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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 석 제 의 고향 ‘경북 상주’
“월색이 명랑하다. 기러기는 떼 지어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가고 어디선가 부엉이가 운다. 백리 길을 쌀 두 가마니를 싣고 가서 장 바닥에 앉았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임자를 만나 쌀을 팔았다. 보리밥에 된장을 얹고 수건으로 싸맨 도시락을 부자가 마주 앉아 먹고 며칠 뒤 문중 시제에 소용될 물품을 사 들고 오는 길이다. (중략)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생각에 잠겨 길을 걷는다. 부엉이가 운다.운다.” 성석제의 소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작가가 어린시절 자주 들어온 증조할아버지 얘기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상주의 여럿 고개를 넘어 백리길 김천을 오가며 쌀을 팔아오곤 하셨다. 아버지는 약골인 아들이 그저 셈이나 하고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만 됐으면 싶지만 아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신식문명 얘기에 귀가 솔깃하다. 1930년대 얘기다. 작가는 남장사 고갯마루길을 오르며 소설을 반추한다. 고향의 가을은 깊어 그가 제집 드나들듯 한 고찰 남장사에도 길마다 낙엽이 수북하다. 곱게 물든 단풍에 잠시 시선을 뺏긴다. 고개마루에는 산 속으로 조붓한 길이 나 있다. ‘궁중암’이다. 아득한 하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암자란 뜻이다. 고즈넉하고 깊어 그는 거길 자주 찾곤 했다. “저는 끝까지 가려고 기를 쓰지 않아요. 마음에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끝장내기식이 아니에요. 바라는 걸 얻었으면 됐다 싶은 거죠. 그 정도에서 내려옵니다.” 고갯길은 고비다. 그곳을 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을 기점으로 올라갔던 길은 또 내려오는 길이 된다. 내려오는 길의 풍경은 참 다르다. 뒷짐 지고 어영어영 걸으며 그는 산에 멧돼지가 많다며 사냥꾼 친구 얘길 들려준다. “우리들은 그의 사냥개를 영감이라 불렀어요. 15살에 죽었는데 사람나이로 치면 150살을 산 셈이죠. 9살에 귀가 고장 나고 10살에 코가 고장 나 사냥감을 찾으려고 멀쩡한 귀와 코를 방향 따라 돌릴 때마다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양이 우스웠지요. 영감은 시합에 나가기 직전 친구가 끌고나가 훈련 중에 장렬하게 산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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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려있는 일상부터 범상치 않은 얘기까지 뭐든 성석제에 닿으면 그것들은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농담 사이 독특한 지점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스꽝스런 얘기에 빠져 있다가 헤어나오면 손에는 쓸쓸한, 그가 농담 뒤에 숨겨놓은 진실 한 자락이 붙들려 있다. 추수를 끝낸 텅빈 밭엔 여기저기 감 껍질이 쌓여있다. 감껍질은 퇴비로, 한우사료로 쓰인다. ‘둥시’라는 감으로 만드는 상주 곶감은 전국의 60%를 공급한다. 곶감은 그의 어린 시절 돈이 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먹지 못하도록 기를 쓰지만 먹고야 마는 건 아이들의 타고난 재주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함과 같다. 그에게도 ‘곶감사건’이라 불릴 만한 게 있다. 하루는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단 감을 빼먹다가 할머니에게 들켰다. 부지깽이를 들고 뛰쳐 나오셨는데 그만 시뻘건 부지깽이 끝이 닭장의 초가지붕에 닿으면서 불이 났다. 그날 마을이 생긴 지 처음으로 소방차가 들어왔다. “나는 숨어있었죠. 잡혀갈까봐 겁났어요. 그날 불은 누나가 낸 걸로 했지요.” 할머니와 추억을 그린 작품 중의 하나가 ‘희추의 추억’이다. “논밭에 김매는 일이 끝나 한숨 돌릴 무렵의 여름날 어느 하루에, 내가 태어나 살던 마을에서는 아낙네들끼리 사십리 가량 떨어진 낙동강으로 놀러가는 일이 있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난 할머니는 전날 준비한 음식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한손으로는 아직 눈곱이 떨어지지 않은 손자의 손을 붙들고 소리 없이 대문을 나선다. 푸르스름한 박명 속에 머리에 광주리를 이거나 주전자를 든 아낙네들이 동구의 늙은 팽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자유로운 두 팔을 휘저으며 줄을 지어 희뿌옇게 밝아오는 여름 들판을 걸어가는 여인들의 모습은 어느 사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어떤 기록에서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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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고향‘경북 상주’이야기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단 곶감… 할머니와의 옛 추억에 잠기고 마을 어귀 구석구석… 사연으로 가득한 내소설의 원천
청일점 소년은 그때 아낙들과 먹었던 음식들의 짜고 미지근하고 매운 맛을 커서도 잊지 못한다. 그에 따르면 상주음식은 두드러지게 손을 대서 만들어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집에서 먹는 대로 편안한 음식이다. 여느 칼국수와 달리 이곳에선 따로 국물을 내지 않는다. 통밀로 반죽해 썰어 삶고 야채 같은 것을 넣어 끓이는 밋밋한 맛이다. 그런데 거기에 간장이 들어가 결정적인 맛을 낸다. 덤덤한 것 같지만 중독성이 있다. 장맛이 상주음식의 비법인 셈이다. 배추전도 담백하면서 특별하다. 배추에 밀가루를 입혀 기름을 두르고 지져내는 간단한 음식이지만 아삭하게 씹히는 맛과 초장에 찍어먹는 맛이 개운하다. 상주는 유교문화가 번성한 곳 중 하나다. 서원들이 여럿 있고 그중 도남서원은 영남지역 대표서원에 꼽힌다. 정몽주와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등 8현을 모신 곳으로 대원군 때 철폐됐다 중건됐다. 바로 앞에 낙동강 줄기가 흐르고 앞 들판이 넓어서 눈이 시원하다. 그는 “도남서원을 상주 선비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가학 공간”이라 했다. 그는 14살 때까지 상주에 살았다. 그러나 아득한 고향이 아니다. 작은집, 외가, 친구가 있고 아버지 산소도 이곳에 있어 자주 찾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상주는 마을도 많고 길도 많고 사연 없는 데가 없어 옮겨적기만 해도 소설이 될 정도”라고 한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그는 골목을 찾아들며 속살을 헤집고 이야기를 줍는다. 그의 소설 가운데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로서의 그의 소설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황만근이 한밤중 거대한 토끼와 씨름한 얘기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하지만 그의 소설의 힘은 여기에 있다.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데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적이 있죠. 저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속에서 진실을 찾는데 민감한 편이에요. 안 찾아지면 찾아질 때까지 또 생각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이 지금까지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그는 지난 여름, 상주에서 자전거타기로 피서를 대신했다. 자전거도시답게 자전거길이 잘 발달돼 있다. 자전거길로 유명한 세코스인 남장산 코스, 갑장산 코스길, 팔공산 코스를 모두 돌았다. “경천대쪽을 가는데 할머니들이 정자에 그득히 앉아 있고 할머니 한 분이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며~’노래를 부르시는 거예요, 아름다운 젊은 날을 생각하며 한결 같이 공감하는 분위기에 사지가 마비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본 할머니들은 그의 코흘리개적 아낙네들이었다. 늦가을의 해는 짧아 들판은 금세 어두워진다. 한때는 거대한 저수지로 역할을 다했던 ‘공검지’(공갈못)는 윗쪽에 오태저수지가 생기면서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1995년 오태저수지 변에 쌀 닷말에 1년동안 집을 빌려 첫 장편소설을 썼다. 소설 ‘왕을 찾아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본래면목’ 등도 호수마을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축축한 풀내음속에선 밥짓는 냄새가 났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m.com)
◆ 성석제가 쓴 작가소개
- 1960년 7월 5일, 미명에 태어났다고 함.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근무 중,
증조부를 여의고 난 후 귀향, 읍내 시장에 서민금융(시장상인들을 상대로 한
신용조합의 일종)을 운영하는 한편 농사도 지었음.
- 조부모, 종조모, 부모, 고모 셋, 삼촌, 아홉 살 위인 형, 여섯 살 위인
큰 누이, 세 살 위인 작은 누이, 머슴까지 합해 열세 명이 밥상에 둘러앉는 대가족.
3년 후 남동생, 또 3년 후 여동생이 태어나 최고 15명분의 수저를 밥상에 놓아야 했음.
따라서 밥상이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저절로, 확실히 깨닫게 되고
밥상을 연모하는 마음을 평생 가지게 됨.
- 스무 살 때까지 편식. 물고기, 뭍고기를 먹지 않는 식성이어서 반드시 그것을
먹어야만 하는 다른 식구들에게 우호적인 대우를 받음.
최초로 돼지갈비를 먹은 것은 군대시절 휴가 때로 '야, 이 놈들이 이렇게 맛있는
걸 저희끼리만 처먹고 살았구나.' 하고 바글바글한 옆자리 손님들에게 눈을 부릅뜬
적이 있음.
- 67년 국민학교 입학. 여리고 청초한 처녀를 담임선생으로 맞아 사모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함. 그해 겨울 선생은 결혼식을 한다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음.
그때 딴 녀석들은 수업시간이 줄어들어서 좋다고 책상에 뛰어오르는 등 광란을
하며 환호했는데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십릿 길을 울면서 걸었음.
다시는 여선생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결심.
- 2학년 때 담임선생은 여성은 여성이었으되 영국의 대처 수상을 연상케 하는 강철
같은 의지와 철권의 소유자. 감히 딴 마음을 품을 수 없어서 책으로 관심을 돌림.
집에 있던 책들은 옥루몽, 금병매, 수호전, 연산군 같은 소설에 그림으로 보는 이야기 성서
(이야기로 읽는 그림 성서였나?), 축산전서, 정체불명의 일본 추리소설,
[사랑이 메아리 칠 때] 같은 저자 불명의 연애소설, 경향잡지(가톨릭 교회에서
간행하는 잡지) 따위. 그걸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하다 보니
학교에서 보고 배우는 이야기는 한 마디로 우스웠음.
따라서 학교에서 내내 실실 웃고 지냄.
- 3학년 때 {아라비안나이트}와 세익스피어의 {햄릿}, 중고등학생용 자유교양신서를 만남.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각 백번은 읽어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말뜻을 체득하게 됨.
- 4학년 때 백일장에 나가 [노을]이라는
제목으로 '노을을 보면 시집 간 누나가 생각난다'는 요지의 거짓말을
주워 섬겨대 당선 있는 가작 상을 받음. 그때 누나는 고등학생으로 시집은 십 년
후에나 고려할 나이였음. 그 다음부터 갖가지 백일장에 반 대표, 학년 대표,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됨. 거짓말 선수가 됐음.
- 6학년 때 대학에 다니던 형이 군대 갔다가 사망. 온 집안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형의 죽음으로 졸지에 장남이 됐고 무관심 속에서
누리던 은일과 평화의 시대는 종막을 고함.
- 교내 폭력의 전성기에 거의 한 대도 맞지 않고 국민학교를 졸업.
졸업식 때 받은 상은 육성회장상인데 부상은 주판.
- 73년 아버지와 형이 졸업한 중학교로 진학, 자전거로 통학했음.
한없이 긴 방죽을 따라 등교를 하다 보면 스스로 한심하고 슬퍼지는 때가 많았음.
여름에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 조부모와 나만 커다란 시골집에 남게 됨.
담임 선생과 세계관이 맞지 않아 불화, 도서실에서 책을 훔쳐 나오다 적발된 이후
학교에 가기가 싫어 시냇가에 앉아 혼자 가르치고 혼자 배우는 시간을 보냈음.
그때 공책을 찢어 띄워 보낸 종이배는 지금 어디에서 항해를 멈추었는지.
- 2학년 봄에 서울로 전학. 말이 서울이지 구로공단의 배후지인 가리봉동이라는
변두리 동네는 수채가 질질 흐르고 비닐조각에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운데 산업전사들이
사단급, 군단급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는 지옥 같은 수용소였음.
- 독서실이라는 해방구에서 변두리 동네 사춘기 소년들이 즐기는 갖은 장난을
다 배우고 익힘. 여자 목욕탕을 들여다보다 불 때는 할아버지에게 잡혀서 머리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나도록 맞았음. 복수를 위해 세 번을 더 떼 지어 출격했으나
처음처럼 많은, 아리따운 여인들을 볼 수는 없었음. '나는 봤다!'고 목욕탕 벽에
낙서를 하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
- 76년 2월 중학교 졸업. 지옥구 졸업. 뺑뺑이(추첨)로 혜화동의 경신고등학교로 진학.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은사(주호수 선생)을 만남. 매타작 전문가인 선생의 덕분으로 문예반에
들고 교지 편집이라는 걸 하고 1년 만에 문예반을 탈퇴하고 바둑도 두고 술도 마시고
선생이 압수해 집안에 쌓아둔 무협지도 읽고. 어릴 때 읽어둔 책들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 40대의 성인과 대등한 사고를 하는 이상한 고등학생이 되는 데
성공하여 선생한테서는 한대도 맞지 않았음.
- 연세대에 진학(정법계열). 후에 법학으로 전공을 정함. 법학을 전공으로 한 것은
고시생들이 많아 출석을 잘 부르지 않는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
- 기형도라는 인간을 만나 그가 나가는 사교 집단 연세문학회에 들어감.
교주는 문학이었고 교주 권한 대행은 술, 주정, 성원근(작고시인)의 철권,
시합평회의 난도질 등등. 성원근에게 한대도 맞지 않고 무사히 군대로 감.
- 군대 시절 벗들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글의 위대함에 대해 눈을 뜸.
파블로 네루다(칠레의 시인), [창작과 비평] 영인본,[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미술의 역사], [음악의 역사], [철학사], [전쟁사], [역사란 무엇인가]를 접함.
- 84년 복학. 기형도의 인도로 교내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주관하는 [윤동주 문학상]
(시 부문)에 응모. 당선 있는 가작으로 입선.
- 85년 독자적으로 다채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끝에 시, 소설, 희곡, 3부문에 응모.
당연히 당선될 줄 알았던 (그 전해 당선자가 졸업했으니까) 윤동주문학상에서 낙선.
그때 심사위원은 정현종. 희곡은 당선작 없음으로 낙선. 심사위원은 오태석.
소설([박영준 문학상])이 가작 없는 당선으로 간신히 체면 유지. 심사위원은 잘
기억나지 않음.
- 86년 6월 월간 {문학사상}의 신인발굴에 시 [유리닦는 사람] 외 4편으로 등단.
졸업 후 출판사인 현암사에 취직.
- 11월 출판사 사직하고 제주-해남-상주로 이어지는 순례 시작.
6개월 정도 절에서 생활(절 생활은 종교문제 때문이 아니라 식성 때문임).
- 87년 겨울, 동양시멘트라는 회사에 취직. 홍보 일을 봄.
- 88년 5월 결혼. 현재 1남1녀.
- 91년 그동안 발표한 시를 모아 첫시집 {낯선 길에 묻다}(민음사)를 냄. 판매 실적 저조.
- 93년 8월 해마다 거듭된 시도 끝에 직장을 그만두는 데 성공. 주특기인 놀기에 탐닉,
마냥 신나게 먹고 놀았음.
- 94년 여름, 편서풍과 북태평양 고기압의 대결장이 된 서울 신림동 산자락 하숙집에서
악전고투 끝에 시도 소설도 산문도 아닌 이상한 글을, 미욱스럽게 책 한 권 분량이나 쓰게 됨. 그해 겨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민음사)로 펴냄. 판매실적 저조.
- 95년 1월 산문집 {위대한 거짓말}(문예마당)을 냄. 물어보나마나 판매 실적 저조.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를 발표함으로써 소설가
행세를 하게 됨. 단편 [금과 은의 왈츠], 단편 [첫사랑], 단편[이른 봄]을 발표하는 한편
장편 {왕을 찾아서}를 흑심을 가지고 씀.
- 96년 2월 {왕을 찾아서}(웅진출판)드디어 출간. 그러나 또 판매실적 저조.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면? 모르겠다.
6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침. 성한 왼쪽 다리도 노리는 인간들이 많은 세상에서 힘겹게
살고 있음. 낫기만 하면 손보아줄 인간들 역시 많은 세상에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
- 단편 [새가 되었네], [황금의 나날], 중편 [스승들]을 보태 96년 7월 첫 창작집
{새가 되었네}(도서출판 강)를 펴냄. 판매실적은 말하지 않겠음.
- 중편 [어린 도둑과 40마리의 염소]('96 문예중앙 가을) 발표.
계간 {리뷰}에 장편 {왕의 인생} 연재 시작.
- 97년 1월 짧은 소설(꽁트, 자유단편, 엽편소설이라는 장르와 비슷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뭐라고 이름붙이기 힘든 내 멋대로의 팬서비스)을 모은
{재미나는 인생}(도서출판 강) 출간.
- 단편 [조동관 약전], [경두],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이인실],
[통속], [유랑], [고수], [칠십년대식 철갑], [비밀스럽고 화려한 쌍곡선의 세계]
등을 사방에 발표.
- 97년 5월부터 7월까지 PC통신 하이텔에 장편 [궁전의 새] 연재
- 97년 6월 두 번째 창작집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민음사)를 출간.
판매실적 점차 호전.
- 가을에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음(공동 수상).
- 최근작으로는 단편 [붐빔과 텅빔], [소설 쓰는 인간].
- 현재 원고노동자, 사과나무에 반한 자, 막걸리 잔에서 복숭아꽃 피기를 기다리는 자
등 스무 개 정도의 직업 내지는 직함을 가지고 있음.
[출처] 성석제가 쓴 자기 소개 |작성자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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