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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는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바른 지식과 온전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에 모호, 무지, 혼란, 의심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르 것을 아는 것처럼, 또 보지 못하는 것은 보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위선과 가식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애매, 모호, 무지, 혼란, 의심도 아니고 위선과 가식도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믿음의 도에 있어 수고해야 합니다. 세상을 덮고 있는 영적 어둠과 죄와 싸워야 합니다. 무관심과 무지, 게으름과 나태로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뿌리도 강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믿음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전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여러분이 힘써 믿음의 도를 알기를 원합니다.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단번에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유1:3)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싸우지 않는지요? 이 싸움은 어둠과 무지로 신자의 삶 덮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잠자는 파수꾼과 같고, 영혼을 속아 빼앗기는 자가 된 것 같습니다. 단번에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도에 관한 다섯 가지 기초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이 다섯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신앙의 기초이며, 우리가 절대 놓지 않고 붙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1. 성경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정경이라고 하고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계시하시는 은총의 수단입니다. 가톨릭에서는 66권의 성경 외에 외경이라고 하여 덧붙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에 대한 권위는 오직 66권에만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66권만이 되어야 할까요? 다른 외경이나 위경들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기독교인들이 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셨고 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가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성경이란 39권의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정경화된 성경은 오직 구약 39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구약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사도의 증언과 해석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대한 권위는 사도성에 있었습니다. 사도성이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기간을 지냈고 배웠고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권위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성령에 의해 부여된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쓴 신약 27권은 예수님의 말씀이자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 27권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이로 신구약 66권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66권 외에 가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와 사람들에게 창조에서 구원에까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유일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그 말씀을 진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피조물에게 나타내시길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낳고 집 떠난 아비나 집을 나간 불량한 어미가 아닙니다. 그 분은 숨어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육이 아니기에 보지 못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할까요? 창조의 세계, 삼라만상으로 계시하십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환상과 기적으로 자신을 나타낼까요? 오래 전 태초의 시대, 율법을 수여하기 전에는 하나님은 직접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야곱에게 꿈과 환상과 신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후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계시하시길 기뻐하셨고, 율법(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말씀이신 하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공생애 삶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목격자들은 그 분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은혜의 수단입니다. 성경을 읽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죄에서 의로, 악에서 선으로, 다툼과 증오와 미움과 분쟁에서 사랑과 화평과 용서와 치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들어간 곳 어느 사회이든 사람이든 살아났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오. 성경이 들어간 곳,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진 개인, 사회, 국가는 번영하고 번창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정신적, 영적으로 모든 면이 온전하고 건강하고, 공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이 우리 민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한말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사회적으로는 극빈과 분열과 증오가 가득차고, 윤리적으로 무질서로 혼탁하고 불의한 한민족에게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들어갔습니다. 성경이 전파되는 곳마다, 가정마다, 개인마다, 교회가 세워진 마을마다 도시마다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무질서가 질서로 변화되고 어린이와 여성들이 교육받고 계몽되고, 무능과 좌절과 절망한 남자들이 희망을 갖고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억압 속에서 속이고 훔치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고 섬기고 협력하는 자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민족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브라질, 르완다 등등.. 심지어 북한까지도 성경이 들어간 곳에서 마음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들어간 개인, 사회, 국가마다 핵폭탄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악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읽혀지지 않도록, 무용지물이 되도록 그토록 애쓰고 있습니다. 과거를 보십시오. 성경이 전해진 로마제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너졌지만, 영적 윤리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중세의 타락한 가톨릭은 성경을 읽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사단은 성경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재발견되고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 말씀이 온 유럽 땅에 읽혀지고 전해졌을 때 중세의 암흑기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중세의 미신과 우상과 교황, 마리아, 성자 숭배에서 참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종교적 의무와 억압과 두려움에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생명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기준이 되고 마땅히 순종해야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완전한 평안과 안식이 도래합니다.
이 성경의 권위에 있어 애매하고 모호한 입장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사단은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품게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고안한 허구일 뿐이고 또 기독교의 수많은 죄와 범죄와 무능성을 부각합니다. 비과학적, 비이성적, 비합리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단의 이런 계교에도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태초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해처럼 비추고 계십니다.
과학과 사단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탁월하지만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무능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헐겁게 하는 데는 영리하지만 우리의 발바닥이 굳건한 안식에 취하게 하는 일에는 무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어느 것도 인간에게 참된 평안과 변화를 줄 수 없고 또 영원한 내세에 확신과 위로 또한 줄 수 없습니다.
2. 죄
신자는 이 땅의 죄와 인간의 부패성을 믿습니다. 죄는 태초에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 오염시켰고 더럽혔습니다. 악마는 원죄에 대한 성경을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세상사람을 속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죄에 오염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은 슬픔과 고난과 고통과 두려움과 염려와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결국에는 죽습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인생은 고해라 합니다. 이는 타종교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왜 삶은 이런 고난과 불만족과 불안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왜 인생은 이런 고난의 연속이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의 고통의 연속일까요? 참선을 하고 명상을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수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렇다’라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명료하게 말합니다. 죄로 인해 고통 받습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의 원죄는 모든 인류의 자손을 죄로 오염시켰고 그 영향력 아래 세상은 있습니다. 태초에 누렸던 평안과 행복, 안정과 기쁨, 만족과 불멸은 죄로 인해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에덴의 동쪽에서 불안과 슬픔과 땀 흘리고 고생하는 존재적 삶, 생명을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 되고 만 것입니다. 모두 죄 때문입니다. 더욱이 죄는 그 결과로 필연적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담부터 모든 인생은 죽습니다. 사망은 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도 악한 죄를 지으면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이처럼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신자는 이 원죄의 심판을 믿습니다.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자연의 순리이고 노화의 결과라 합니다. 죄는 양심이 전하는 진리를 거부하여 타락과 부패성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창조주를 반목적으로 대하고 섬길 의지도 없고, 그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그들은 도무지 천국에 어울리지도 않은 존재일 뿐 아니라 갈 자격도 없는 존재로 몰락시켰습니다. 죄는 어둠과 무지를 붙잡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끕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영원한 죽음으로 몰고갑니다.
사실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두 죽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의 죽음입니다. 명확하게 말해서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생명의 삶’과 ‘영원한 죽음의 삶’이 나뉘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은 천국의 삶이요, 영화롭고 복된 영혼들의 면류관입니다. 반면 영원한 죽음의 삶은 고통과 공포와 불안과 비명이 가득한 지옥의 삶이요 ‘죄 없다’ 하며 악마에게 속은 영혼들의 쇠고랑입니다.
이 땅에서 경험한 고난과 고통은 원형이 아닙니다. 지옥이 고난의 원형이며, 천국이 영화의 원형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잠시 그것을 아주 조금 맛만 볼 뿐입니다. 그것조차도 극도로 견디기 힘들어하고, 진심으로 만족해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에서 이주없이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멈출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확정된 영원한 두 갈래의 삶입니다.
병상에 오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계속적 재발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 시간이 한달, 두달, 1년, 2년으로 지속될 때 환자가 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치료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자살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도피처입니다. 안식처입니다. 해방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육신의 죽음은 순간이지만, 그 후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없는 죄는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이 땅에서 그저 근성으로 여기며 넘어가 버릴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여러분을 속이고 지독히 모욕하고 파괴하고 초라하게 만들려고 그 이빨을 감추고 있습니다. 속임을 당하는 순간 반드시 후회하고 이를 갈며 원망하고 무너지는 때가 옵니다. 죄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생명의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라도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죄를 비단 이 땅에서 감옥에 간 자 악한 자들이 그대로 연결되어 가는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죄의 결과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원죄를 용서받지 못했기 영원한 지옥에 갑니다.
범죄는 내가 악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죄가 있기에 죄인이 되어 죄를 짓습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살인죄나 강간죄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교만과 위선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 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거부하는 존재론적 죄입니다. 신자는 이 죄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으로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태초에 아담이 지은 원죄로 인해 타락한 모든 인류의 위해 화목제가 되셨습니다.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의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범죄하게 되면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짐승, 예를 들면 양이나 염소, 소나, 비둘기 등을 죽여 그 생명으로 죄값을 치루고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제사는 원래의 인간의 품격과 위치를 암시합니다. 인간은 죄와 관련 없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원래 인간은 죄 없으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라고 고백했습니다.
태초에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짐승을 죽여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를 덮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거나 간과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공의는 죄에 대해 반드시 그 심판을 성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죄를 씻어 용서하셨습니다. 이 구약의 제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죄가 대속하는 예표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어린양의 속죄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태초에 아담을 위해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고 그들의 수치를 감춰주신 것 것처럼 말입니다. 창조주께서 범죄한 인간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는 아비입니다. 창조주 아버지입니다. 죄를 씻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이 되어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불완전한 짐승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대신 죄값을 치루셨던 것입니다. 이는 태초 이후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사단조차 상상치 못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기독교의 황금과 같은 찬란함이 여기 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어느 우상이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습니까? 우상은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높임을 받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감히 우상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다신주의 신관에서 하나의 신을 섬긴다라는 사상을 훨씬 능가합니다. 유일신이란 우상이 아닌 우주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허상입니다. 마귀가 만든 귀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화목제물로 죽음으로 대가를 치루심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상이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비하고 인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타락하고 더러운 인간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언뜻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33년간의 삶을 가상적 현현으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처럼 보였지만 사실 초월적 하나님이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사상은 철저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우상화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본질을 흐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더러운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부모 아래 순종을 배우고 가족과 친족과 마을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인간의 슬픔, 괴로움, 가난, 염려, 불안의 모든 감정을 아셨습니다. 또한 기쁨과 우정, 사랑과 감사, 기대와 소망, 등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과 지성과 의지를 공유하셨습니다.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동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아파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며 심지어 육신적 갈등과 욕망까지도 예수님은 모두 아셨고 도전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단에게 받은 3가지 시험은 인간 예수의 욕망을 부추긴 집요한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시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말씀과 순종으로 이기셨습니다.
2003년에 나온 Freaky Friday란 영화가 있습니다. 엄마와 딸이 어느 날 서로 바뀌게 되는 것을 설정으로 한 하이틴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 엄마와 딸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어진다는 그런 스토리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왕과 같이 태어나서 죽었다며, 위대한 선지자로 살다 사라졌다면, 또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적 현현이라면,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와는 전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는 우리의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갈등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셨지만, 그는 우리와 동일한 삶을 사셨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참된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를 완전히 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됩니다. 인간 아담의 원죄가 인류의 원죄로 전가되었지만, 완전한 인간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4. 성령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시면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 이후 장차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세번 째 위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영이시기에 육체가 없고 그러므로 모든 성도 안에 영으로 거하십니다. 그 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 모든 세대, 모든 개인, 모든 장소와 시간에 거하시고 동행하십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서 내면의 회개와 내면의 소망, 내면의 믿음, 내면의 사랑, 내면의 율법을 소유하게 하고 그것을 지키게 합니다. 성경을 온전히 믿고,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하게 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성령을 느끼고 그 분과 영적 기도로 소통하게 됩니다.
성령은 중보자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장막에 있기에 마귀의 꾀임에 속아(마치 아담이 그랬던 것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순종과 생명의 길로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신자는 이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성령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습니다. 성령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도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갈망하고 순종합니다.
5. 성령의 열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외적이고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접붙임을 당했기에 이젠 예수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행위와 활동, 취향 방식, 선택과 습관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하나님께부터 났다”고 하면서 경솔하게 살거나 죄악 중에 사는 것은 위험한 기만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많거나 적거나 성령의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나타나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공동체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성령의 열매와 그에 합당한 태도와 자세와 습관과 선택이 있다면 그 공동체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만약 그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문제가 많았던 공동체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을 먹이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라고 했습니다. 젖만 먹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밥을 먹일 수도 없습니다. 밥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킵니다. 진퇴양난 입니다. 젖을 먹어 자랄 수가 없고, 밥을 먹이면 소화를 못 시키니 자라지 않는 영적 상태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젖만 먹고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제거됩니다.(요15:1~2) 고린도 성도의 사정이 그러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오시범의 본보기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개인, 공동체가 되십시오.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밥을 소화시킬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성경, 죄, 예수 그리스도, 성령, 성령의 열매에 대한 분명한 영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믿고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다섯 가지 신앙의 교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