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중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와 중생(거듭남)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은 것이고 중생(거듭남)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에게 신비로운 출생이 일어나진 않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주(主)로 받아드린 고백이며 결단입니다. 공적 표식입니다. 하지만 그런 공적 고백과 표식이 있다고 그 모두가 거듭났다고 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성경에는 마술사 시몬이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행8)라고 했는데, 당시 그는 이미 세례 받은 자였습니다. 즉 세례가 거듭남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자가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은 무모할 뿐 아니라 속는 것입니다.
표면적 세례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현대의 세례는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있는 실패하지 않는 대기표와 같습니다. 괄목할 신앙고백과 결단, 변화가 없어도 너그러운 자비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세례를 주고 싶어 안달합니다. 세례는 사역의 영적 전리품으로 전락해서 누군가가 세례 받고 싶다는 의중을 표하기만 한다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세례를 줘 버림으로 값싼 은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선교사도 세례에 심사숙고하기보다 경쟁적으로 세례를 줍니다. 세례만 주면 마치 다 된 것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 후에 어떤 책임과 보증을 하지 못한다면 그 세례는 추억의 이벤트에 불과할 것입니다. 선교지든 어디든 세례 받고도 받지 않는 자처럼 사는 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례는 중생(거듭남)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중생(거듭남)은 열매를 통해 보증됩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5:1),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의의 변화와 열매를 맺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적든 많든 간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새 생명의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그 열매가 없다면, 세례는 무익한 것이고 아무런 효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 다입니다. 물로만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그 증거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그레브 한인교회 교환학생으로 온 자매중에 첫 믿음을 가진 자매가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교회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귀국하기 바로 전에 세례를 받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4주간 교육을 했는데, 마지막 교육일에 개인 여행으로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고민했습니다. 세례를 줄 것인지 말것인지?... 결국 세례를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질문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달라질 것이라고.." 직분도 같은 말을 합니다. "직분을 주면 책임감이 생겨서 더 잘 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세상도 감투를 주고 직위를 주면 그 의무와 책임 때문이라도 잘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듭난 열매라고 할 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