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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시조'에서
'시조를 위한 인생'으로
《정형시학》 "나의 문학, 나의 인생"에서
한 포기의 들풀로 나서
민족시의 본류요 종가인 시조를 내 문학의 본가로 선택한 지 50년에 이른다.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에게 시조는 아직도 낯설다. 형식을 극복했나 싶으면 시상이 진부하고 시상을 바로 붙잡았나 싶으면 시 정신의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일관된 시적 질서를 초월하여 시대를 관찰하고 민족을 진단하며 미래를 향한 처방전을 내놓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문패만 내다 걸고 게으름을 피운 것 같지도 않다. 지금껏 18권의 발표 시조집을 발간하고 시선집이니 번역시집이니 하는 것까지 합하면 26권이나 되니 말이다. 되도록 많은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려고 애를 썼고 그 변모가 의미하는 존재의 위의威儀와 생멸의 진정성에서 내가 설 자리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많은 방황과 좌절 끝에 이따금 확인하는 내 자리에서 소통해야 하는 시간과 이웃과 역사와 민족은 언제나 당위와 필연을 충동질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스스로 짊어진 사명감과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내가 문학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무래도 태생적 환경의 영향이 클 것이다. 내가 태어난 때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가까스로 휴전이 조인되던 해였다. 국가 전체의 비극을 겪은 뒤이니 총체적 난국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내가 나고 자란 산골짜기의 가난이고 보면 오죽했으랴. 밥은 굶어도 학교는 보내야 한다는 부모님의 의지로 고등학교까지는 향리에서 다녔다.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가서 나무를 하거나 소먹이는 일과 산나물을 캐면서 집안일을 도왔다. 그렇게 힘겹게 지낸 일들이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키워 갔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시절에 우연히 김소월 시집 「못 잊어」를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다양한 감정의 표현들이 야릇한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 내게 시를 읽는 재미에 빠지게 하였다. 갓 혼인을 한 고모부가 고모에게 선물한 책이었는데 밤낮없이 그 시집을 외우면서 외로움을 달랬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구절을 메모하기도 하고 비슷한 감정이 끓어오르면 모작도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이 내가 글을 쓰게 된 가장 최초의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미술반에 들어가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도 순전히 '잘할 수 있는 것보다 잘하고 싶은 것'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이 무렵부터 글 쓰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은 나에게 한 번도 그 균형이 기운 적 없는, 같은 비중의 필생의 과업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시를 흉내 내는 일 이외에 소설 쓰기의 흉내 내기에도 제법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여러 편의 단편을 써서 국어과 선생님께 보이면 평을 붙여주곤 하였는데 고등학교 때만 20여 편을 끄적거렸었다. 물론 야외에서의 사생이 위주였지만 그림 그리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지금 와서 그 시점을 돌이켜보면 두 가지 모두 잘했던 것 같지는 않고 잘하려고 하는 열정만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대학진학을 앞두고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선은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 자체를 권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다음은 선생님들의 뜻으로 시험이나 한번 쳐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는데 문학과 미술 가운데 어느 쪽으로 선택할 것인가도 난제였다. 나는 결국 좋은 문학작품을 쓰려면 국문학과보다 미술대 학이 좋을 것 같다는 권유에 따라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 게 되었다. 사생을 중심으로 한 그림은 그렸지만, 입시 미술은 하 나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가까스로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준비하지도, 준비할 상황도 아니었던 입학이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서 힘겹게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잘할 수 있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로
비록 얼결에 선택하게 된 대학 생활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길라잡이를 해주게 되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 저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신 한국화가 민경갑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같은 시기에 시조 연구가 심재완 박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학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학교 도서관이 영결해준 시조시인 이영도 선생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민경갑 선생은 한국화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고 심재완 선생은 서예 강좌를 통해서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신 이영도 선생님은 도서관에서 읽었던 잡지에 실린 시조 한 편으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세분 모두 대학 시절의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열정을 불태울 충분한 동기를 유발하셨고 예술인으로, 학자로서 몸소 최선의 실천을 보여주셨다.
그중에서도 이영도 선생님과의 만남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72년 겨울 무렵 도서관에서 내 눈을 의심할 만한 시 한 편을 발견하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시사 교양지였던 것 같은데 거기서 화전민을 소재로 한 이영도 선생님의 시조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작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며칠을 두고 묻고 물어 선생님의 서울 주소를 알아내었다. 그리고는 곧장 편지를 썼다. '선생님의 시조를 읽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선생님께 시조를 배우고 싶으니 살펴주십사'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정말로 선생님의 답장이 왔다. '젊은 학생 이 시조를 쓰겠다니 장한 일이다. 머잖아 대구의 어머니 댁에 어머니 목욕시켜드리러 내려갈 예정이니 그때 전화하라'시며 이호우 선생님의 집 전화번호를 적어 주셨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기억하시는 장소라며 안내해 준 곳이 대구역에서 멀지 않는 <회 전다방>이었다. 한 시간쯤은 일찍 나가서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큰길 건너 쪽에서 한 무리의 시선을 쓸어내며 마치 흰 공작처럼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입구까지 쫓아 내려가 서 혼자 오신 선생님을 맞았다. 시종일관 미소로 자식뻘보다도 더 어리고 아둔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바닷가 물거품이 수수만년 돌과 부대끼어 조약돌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와 딱딱한 대밭을 뚫고 올라오는 연 약한 죽순의 용기를 배우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과연 누가 이렇게 이영도 선생님께 특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시조를 배우겠다고 해 서 이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알아듣지도 못하는 시조 대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이 귀한 시간이 그러나 내 생애의 중요한 목표를 세워주게 될 줄은 생 각하지 못했다.
나에게 필생의 과제가 될 시조는 이렇게 다가온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시조에 미쳐갔다. 한 달에 한 번은 선생님께 편지로 지도를 받았고 한 번쯤은 토요일 밤차로 직접 서울에 올라갔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는 경산에서 밤 아홉 시경 군용열차를 타고 새 벽 여섯 시쯤 용산역에 도착하였다. 정상적으로 가면 그렇고 어떤 때에는 열 한 시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군용열차이다 보니 민간인 이 탈 수 있는 객실은 세 칸밖에 없어 어떤 때는 밤새도록 서서 간 적도 있고 또 증기기관차이다 보니 터널을 지날 때마다 석탄 연기가 옷에 시커멓게 묻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새벽에 도착하여 역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포구에 있는 선생님 댁으로 두 번 버스를 바꿔 타고 열 시경에 도착하였다. 선생님이 교회 예배를 하러 가시는 열한시까지 개인지도를 받을 수가 있었다.
아무튼, 나의 시조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어 자기 해소와 관념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해서 졸업하던 해인 1976년 한국일 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이영도 선생의 급작스러운 운명으로 한순간에 모든 인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때 마침 시골 중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잠시 모든 연락이 끊어지는 통에 선생님의 운명 소식은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안타깝고 죄스러웠던지 그 후로 나는 선생의 10주기, 20주기, 30주기, 40주기, 탄생 100주년 등 기념의 해를 잊지 않고 반드시 챙겼다.
문학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들어간 나의 대학 생활은 화가의 길이라는 또 다른 유혹 앞에서 곡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내 가 생각한 문학은 소설을 염두에 두었기에 대학 2학년까지 4,50 편의 소설을 썼고 더러 교지나 학교신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학습과제로 그린 그림들을 팔아서 학비로 보탰으니 그림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경갑 선생은 대학 생활 내내 내가 그 린 그림들을 학교 측에서 사들이도록 도와주셨고 나는 그 돈을 학 비에 보태었다. 그런 덕택에 불행하게도 나는 대학 시절의 그림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소설 쓰기가 시간상으로 매우 부담스러워 수필로 바꾸었는데 3학년 때는 월간 《시문학》지에서 공모한 <전국대학생 에세이 모집>에서 당선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 내 문예반을 창립하고 박철희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 고 반장을 맡은 일도 평생 문학의 기반을 구축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나의 대학 생활은 신춘문예에서 시조가 당선되고 대한민국 국 전에서 대학생으로서 입선하는 등 두 장르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직장인에서 예술인으로
나는 순위 고사라는 시험을 거쳐 청송의 한 벽지 중학교에 부임하였다. 시골 어린이들과 뒹굴며 젊음을 함께 한다는 일이 여간 보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부러 자취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한 끝에 공부에서나 운동에서 두각을 보이는 학교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그렇게 학교생활에 빠져들면 들수록 나로서는 그림과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는 수없이 3년 만에 학교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그림 공부와 문학 수업에 진력하였다. 학교생활에서의 안정감보다 청춘이 쏟아야 할 열정에 더욱 이끌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두리 양식장에서 탈출한 물고기처럼 대책 없이 강물에 뛰어든 꼴이었다.
그러는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대학원을 나와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지만 그림 작업에 필요한 화구를 사기에도 부족하였다. 생계는 중등학교에 재직 중인 아내에게 떠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화실에서 수강생들을 받아 미술 대학에 진학시킨다거나 화가의 길로 이끈 길라잡이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문학과 미술을 분리하여 한쪽을 선택해야겠다는 생 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부담이 2배로 가중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럴 조치를 하지 못한 데에는 아마도 두 가지 중 어느 것에도 자신이 없었던 탓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등단 10년째인 1985년 첫 시조집 『설잠雪岑의 버들피리』를 출간하여 비로소 시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시조집 제목의 '설잠'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명이다. 계유정난이라는 윤리 붕괴와 반역의 참상을 목격한 김시습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승속을 넘나들던 자아실현 의지를 담아내고자 한 작품이다. 당시 내 가슴의 한편에는 부조리한 세상사에 분노하며 은인자중하던 김시습의 모습에 은근 슬쩍 등을 기대고 있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 나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상당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 무렵 역사 인물들 가운데 내가 흠뻑 빠져든 이름을 들어보면 매월당 이외에도 구도자인 원효,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홍범도를 비롯한 의병. 까치호랑이를 그린 민중 화가들이 곧 그들이다. 나는 감히 이들을 나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원효가 부르짖은 화쟁和諍이나 일심一心. 무애無碍의 여러 흔적은 자칫 나를 머리 깎은 스님으로 만들 뻔하였다. 원효가 남긴 수많은 흔적을 찾아다니다 연작 시조로 구성된 시조집 『불이의 노래』를 내기도 하고 좀 더 지난 일이지만 연작시조집 『원효』를 발간한 배경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인 1984년 시조를 향한 나의 또 다른 모험은 <오류 동인>의 결성이라는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 노중석, 문무학, 민병도, 박기섭, 이정환 등 5명으로 구성된 <오류동인>의 결성목표는 시조를 민족 문학의 중심에 자리매김하는 일이었다. 창작은 물론 시조 문단을 형성하고 있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환경을 정리하여 품격 있는 시조의 중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당시 오류가 민족 시의 본류이자 종가요 종손 격인 시조에 내린 진단은 산업혁명의 위세를 앞세운 서구의 자유시 유입으로 극도로 위축된 채 진로를 잃은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류>는 10년간 매달 한 차례 모여서 시조와 시조 단을 진단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렸다. 모방이나 구태의연한 작태를 비판하고 조직이나 시상제도를 악용한 비리의 척결 등 비판의 날카로움은 해가 갈수록 더욱더 섬뜩해져 갔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비판을 겪어보지 못한 시조 단을 일정 부분 긴장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동인 모두가 창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상황이 한계로 10년 만에 동인지 10집과 선집 한 권을 내는 것으로 시조 단의 이면으로 사라져 갔다. 비평을 함께하지 못한 시조의 속성상 매우 이례적인 동인 활동으로나마 발자취를 남긴 셈이다.
물론 나는 시조를 쓰는 일 외에 그리던 그림이 지필묵이 중심인 한국화, 특히 산수화였기에 지역색이 다른 자연을 찾아다니며 사생하는 훈련을 수십 년 거듭하였다. 흔히들 하는 말로 한라에서 백두까지의 산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황산이나 황하, 양쯔강을 수도 없이 실사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노자의 '도법자연'과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사상적 감화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마도 '노장사상'이 종교였다면 나도 꽤나 맹신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상적 동화는 그림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특히 시조에서 사유를 끌어들이고 시각적 구도와 공간적 질서를 형성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처럼 역사와 자연과 사상을 읽고 진단하다 보면 처방과 실천에 대해 아쉬움이 생겨나기 마련이어서 나 역시 갖가지 단체 일을 많이 맡기도 하고 또 만들기도 하였다. 문학 쪽이나 미술 쪽 모두에서 다양하게 단체장의 역할을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어떻게 내가 그런 일들을 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매우 내성적이고 나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면에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지나치는 일은 더욱더 용납이 안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일정한 가드 라인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흔히들 하는 말로 생활이 안정적인 가두리 양식장을 벗어난 목적이 창작이었기에 글 쓰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에 큰 지장이 된 다고 판단되는 일은 절대 맡지 않는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나는 그 결심을 지켰다.
지금도 계간 《시조21》 발행, 이호우. 이영도시조문학상 운영, 사단법인 국제시조협회 이사장, 예술 공간 <목언예원> 운영 같은 일들을 주도하고는 있지만 내 작품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주의 것들이다.
아주 작은 시골에서도 나라를 대표하는 시조창작의 촉진제가 되는 시조 잡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시조21》 발행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 경제적으로는 적잖게 부담되는 일이었지 만 지금은 최고 권위의 잡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호우. 이영도시조문학상 역시 시조 문학상의 오누이 시인의 시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뜻과 시조 문학상의 권위를 확립하자는 취지를 살려 설계에서부터 참여하여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그 일을 맡아오고 있다. 게다가 항상 최고의 상금을 확보하여 시조 문학상의 권위와 품위를 주도해 오고 있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근년 들어 집중하고 있는 관심사는 민족시인 시조의 국제화 작업인데 이 사업을 추진 하기 위하여 법인을 설립하고 격년제로 <청도국제시조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지금까지 10권 이상의 번역 시 조집을 발간하였고 우선 한, 중, 일 삼국의 정형시 교류에 집중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은 필생의 사업이 될 것이다.
앞으로는 그간 수집해 온 시조 문학 자료들을 정리하여 문학관 을 세우는 일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이미 상당 부분 진척이 있어 머잖아 가시화되리라 여겨진다. 이 일은 아마도 서양문물에 범벅이 된 채 역사의 후미에서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주인공들에게 민족시의 자긍심을 잇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조, 100년 뒤를 생각하며
시조는 정형성이 생명이다. 굳이 '정형성'이라고 말하는 뜻은 한 시나 하이쿠와 같이 고정불변의 자수형 정형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성을 지닌 정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형의 율격에 불가피한 자유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런데 자유시가 도입되면서 이 '불가피한 자유'의 범주가 확대되고 인쇄문화의 보급에 따른 시각적 배려라는 명분의 생갈이가 심화하면서 시조의 정체성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조를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잠깐의 혼란에서 시조에 대한 곡해를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수수만년 도도하게 흐르 는 강이 잠시 범람한다고 그 강이 바다가 되지는 않는다.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강은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인간의 형이상적 선택문화의 하나인 시조가 자연의 섭리와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선택되고 있는 한 섣불리 들판을 강으로 생각하고 치어를 풀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시조를 바라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생각은 오늘의 시조는 조선조의 고목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조가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미 전성기를 보낸 고목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지금 우리가 받들고 기리고자 하는 시조는 무형문화재가 아니라 이 시대에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도 전승의 방법을 취하는 마당에 인류문화유산이야 말해 무엇하랴. '시조'라 는 유전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 그릇에 날마다 새롭게 변화 되는 세상사를 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의 말, 한글문학이 아닌가. 우리말을 표기할 한글이 창제되기 전부터도 불리었고 심지어 남의 글을 빌어 표기해두었다가 다시 한글로 복기한 거룩한 문화사였으니 그 고결한 품격이야 말해 무엇하랴. 따라서 한글이 우리네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는 수단으로 남아 있는 한 시조 또한 현재진행형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나에게 그 같은 시조는 지식과 문명에 흩뜨려진 나의 본성을 찾아가는 수단이자 방편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 시조를 선택하였지만, 차츰차츰 시조를 위한 시조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가능하다면 나 자신이 시조를 위한 도구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기울여온 시조 바로 세우기의 모든 노력은 다가올 미래의 건강한 시조 숲을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다가올 100년 뒤의 시조의 건강성을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건강한 농사법으로 다가서야 한다. 되도록 자생력을 키워주되 흙을 비옥하게 할 퇴비가 필요하다. 무분별한 화학비료나 가지치기로 우선의 욕심을 채운다면 정상적인 생명력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가뜩이나 이 땅에는 이미 많은 귀화 식물들이 토종을 밀어내고 자연환경을 심각하게 잠식하고 있지 않은가. 농약을 뿌리지 않고 도. 또 가지치기하지 않아도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다시 100년이 지나도 외세에 물들지 않고 이 땅의 주인인 시조의 숲을 가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