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처절한 가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는 동명의 수기를 원작으로 한 실화 영화다. 대구 출신 소년가장 이윤복 군의 이야기를 통해 1960년대의 처절한 가난과 슬픔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1965년 관객 동원 1위를 기록했다.
영화는 '가난'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처럼, 찢어진 듯한 벽 사이로 윤복이 가족의 모습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불화로 집을 나갔고, 목수였던 아버지는 허리를 다쳐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윤복이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옆집 염소에게 풀 먹이는 일이나 껌 장사, 구두닦이 등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소년 가장이다.
학교도, 교회도, 아동보호소도 윤복이를 구제하지 못한다. 윤복이를 도와 주는 착한 동급생들이 있지만, 아이들끼리의 선행으로 윤복의 처지가 나아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구걸이나 행상을 하는 아이들을 수용하는 시립아동보호소 '희망원'은 윤복이에게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다. 공무원들이 아이들을 붙잡아 트럭에 싣고, 좁은 방 안에 수용하는 모습은 보호시설이 아니라 감금, 격리 시설을 연상케 한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희망원에서의 탈출 장면이다. 철조망 사이로 탈출한 윤복이가 정신 없이 내달릴 때, 카메라는 시설 주변의 무덤들을 비춘다. 보호 시설조차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며 60년대의 빈곤 문제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다.
어려운 상황의 윤복이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것은 담임교사다. 담임교사가 윤복에게 일기를 쓰게 하면서, 가정이나 학교보다 거리에서 철들어간 소년에게 일기는 거의 유일한 교육적 도구가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쓴 윤복이의 일기를 담임 교사가 정리해 출간하고, 책이 유명해지면서 윤복이는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가난한 윤복이가 헌신적인 선생님을 만나 희망을 찾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문제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영화는 1960년대 가난한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현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복지의 사각지대 속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영화는 비판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린다. 영화의 후반부, 김동식 선생은 윤복이를 인터뷰하기 위해 모여든 기자들에게 눈물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호소한다.
윤복이가 그동안 굶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미 이 아이의 일기를 읽은 분은 아시겠지만, 윤복이의 이제까지의 생활은 너무나 참혹했십니다.
그러나 윤복 군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를 굽히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 줄 알고, 일할 줄 알고, 남을 도울 줄도 아는 착한 아이였십니다.
이 아는 남을 도울 줄 아는 깁니다. 그런데 윤복이는... 아무도 돕질 않았십니다.
당신들이 도왔십니까, 이웃이 도왔십니까. 이 아는 제 혼자만 잘 되면 다라고 생각하는 이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은 깁니다.
빈곤의 근본적인 책임은 사회 복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국가에 있지만, 영화는 "당신들이 도왔십니까, 이웃이 도왔십니까"라며 빈곤의 책임을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은 사람들, 즉 공동체의 윤리적 책임으로 돌린다. 이 한 장면으로 사회 빈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던 영화는 '자력 갱생'의 프로파간다로 바뀌게 된다.
박정희 정부는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 산업을 장악했고, 영화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시기로, 부랑아와 거지는 '정화'의 대상이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고발하는 빈곤 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 불온한 내용이었고, 검열을 통해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이는 윤복이와 동생 윤식이의 대화에서도 의미심장하게 드러난다.
윤복 : 김동식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가난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 카더라. 절대로 우리 죄가 아니라더라.
윤식 : 그럼 누구 죄고.
윤복 : 시끄럽다. 잠이나 자거라!
"가난은 너의 죄가 아니다"라는 김동식 교사의 말에서 어떤 위로를 얻은 윤복은 동생에게 그 말을 전할 수는 있지만, '그럼 누구의 죄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윤복과 윤식의 대화는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준다. '누구의 죄냐'고 되묻는 것 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질문이 누구에게로 향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지금, 여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60년대의 영화가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폭력적인 정치 권력은 사라졌고, 한국은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질문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영화 속 상황은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스스로 질문해 본다.
얼마 전 수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세 모녀가 발견되었다. 어머니는 암 환자, 딸들은 난치병 환자로 힘겹게 삶을 이어나갔지만, 어떠한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다. 보육원 출신의 청년들이 연이어 극단적 선택을 한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난 주변부의 사람들.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누구의 책임인가.
https://youtu.be/XDv6bue_vUQ
해당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에서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첫댓글 잘 읽었구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그 영화를 보았지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
주인공의 슬픔에 감정이입
손수건 흠뻑 적시는 좋은 영화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