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년 6월, 유연이 병사하자 뒤를 이어 맏아들 유화(劉和)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유화는 병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여러 동생들, 특히 많은 전공을 세운 바 있던 유총(劉聰)을 두려워하였다. 마침 유화에 의해 재상이 되었던 외숙부 호연유(呼延攸)도 유총을 숙청하고 황권을 공고하게 할 것을 진언하였고, 유화는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총을 비롯한 여러 동생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동생들은 은밀히 살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유총은 배신자가 음모를 알려 주었기 때문에 기습에 실패하였다. 결국,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유총을 적으로 돌린 황제 유화는 재위 1개월 만에 폐위·살해되고 유연의 삼남 유총이 황제로 즉위한다.
유총은 국내의 혼란을 빠른 속도로 정리하고 선제 유연의 숙원이었던 낙양 공략을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유총은 즉위 전에도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했던 적이 있었다. 실패하였던 작전이었기 때문에, 유총 자신도 낙양 공략은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큰 가치가 있는 목표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군의 적수였던 낙양의 진영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306년에 팔왕의 난을 정리하고 권력을 획득한 동해왕 사마월(司馬越)이 회제(懷帝)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해왕은 자신이 회제를 즉위시킨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회제는 동해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좋아할 리가 없다. 이러한 알력이 표면화된 것은 불행하게도 한의 침입이 다시 시작되는 시점에서였다.
유총은 310년 10월부터 낙양에 대한 공략에 착수하였다. 낙양 공략에 동원된 한군은 모두 4개 군단으로 친족 유요(劉曜), 갈족(羯族)의 수장 석륵(石勒), 호연안(呼延晏), 왕미(王彌)가 이끌고 있었다. 한군의 전략 목표는 하남 일대를 공략해서 낙양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에 맞서 동해왕은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허창에 주둔하여 한군의 공격을 막는 한편 전국에 구원병을 보내도록 격문을 날렸다. 그러나 팔왕의 난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데다가 많은 군사력마저 날려먹어 왕실에 구원병을 보낼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해왕이 낙양을 떠나 있는 사이 회제가 일을 꾸미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회제는 연주·청주를 방비하는 구희에게 동해왕을 토벌할 것을 명하는 밀조를 내렸다. 수차례 문서가 오가는 가운데 동해왕은 이 밀월 관계를 알아채고 311년 2월, 사신을 중간에서 가로채 일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동해왕은 뒷목을 잡고 쓰러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동해왕이 죽고 군권을 이어받은 왕연이 벌인 삽질은 앞선 포스팅에서 다룬 바 있다. 어이없는 과정으로 석륵에게 사로잡힌 왕연이 하는 변명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작전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젋을 때부터 벼슬을 하고픈 마음은 없었고 세사(世事)에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석륵에게 존호를 쓸 것을 권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선전하겠다고 한다. 태위(太尉), 무려 삼공의 하나인 고위 관직에 있었던 자가 하는 변명이다. 이에 대한 석륵의 대답이야 말로 정론이고 명언이었다.
“당신은 젊을 때부터 조정에 올라 이름은 사해를 덮고 몸은 중임을 맡았소. 어떻게 벼슬을 하고픈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천하를 파괴한 자가 당신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삼공의 일원이라는 자가 이 정도였으니 진 왕조의 정치 상황이야 뻔했다. 국방의 책임자라는 작자가 군주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니 낙양까지는 무인지경. 4월에 왕연을 격파하고 낙양에 이른 것이 5월, 낙양이 함락된 것은 6월의 일이었다.
낙양에 입성한 한의 4개 군단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인 약탈을 자행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약탈한 것이 한족 출신의 장군 왕미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왕미의 약탈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실상의 총사령관 격이었던 유요가 직접 제지하기 위해 나설 정도였다.
왕미라는 인물은 산동 출신의 비적으로 중원에서 세력을 떨치다가 간덩이가 부었는지 수도 낙양을 공격하고 패퇴하여 유연에게 투항한 사람이다. 한족 출신으로 훙노의 국가에서 4대 군단 중 하나를 이끄는 장군이 되었으니 일세의 효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원래 낙양 점령에 대한 작전 계획은 4군이 모두 모여서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왕미는 이런 약속을 어기고 먼저 낙양에 들어갔기 때문에 유요와의 사이가 틀어졌었다. 낙양 점령 이후 왕미의 약탈을 제지한 사건도 그러한 알력의 하나였다.
어쨌든 왕미는 가장 심하게 약탈을 한 주제에 낙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유요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유요는 이에 반대하고 낙양을 불태워버린다.
“도각(屠各 : 흉노의 선우를 배출하던 씨족)의 자손에게 어찌 제왕의 뜻이 있겠는가?”
왕미는 이렇게 탄식하고 군대를 이끌고 나와 버렸다. 비록 도적 출신이었지만 왕미도 천하에 뜻을 두었던 것 같다.
낙양 함락 이후 평양의 황제 유총은 사방으로 세력을 넓히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유요와 유찬(劉粲)은 장안 방면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석륵과 왕미는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장안 방면의 전선은 사마업(司馬鄴)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완강한 저항을 맞아 교착상태였으나 동쪽으로 진격한 석륵·왕미는 하북·하남과 산동을 평정해 나갔다. 왕미는 이런 석륵을 습격하여 그 세력을 흡수하고자 하였으나 그 의도를 알아챈 석륵에 의해 오히려 참살당하고 군대도 빼앗겨 버렸다.
왕미의 단독행동도 그러하거니와 석륵이 파죽지세로 하북과 산동을 평정해 나가는 것을 보아도 이 정권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실상 태행산맥 동쪽은 석륵의 개인 영지라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였다. 316년에 장안을 함락하고 관중 일대를 석권하였던 유요 역시 사실상 관중을 지배하는 군벌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결국 심각한 분열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낙양이 함락되고 포로가 된 회제는 평양으로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고 살해당하였다.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끌려온 민제 역시 같은 꼴을 당했다. 망국의 군주라고는 하나 일국의 군주에게 이렇게 모욕을 주는 유총도 제대로 된 군주는 아니었다. 낙양 함락 이후 유총은 주색에 빠져들었다. 황제는 주색에 빠져들고, 당연하게도 환관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각종 음모가 난무하고 한 왕조의 본국-병주 중남부-은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주색잡기에 빠져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총은 겨우 8년 동안 재위한 후 318년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태자인 유찬이 즉위하였으나, 유찬 역시 주색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유찬에 의해 한에는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첫댓글 『진서』「왕 미 열전」과『세설신어』에는 왕 미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무구 검 휘하의 장수 현토태수 왕 기(王頎)의 손자라고 합니다. 가문으로 보자면 단순한 도적출신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사실 '도적'이라는 표현도 서진 왕조 입장에서 도적이지 실제와는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여하간 중원을 이롭게 했던 사람의 자손이 오히려 흉노군의 장수가 되어 중원을 해롭게 하니 참으로 역사의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반대로 보면 중원을 제외한 여타 국가들에게는 왕 미가 엄청나게 보너스를 팍팍 쓴 셈이 됩니다만.
앗. 왕미 열전이 있었군요. 재기만 보고 왕미는 안나온다고 생각했었는데.. ㅡㅡ;
저 시기. 만일 유요나 유총이 북방 유목민족의 대동단결을 추구하면서 대한(?)으로 나갔다면 역사 자체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전 중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정복왕조가 원제국이 아닌, 북방 유목민족의 한제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서구 로마제국도 69년, 이런 생각을 가진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바타비 족을 비롯한 전 게르만 제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