착한 ‘질경이’의 존재적 가치가 시적으로 온전하게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물을 중심적 가치로 바라보려 했다면, 시적 의미와 표현 구조에서 문장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겁 없이 직진한 놈
가차 없이 딱지 끊고
멋대로 회전한 놈
현장에서 즉결처분
엿장수 마음대로인
귀농인의 가위질
-(채동선, <가지치기> 전문)
가지치기는 나무에 대한 질서를 인위적인 힘으로 통제하는 수단이다. 결국은 자연 질서에 위반하는 행위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방편임을 알 수 있다. 자연 속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켜 활용하려는 욕망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흔히들 데카르트적 사고에 기인한 물질 우선주의에서 기인한다. 채동선 시인의 ‘가지치기’라는 시의 경제성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간략하게 3연으로 구분된 시행도 엄격한 법률적 위반 사항에 대한 처벌을 경고하듯 힘의 논리가 개입된 강제성을 내포한다. 어차피 귀농인도 먹고사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어서 낭만적으로만 자연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엿장수 마음대로인/ 귀농인의 가위질”도 어쩔 수 없는 소비자 물가 지수에 연동된 소비 구조에서 약자인 셈이다. 다만 나무들은 그것을 모를 뿐이고 스스로 상처의 치유하기를 마다치 않는다. 상처는 화폐적 가치만큼 반복될 것이고 수혜는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만 시의 문장은 언어의 경제성보다 시가 가져야 할 근원을 중시한다는 것에 있다.
살펴본 대로 일상에 대한 소소로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시적 감수성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것은 시의 건강성을 담보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공기를 통해 자유로운 호흡 활동이 이루어지듯 생활의 중심에서 바라본 시적 세계가 저마다의 개성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상의 범주에서 치환될 시적 대상은 잊기 쉬운 지점의 좌표가 될 수도 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지점에다 좌표를 찍는 작업을 또 한 번 마친 것이다.
첫댓글 수고했네. 용광로 같은 그 열정에 박수!!
고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