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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감형을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야기되고 있다. 예컨대 이른바 ‘묻지마 폭행’으로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음주운전으로 상대방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는데, 가해자가 심신 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라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심신미약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불명확하다고 보고,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오히려 더 강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비싼 수임료를 지불하고 대형 로펌의 변호를 받는 경우가 많기에, 이러한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변형된 사례라 치부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무고한 6살 아이를 죽인 범죄자와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법조인들의 법리 다툼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어린 아이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소아 성애자’로 6살 어린이를 살해한 리키 랭글리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법대 재학 중 방학을 이용해 로펌에 실습을 나가, 우연히 비디오테잎을 통해서 가해자인 리키 랭글리의 사연을 접하게 된 것이다.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을 지지하는 저자는, 가해자가 무고한 어린애를 살해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후에 문학을 공부하면서, 리키 랭글리가 재심을 받게 된 과정에 관심을 갖고 법조인이 아닌 작가로서 그 사건을 검토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재심 과정에서 리키의 행위를 정신이상에 의한 행위로 몰아 무죄를 받아내려는 변호인들의 변론 전략은 미국의 사법 체계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가해자인 리키 랭글리의 사건과 자신의 삶을 교차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러한 교차 서술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경험으로 가해자인 리키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나는 1부의 내용이 다 끝나는 부분에서 저자의 교차 서술 방식에 대해 어렴풋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딸들로부터 할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난 이후에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했던 부모들의 태도는 저자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리키 랭글리의 삶과 범죄 행위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에 관해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 나름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가족사와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다양한 심리 상태를 리키 랭글리의 이야기와 교차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왜 법조인으로서는 외면했던 이 사건에 대해서, 저자는 작가로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일까? 저자는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지난 후 피해자의 어머니인 로렐라이가 리키를 위해서 법정 진술한 것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법대 재학 시절 로펌에서 처음 리키의 녹화 진술을 보았을 때는 할아버지의 자신에 대한 행위가 떠올랐고,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저자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그가 죽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끔찍한 성적 학대를 당했던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면서, 단순히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리키의 삶과 정신세계를 탐구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소아 성애자’인 리키를 통해서, 저자를 비롯한 손녀들에게 성적 학대를 가했던 할아버지의 정신세계를 알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부부 법조인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명맥한 성 범죄에 대해서 침묵하고 괴로워했던 부모들의 입장은 또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부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법대에 진학을 결정하고, 스스로 ‘다른 집 애들이 종교 안에서 컸다면 나는 법 안에서 컸다’고 자부하였다. 하지만 리키의 진술을 녹화한 테잎을 보고 사건을 맡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사형 제도를 반대했던 자신의 신념과 리키의 범죄 행위라는 현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피해자의 어머니가 리크를 위해서 변호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건을 법조인이 아닌 작가로서 마주치게 되었다.
법조인으로서 사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사건을 맡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잊고 지냈지만, 저자는 시간이 흘러 이 사건과 리키라는 인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건 자체보다는 가해자인 리키와 그가 살아온 환경이나 삶의 여건 등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벌의 유무라는 결과보다는, 저자는 리키의 행위와 범죄 동기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심리에 관한 자료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이해된다. 이 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피해자의 어머니 로렐라이의 행위를 ‘그녀는 그를 용서한게 아니었다. 다만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리키의 삶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과정이 아마도 할아버지로부터 입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치유의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법대를 졸업하였으면서도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했으며, 오히려 작가로서 이 사건을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 이해된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법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그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든 다음, 사람들은 그걸 진실이라고 부른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법적 진실'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다양한 기록들과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서 채울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여겨진다. 만약 그렇다면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라는 부제는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라는 제목 역시 누군가의 기억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오직 기록과 관련 인물들의 진술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생각되었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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