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 9일차
어젯밤은 정말 덜덜 떨다가 잠에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자꾸만 심장이 쿵쿵대더군요. 매일 듣던 푸드덕대는 박쥐 소리라던지, 그런 거랑 좀 달랐습니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화장실이 정말 가고 싶었는데도 그렇게 한 시간은 넘게 참았던 것 같습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악몽을 꿨습니다. 미친놈이 칼 들고 찾아와서 칼 맞고 도망가고 결국엔 죽고. 그런 꿈이었습니다. 진짜 무서웠습니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야 마음 편히 잠드는 건데 그게 되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다 되어 조용해지고 나서야 화장실을 겨우 갔다 왔습니다. 그랬더니 화장실 안엔 조그만 쥐 한마리가 있더군요. 사람 보고 도망가지도 않았구요. 여기 와서 다람쥐에 쥐에 박쥐에 쥐란 쥐는 다 봤습니다.
그렇게 겨우 잠에 들고, 아침에는 또 늦게 일어나버렸습니다. 어제부터 목이 칼칼하긴 했는데 오늘 아침엔 콧물이 줄줄 났습니다. 아 감기구나, 그것도 더럽게 재수 없는 여름 감기구나! 싶어서 서러웠습니다. 아플 때 혼자 있는 것만큼 서러운 게 어딨겠습니까. 장염도 한 2~3일 앓았지만, 장염은 늘 걸리는 거니까 그러려니 했다만 말입니다. 오늘은 씻으려고 했는데 감기에 걸리다니! 하고 아 오늘로 4일째지만 더 안 씻고 버텨볼까 하다가, 가만히 있는데 파리가 와서 저한테 꼬이길래 충격 먹고 씻으러 갔습니다. 집 밖으로 오랜만에 나갔습니다. 하도 비 핑계를 대며 산책을 안 나갔더니요.
개울로 가니 그동안의 비바람에 빠스께도, 바가지도 다 날라가고 없었습니다. 개울 저 밑 구렁텅이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오-세상에-어떡하지 하다가 결국엔 집으로 돌아와서 코펠 하나를 챙겨 다시 갔습니다. 물은 엄청 많이 불은 바람에 개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코펠로 머리에 물을 끼얹으며 씻고,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홀딱 벗고 누구보다 빠르게 샤워를 했습니다. 찬물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끼얹는데 몸에서 갑자기 막 열이 핑 하고 오르는 듯한 느낌은 처음 느껴보는 거였습니다. 그래도 뭐 씻고 나니까 우주 제일로 개운하데요. 그렇게 신나게 집으로 돌아와서 스킨도 바르고, 약도 바르고. 아껴뒀던 수면양말을 꺼내 신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이 하도 더럽길래 빗자루랑 쓰레 바퀴를 가져다 한 번 다 쓸었고요. 이 집에 저만 사는 게 아니라 박쥐에 쥐에 온갖 벌레들과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다 보니 별에 별것들이 다 나왔습니다. 치우고 나니까 속 시원했습니다. 며칠 만에 샤워한 느낌과 비슷했지요.
아 생각보다 개운한 아침입니다. 어젯밤에 먹었던 김치찌개가 여전히 맛있길 바라며 밥을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겨두었던 김치찌개에 라면사리를 넣어 계란도 넣고 참치도 넣고 먹었습니다. 맛있게 잘 먹다가 속이 너무 쓰려서 그만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요. 불어 가는 라면을 보며 어떡하나 싶었지만, 며칠 동안 고춧가루 처먹은 저에 대한 벌이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른 저녁을 먹고 이불에 또 한참을 누워있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무던히 느끼다 슬슬 어두워지는 7시 반이 되었길래 밖으로 나왔습니다. 반팔 하나 입고 나왔더니 으슬으슬하길래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후드티를 입고 나왔습니다.
비는 또다시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낮에 잠깐잠깐 하늘이 개어서 해가 보였었는데 저녁이 되니 말짱 꽝이네요.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문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둠을 보면서요. 후드티를 껴입어 봤자 겨우 춥지 않다 정도의 날씨였습니다. 겨울에 여길 다녀갔던 선배들은 도대체 어떻게 얼어 죽지 않고 살다 갔는지 모를 지경. 엄마가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보면 시베리아 갔다 왔다고 해야겠습니다.
아침에 심하던 감기 기운은 낮을 보내는 동안 나름 괜찮아졌었는데 밤이 되니 다시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목이 칼칼하니 가렵고, 코는 시큰거리고. 머리도 찡하고, 이명도 들리고. 밖에 너무 나와있었나 싶다가도, 그냥 계속 앉아있었습니다.
너는 타인의 고통을 너의 고통의 배로 느낀다는 이야기를 다시 떠올립니다. 그러다 생각난 건 예전에 초등학교를 다니며 엠비티아이인가? 여튼 심리테스트를 전교생이 다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머리가 조금이나마 큰 지금은 무슨 문항에 어떤 답을 찍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구나 하는 걸 알지만 그때는 몰랐을 때죠. 그때 그 심리테스트 결과에서 제가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저의 공감능력이 맥시멈 수준, 남들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잘 이해한다는 뜻이겠죠. 지나치게 잘 이해한다는 걸 넘어서서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것 밖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흘려보내고 다음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남아도니 하루 종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지치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있구요. 오늘도 한 시간 넘게 밖에 앉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꽤나 어두워졌길래 이제 한 10시는 됐나 싶었더니 8시 반이었습니다. 시간을 보고 무심코 떠오른 건 아, 애들은 지금 저녁 청소하고 있겠네. 가영이 언니랑 희수 언니랑 예솔이 언니도 없는데 승보 오빠랑 상한이 오빠는 잘 하고 있나 싶었죠. 그걸 보고 스승님이 넌지시 물으시더군요. 그렇게 그리우면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냐고요.
마음이 혹했습니다. 낮까지만 해도, 어제까지만 해도 아직 많이 남았구나 하시던 분이 왜 그러시나 싶어서 웃었죠. 남겠다고 답했습니다. 아직 다 비워내지 못했다고 덧붙였고요. 그러자 잘했다고 하시더군요. 이제는 네가 진정으로 선택해서 머문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데 들려오는 빗소리가,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들리는 쿵쿵 소리가, 푸드덕 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친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분께선 익숙해질 때도 됐지-라고 하셨고요.
8일째이던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두려워했으면서 고작 하루 만에 나는 저 소리를 익숙하다고 표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빗소리나 바람소리는 집 안에서 듣는 것보다 밖에 나와서 듣는게 훨씬 더 좋은 소리로 들리긴 하지만요.
이런 상황이 태풍의 눈인가 싶습니다. 내가 지금 내 마음의 중심을 향해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이건 아마 시편일 겁니다. “주는 중심의 진실을 원하신다”인가. 그 말도 생각이 났어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가디언즈’ 생각도 났습니다. What is your center? 하고 묻는 장면이요.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는 길, 그런 집. 저는 지금 그런 집에 와있습니다. 나를 만나고, 나를 비워내고, 스승을 만나고, 배움을 얻는. 그런 집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아 행복해라. 내일이 되면 이곳에서의 생활은 벌써 열흘입니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세상을 만난다니, 진짜 재밌는 곳에 왔습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유자차’가 생각이 나서 불렀습니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라는 가사가 생각이 나서요. 가만히 있었는데도 배가 꾸륵거리는 걸 보니, 감기에 이어 장염도 다시 돌아왔나 봅니다. 내일은 사과나 먹고, 스프나 먹고, 우동이나 먹고 그래야겠습니다. 고춧가루 없는 밍숭맹숭 식단입니다.
내일이 찾아와도 내가 남겠다고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내일이 되어 봐야 알겠지요. 오늘도 내일도, 모두 다 어제가 될 뿐이야 인가. 정인 노래 가사인데 이것도 생각이 나네요. 모두 다 어제가 될 뿐이겠지만, 저는 내일이 되어 봐야 선택할 수 있는, 하루를 맞이해봐야 하루를 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모든 건 그날의 해가 떠봐야 알게 되겠지요. 지금은 9시 반이 넘었습니다. 이불에 눕기엔 늦은 시간입니다. 오늘도 우리 애들 잘 지내고 있나 생각을 해봅니다. 돌아가서 그 그리웠던 얼굴들을 마주하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붙들고 온 화두들을 풀어내고 가야지요. 내일이 되면 무너질 선언이라도 오늘은 합니다. 그건 합니다. 작심삼일이면 오래간 거라는 걸 알거든요!
첫댓글 흘러갈래 이대로 뭐 어때
비틀비틀 걸어도 미끄러져 굴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