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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의 침입과 길르앗 땅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은 암몬에 의해서 이미 18년간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삿10:8). 이는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로 보면 부분적인 억압이었습니다. 하지만 암몬이 요단강 서편 지역까지 침입해서 옴으로서 이스라엘 전체가 어려움에 겪게 됩니다. 암몬은 "왜 길르앗 지역을 넘어 요단강 서편까지 침입했나요?" 그것은 길르앗 지역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암몬은 길르앗 지역을 억압하기는 했으나, 자기 영토로 아직 만들진 못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토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암몬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와의 확전을 통해서 제압한 후 길르앗 지역의 영토를 자신의 것으로 확증하기 원했습니다(마치 돈바스나 크림 지역처럼).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을 침입했고 이로 이스라엘은 곤고가 심했습니다.
성경은 이 고난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목적에서 우상 숭배와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3백 년 동안 살며, 그들과 동화되었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고 회개합니다(삿10:10). 하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하나님은 분노와 섭섭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만, 습관적으로 우상에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의 악행을 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또 말로만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파괴하는 결단과 실천을 보입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고 결단입니다. 변화입니다. 그 회개를 보고 하나님은 근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곤고를 보시고 마음에 염려하십니다. 하나님은 범죄를 징계하시나, 그 고난을 즐기는 분이 아니라 근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는 회개하고 변화되면 언제나 심판을 철회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니느웨의 구원처럼.. 말입니다.
길르앗 지역은 원래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통과해야만 하는 땅이었습니다. 에돔, 모압, 암몬 모두가 자기 땅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민족들의 땅을 비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근데 아모리 왕들은 땅의 통과를 허락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죽이려 달려 들었습니다. 그로 전쟁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그들의 땅을 어부지리로 얻게 됩니다. 이 땅이 바로 길르앗 지역으며, 그 땅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3백 년 동안 거주하게 됩니다. 근데 암몬 왕이 이 땅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면서 빼앗으려고 합니다. 지난 300년 동안 이스라엘 지파가 살고 있는 터전을 갑자기 내 놓으라는 것이지요.
입다의 거래 신앙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길르앗 지역에서 군대가 조직됩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그동안은 지파들이 연합하여 전쟁을 했는데, 이번 암몬과의 전쟁에서는 길르앗 지역에 있는 두 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만으로 조직이 됩니다. 다른 지파들은 돕지 않고 관망 중입니다. 입다 시대에는 지파들의 연합이 느슨해졌고, 지파 간의 형제애가 약화되고 서로에 대해 분열되고 경쟁적인 시대였습니다.
더욱이 길르앗 주민들에겐 전쟁의 장군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을 선출하려는 계획은 세웁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입니다. 용사란 싸움에 있어 지도력, 통솔력을 인정받은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입다는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나은 첩의 아들입니다. 그 이유로 가문과 형제들에게서 버림 받고 쫓겨난 사람입니다. 그 후 길르앗 동쪽 돕이라는 땅에 가서 살게 되는데, 당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잡류들이 그에게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는 우두머리가 되어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마치 아둘람 굴에 있던 다윗에게 환란당한 자들이 모여들 듯이 말입니다.(삼상22:1~2)
길르앗 주민들은 입다를 설득해서 암몬 전쟁의 지휘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입다는 자신을 내쫓은 길르앗 장로들의 요청을 처음 거부하나, 승리하면 지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미스바로 와서 장관이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공식적인 예식을 치르지요.(11절)
입다는 먼저 암몬 왕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외교적으로 '왜 침략해 왔는지?'를 묻습니다. 암몬 왕은 길르앗 지역이 자기 땅이기에 평화롭게 돌려달라고 합니다. 평화롭게 달라 하지만 사실은 군대를 동원한 협박인 것이지요. 입다는 다시 사신을 암몬 왕에게 보냅니다. 암몬 왕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통해서 입다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호와 신앙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의 편지에는 역사적으로 길르앗 땅은 여호와께서 아모리 왕들에게서 빼앗아 주신 자기 선조들의 정당한 영토이며, 그 땅의 소유는 암몬의 땅이 아니라 아모리였으며, 그리고 3 백년 동안 유대민족이 실효적으로 지배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암몬 왕의 침략은 불의한 것이고 이 전쟁에 대한 명분이 없음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삿11:28)
이런 외교적 노력이 실패한 후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을 사사로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은 입다가 지금까지 한 동네 싸움 수준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큰 전쟁이었습니다. 입다의 군대는 예비군이라면, 암몬은 정규군입니다. 아무리 용사 입다라고해도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한 에브라임 지파에게 지원병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습니다.
암몬과의 전쟁하러 가는 길에 그는 갑자기 서원을 합니다. 이 서원은 경솔했고 하지 말아야 하는 서원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승리 간구를 위한 일종의 거래 같은 서원이었습니다. 암몬과 전쟁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담보로 걸고 서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라며 불신앙으로 경솔하게 서원했고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삿11장)
입다는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서원 때문이 아닙니다. 거래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곤고를 근심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쓰임받은 종임에도 자신이 전쟁의 주최인양 자의적으로 여호와께 서원을 했습니다. 당연히 여호와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에 쫓긴 신앙은 항상 실수를 하게 합니다. 은혜는 받는 것이지, 갚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부어주실 때는 잠잠히 감사와 찬양, 그리고 순종으로 누리면 됩니다.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보답하려다보면 실수를 자아냅니다.
제 아들이 2살 정도 되었을 때에, 교회에서 크게 다친 적이 있습니다. 주일 점심시간에 식탁이 넘어졌는데 그 식탁 사이를 기어가던 아들 뒤통수와 목이 아주 세게 가격당한 것이지요. 주변에서 목격한 성도들이 아주 크게 다쳤을 것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곧장 아내는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으로 아들과 갔고, 저는 그날 오후 설교자였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예배를 마쳐야 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택시를 타고 곧장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서 검사를 마치고 목 지지대를 한 아들이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검사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내가 아이가 응급실에 갈 때 너무 무섭고 다급한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살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저는 그 기도를 철회하자고 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거래로 한 서원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위기 가운데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 해 주시면.. 제가 저것을 하겠나이다”라는 식의 기도를 합니다. 어느정도 유익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거래가 되고 스스로의 올무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너 이것 하면, 내가 저거 해줄게!’ 라고 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 자녀들을 돕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세상의 우상은 '무엇을 하면 해 주는 거래의 우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에게 굿하고, 삼 천배 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아버지를 신뢰하기 보다는 아버지와 거래했습니다. 그로 인해 응답과 은혜가 도리어 슬픔과 고통이 되게 스스로 자초합니다.
입다 딸의 믿음과 부활신앙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금의환향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길르앗 변방 돕의 잡류에서, 길르앗의 정치 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입다에게는 무남독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 입다의 전쟁 승리 소식을 듣고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얼마나 그 딸의 마음이 기뻤을까요? 입다도 이젠 길르앗의 지도자요 사사로서 무남독녀 딸을 위해서 모든 부귀영화를 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입다의 서원이 문제였습니다. 딸이 문 앞에 나와 소고치면 기뻐 아버지를 기다린 것이, 입다의 서원으로 인해 딸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가증히 여기고 미워하십니다.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은 인신 제사를 통해서라도 우상에게 자신의 간절함과 진정성을 보이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가장 미워하시며 금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암몬의 침입을 허락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입다는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서약을 했습니다.
암몬 왕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명쾌하게 말하던 입다지만, 그 말씀 속에 있는 진리이신 여호와의 뜻은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명쾌히 박식하게 알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이렇게 참담한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으로 심령까지 맑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만 배우고 훈련해야만 합니다. 영적 게으름은 악마에게 열려있는 문입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나 입다처럼 실수를 하게 됩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삿11:35)
입다는 문 앞에서 딸을 보고 ‘참담하다’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그의 무모한 '서원을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기록되 듯 철회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더 참담한 모습이었습니다.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했기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입다의 인신제자의 서원을 정녕 기뻐하셨을까요? 만약 그가 이 서원을 철회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물리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서원은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서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서원입니다. 인신제사는 암몬 자손이 그들의 신, 몰렉에게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른 철회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헛된 자기 의와 신념으로 철회를 거부함으로 딸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서원이 공개적인 것이어서 그가 체면과 명예와 지도력의 상실을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인신 제사를 암묵적으로 동조한 길르앗의 장로들과 백성의 태도는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주변 우상에 동화되어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우상숭배 요소가 있는지 분별하여 제거치 않으면 실수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이삭에게 손도 못 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삭처럼 그 딸을 구원하지 않으셨을까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그 때도..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그 순간에도, 또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는 그 밤에도.. 하나님은 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에게 듣지 않고 하는 모든 선택과 행실은 자기의 책임입니다.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져야합니다. 우리는 매사에 여호와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진지하게 숙고해야 합니다.
입다는 경솔한 서원을 한 반면 그의 딸은 신중한 결단을 합니다.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삿11)
딸은 아버지를 먼저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말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셨다..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드립니다. 대신 2개월 동안 애곡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녀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드립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도 않고, 원망하거나 한탄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이 처녀임을 슬퍼합니다. 결혼은 후손을 잇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입다의 딸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과 닮아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입다 딸의 사건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면 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죽음은 비록 이 땅의 이별과 끝이지만, 영원한 천국의 시작이며 탄생입니다. 영생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입다의 딸이 보여줍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입다의 딸처럼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그녀는 죽지만 다시 삽니다. 그리고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모두가 부활할 줄 믿습니다. 입다의 딸은 부활을 믿는 자였습니다. 사사 중 자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인물은 없습니다. 오직 입다의 딸만이 기록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입다 딸이 부활신앙을 가진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12지파의 분열과 민족의 비극
전쟁이 끝났습니다. 길르앗 지역은 이제 평화가 찾아오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12지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이 있던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와 길르앗 주민에게 트집을 잡습니다. 그들의 트집은 암몬 자손과 전쟁에서 길르앗과 입다가 자신들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과거 기드온 때도 이런 행패를 부린 전적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입다의 승리로 지파 내의 주도권을 놓칠가 염려했고, 더욱이 요단 동편 지역의 지파들이 자기에게서 나온 자들이라 열등하게 여겼습니다. 이로 에브라임과 다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사사 시대 는 12지파가 여호와 신앙으로 하나되기 보다 우상 숭배와 타락, 경쟁, 비교 우월의식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형제라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2:2)가 되지 않으면 원수보다 더 못한 관계가 되고 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에브라임의 교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전쟁은 입다와 길르앗의 승리였습니다. 에브라임을 도망치기에 급급했습니다. 요단강 나루터에서 대대적인 형제간의 학살이 일어납니다. 모두 한 조상의 형제라 외모로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말도 같습니다. 한 민족입니다. 도망가는 형제를 모질게 색출해서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패잔병이 되어서,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제들인데 말이지요.
‘십볼렛’의 뜻은 ‘이삭’이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이 단어의 발음으로 구분합니다.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발음시켜 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형제를 요단 나루터에서 4만 2천명이나 학살합니다. 이 사건은 에브라임 지파를 급격히 약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에브라임은 거만으로 폐망하고, 길르앗은 긍휼과 자비를 버림으로 12지파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입다는 6년 후 죽습니다. 입다 이후 이스라엘 사사들의 통치기간이 짧아집니다. 입산 7년, 엘론 10년, 압돈 8년, 마지막 사사 삼손 20년..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점점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 사사기의 교훈입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하나님께 받아도, 그것은 선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도리어 저주가 되고 맙니다. 주신 은혜, 받은 은혜를 누리고 선용하고,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묻고 듣고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