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체인지 1mg 한 대
나는 ‘에세 체인지(ESSE CHANGE) 1mg’를 피운다. ‘에세’라는 이름에서 ‘에세이(Essay)’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담배 한 대를 태우는 시간은 나를 수필의 세계로 들어서게 만드는 신성한 의식이다. 수필이 화려한 기교를 걷어내고 삶의 민낯을 담백하게 드러내듯, 하얀 연기를 들이키고 내 뿜는 과정은 내 삶을 한 편의 맑은 수필로 엮어가는 시간이다. 가령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떼면 수증기가 솥 밖으로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
이름이 '체인지'인 만큼, 그 짧은 시간은 내 사유의 지평을 바꾸어 놓는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아래한글에서 길을 잃고 문장들이 엉켜버릴 때, 내 영혼은 본능적으로 담배를 찾는다. 나에게 담배를 피우는 시간은 단순한 기호품을 맛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땀띠 나는 더운 정신을 식혀주는 시원함의 시간이기도 하다. 담배를 물고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돌다 보면, 뇌 속의 엉킨 실타래들이 풀리고 막혔던 생각의 혈관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을 느낀다. 그때의 니코틴은 막힌 곳을 뚫어주는 송곳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담배 연기는 내 머릿속을 부유하던 불필요한 잡념과 사족을 태워버린 결과물이다. 연기가 흩어질 때, 비로소 혼돈은 질서로 바뀌고, 텅 빈 여백 위로 맑은 영감이 스며든다. 이는 단순히 니코틴의 작용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기 전의 답답한 생각을 가진 나는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나로 '체인지'되는 창조적 승화의 순간이다. 담배는 나에게 글을 쓰게 하는 연료이자, 막힌 문장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문장부호인 셈이다.
물론 요즘의 세태는 흡연자를 마치 오물을 든 사람처럼 취급하곤 한다. 더럽고 냄새나는 속물로 치부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시선이 날카롭다. 담배의 의학적 해악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통속적인 폐해가 아니다. 나에게 담배는 해악이기에 앞서, 외로운 글 쓰는 길을 45년간 묵묵히 동행해 준 유일한 '문우(文友)'이자 삶의 동반자다.
고등학교 2학년, 18살의 치기 어린 멋으로 시작한 연기가 어느덧 내 인생의 반 세기를 태우고 있다. 주변에선 금연을 ‘독하게’ 성공한 이들이 이를 훈장처럼 자랑하며 정신력의 승리를 논한다. 나 역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해보려 숱하게 노력했지만, 금연은 내게 미덕이 아닌 파괴적인 스트레스였다. 억지로 담배를 참으며 예민해진 신경으로 삶의 질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담배 한 대가 주는 평온 속에서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하는 편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담배를 끊는 행위’ 그 자체를 끊어버렸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35년째 잔소리를 이어간다. “누구 아빠는 끊었다더라”, “몸에서 똥 냄새가 난다”라는 타박은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잔소리 속에서도 의연하게 불을 붙인다. 죽을 때까지 이어질 그 잔소리마저도 어쩌면 내 흡연의 역사가 만들어낸 삶의 소음이자 활기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에게 흡연은 단순히 연기를 들이마시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무질서한 일상을 정돈하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게 만드는 가장 짧고도 강렬한 명상이다. 세상은 이것을 ‘중독’이라는 차가운 단어로 정의하지만, 나에게 이것은 ‘삶을 퇴고하고 생각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필터의 순간’이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 ‘에세 체인지’ 한 가치는 마침표 뒤에 찍히는 새로운 문장의 시작이며, 쉼표가 필요한 정신에게 주어지는 가장 정직한 보상이다. 스트레스라는 보이지 않는 독을 마시며 억지로 생의 길이를 늘리기보다, 조금 생명이 단축될 지라도 담배 한 대에 담긴 깊은 사유와 평온을 누리며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내는 것. 비록 타인에겐 조금 불편한 냄새일지라도, 이것이 바로 나를 가장 나답게 살아가게 하며, 내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나의 삶의 방식이다.
“나에게는 담배 피울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