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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격은 지성(知)과 감성(情)과 의지(意)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외부 세계와 만나는 첫 접촉점은 대개 감성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감성이 건강하면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감성이 흔들리면 삶의 여러 부분에도 함께 영향을 받게 됩니다. 태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지성이나 의지는 형성되지 않았지만, 엄마의 분위기와 건강 상태, 정서적 느낌은 고스란히 태아에게 전해져 영향을 줍니다. 감성은 지성과 의지보다 먼저 외부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성이 건강하게 자리 잡으면 지성과 의지도 함께 건강하게 형성되고, 반대로 감성이 흔들려 있으면 지성과 의지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를 일컬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 하고, 이 희로애락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고, 표현하고, 또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건강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헤아려 알지는 못합니다. 어떤 감성의 토양에서 자라셨는지, 또 어떤 감정의 상처와 아픔을 품고 계신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오늘 우리 삶에 나타나는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분노, 깊은 근심과 염려는 우리가 자라온 감성의 토양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감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감성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고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감성을 억누르며 살아온 우리
문화와 관습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감성보다 지성과 의지의 중요성을 더 많이 배워 왔습니다. 서양 문화에서는 감성적인 행동을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 보고, 이성적인 행동을 합리적인 기준으로 여기는 흐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감성을 소홀히 여기는 데 익숙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양의 유교 문화는 예(禮)를 따라 감정을 절제하는 풍토를 더욱 강하게 심어 주었습니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한 번,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한 번,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 한 번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여자는 얌전하고 조신해야 한다”는 통념, 그리고 옛 만화영화 주제곡에 담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와 같은 정서까지, 이런 통념들이 우리의 감성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을 오랫동안 가로막아 온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회적 풍토와 문화 속에서 감성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안 돼”, “음란한 생각을 하면 벌 받아”, “참고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라는 권면들이 우리 안의 감정을 향해 던져지곤 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어려움은, 우리 안의 이런 감정들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신경생물학적 반응입니다. 맛있는 것을 보면 침이 고이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끌리며, 부당함을 느끼면 화가 나는 것처럼, 이는 우리 몸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반응입니다. 더욱이 원죄의 영향 아래 있는 이런 감정을 어떤 규범이나 원칙만으로 억누르며 다스리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자”는 태도가 온전한 답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며 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감정에만 모든 것을 맡긴 채 극단으로 치닫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대개 허무와 허탈함, 그리고 깊은 자책과 두려움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에 끌리는 온갖 부귀와 쾌락을 누린 뒤 남긴 고백,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라는 고백은, 감정을 따라 끝까지 가 본 사람의 솔직한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지키라’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의지적인 노력만으로 감정을 눌러 복종시켜야 할까요? 그럴 때 내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불편함과 눌린 감정들은 외면해야 할까요? 그 감정을 나쁜 것, 음란한 것, 불의한 것으로만 규정하며 평생 억누르고 통제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런 감정의 통제와 억압이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감정은 우리 존재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부분인데 말입니다.
2. 표면의 감정과 그 아래 흐르는 진짜 감정
우리는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곧 내 감정의 전부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항상 내 진짜 마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정은 특정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표면적인 반응, 즉 자율신경계의 반응에 가깝습니다. 분명 감정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내 진짜 감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한 친구가 뒤에 와서 반갑다며 장난으로 머리를 툭 쳤습니다. 맞는 순간에는 반응적으로 화가 납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친한 친구입니다. 이내 분노라는 감정은 반가움과 기쁨이라는 감정으로 바뀝니다. 이 짧은 순간에 분노와 기쁨, 두 감정이 모두 나타나고 순식간에 바뀝니다. 이렇듯 감정이란 매우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은 그 색깔과 모양이 바뀝니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감정은 안개와 같습니다. 마음의 앙금도 어느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지고, 환희와 감격도 어느 순간 바짝 마른 사막처럼 되어버립니다. 감정이란 가장 강한 타격을 주는 느낌이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바뀌는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감정이란 이런 것입니다. 모두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모두가 순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순간 표출된 감정에만 이끌려 다니면, 우리는 쉽게 후회할 표현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욱’하는 감정이 내 감정의 전부는 아니고, 어느 순간의 감동과 감격이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를 섬기는 종은 될 수 있어도,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 자체를 없애거나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정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진짜 감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감정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 순간 느낀 서운함과 낙심, 억울함은 결코 거짓된 감정이 아닙니다. 억지로 숨기려 할 필요도, 무리하게 좋은 감정으로 덮으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책할 이유도 없습니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첫 반응일 뿐 감정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감정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걸러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흙탕물처럼 뒤섞인 감정을 잠시 가라앉혀, 고요히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 말입니다. 감정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 또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감정이 가라앉고 정말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고 찾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남는 감정이 진정한 감정입니다.
저는 말라기 이후 하나님께서 사백 년 동안 침묵하신 기간을 ‘하나님의 감정이 정제된 시간’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이 신학적으로나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어울리는 표현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제 감정의 단편적 이해로 본다면, 하나님을 배역하고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의 백성이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 당신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따져 묻던 그 앞에서, 하나님은 사백 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백 년은 그 공의로운 아픔의 찌꺼기를 가라앉히시고, 그 안에 있는 참된 감정 곧 백성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다시 드러내신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그대로 인간적 적용은 어렵겠지만, 인간인 우리의 사고로서는 이렇게 헤아려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는 결코 신학적인 이해는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도 격앙된 첫 반응 너머에,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더 깊고 참된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딪히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첫 반응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 너머에 있는 깊은 실체의 감정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 감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정의 안에 있는 감정의 근원이고 본질입니다. 감정은 모두 정직하고 진실하지만, 그 정직과 진실함이 곧바로 우리의 삶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이미 원죄의 영향을 받고 있고, 그 감정으로 인해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후회하게 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직한 감정이라도 그것에 곧바로 지배받기보다, 하나님 안에서 기다림을 통해 여과되고 회복되어 정화된 감정을 붙잡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본래 허락하신 감정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됩니다.
3. 다윗 — 하나님 앞에서 감정을 정제한 사람
성경에서 이 일을 가장 잘 해낸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다윗을 떠올립니다. 시편에 담긴 그의 감사와 찬양의 시, 그리고 고통과 탄식을 쏟아 낸 시들은 모두 그의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 정제되고 여과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 내고 정리하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유익한 감정을 되찾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은 수치와 분노, 두려움과 감사를 하나님 앞에 가감 없이 토해 냈습니다. 입에 담기 쉽지 않을 만큼 솔직한 아픔과 원망, 탄식까지도 있는 감정 그대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마주하며, 정제하여 정리된 마음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물론 다윗이 늘 참된 감정에 이끌려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순간의 욕정에 이끌려 넘어졌고, 그 일을 감추려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연약한 순간을 겪으며 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통해, 본성적 충동적인 감정에 이끌려 살아갈 때 삶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그와 그의 자녀들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끝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는 아픈 사건들을 겪으며, 다윗은 자기 감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 충동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삶이 되는지를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도망자의 시절에는 그토록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렸던 그도, 감정이라는 강력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후 다윗은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여과된 감정으로 사는 삶을 결단합니다. 다윗이 나이가 들었을 때, 신하들은 그의 곁을 돌보게 하고자 수넴 여인 아비삭을 그의 처소로 들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열왕기상 1:1-4). 더 이상 그는 본성의 감정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지닌 큰 힘을 알기에 신중히 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감정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진실하지 못한 것이라 말하며 답답해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더 큰 유익이고, 이후에 닥칠 여러 아픔을 미리 막아 주는 은혜인지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안은 채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안에서 여과되지 않은 채 사람에게 먼저 감정을 쏟아 내다가 관계가 상하고 더 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큽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마음속에 후회와 그로 인한 여파가 몰려옵니다. 내뱉어서 잠시 시원했던 것보다 더 큰 파장이 뒤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다리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찌꺼기를 걷어 내고 다시 감정을 바라보면, 별다른 것이 아니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 하나님의 만지심과 위로하심을 놓쳐버립니다. 잠시 감정에서 물러나 그것을 여과하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묻기만 해도,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마음을 관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정에 즉각 반응하지 말고 기다리라 하시는 것은, 감정을 덮고 있는 먹구름을 걷어 내는 작업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 가운데 가장 먼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모든 것을 진짜라고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반대로 기쁘고 즐거울 때조차도 그 감정은 대개 표면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을 조급하게 따라가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릴 때, 우리는 그 아래 잔잔히 흐르고 있는 참된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정불화로 마음 아파하는 자녀들을 떠올려 봅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부모의 다툼을 보며 아이들은 분노와 슬픔, 반항심까지 품게 됩니다. 만약 그 표면적인 감정에만 이끌려 살아간다면, 그 아이들의 삶은 위태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 아래, 아이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화목과 사랑’입니다. 분노와 서운함으로 뒤덮인 듯 보이는 마음 깊은 곳에는, 사실 사랑과 화목을 향한 간절한 바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진짜 마음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5. 모든 감정을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고 그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표면적인 감정에 쉽게 휩쓸리며, 그로 인해 삶이 고통 가운데 놓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순간의 분노로 서로를 대적하다 스스로 무너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십니다. 또한 순간의 연약함으로 넘어지고 수치를 당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정도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사랑과 기쁨은 물론, 슬픔과 분노와 욕망까지도,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좋고 나쁨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뿐 아니라 슬픔과 분노까지도, 경건한 마음뿐 아니라 연약한 욕망까지도 하나님께 그대로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내어 놓고 기다리십시오. 가만히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물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게 하십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감정이 무엇이고, 또 그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간순간 밀려오는 감정의 파편에만 머물러 살지 마시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참된 감성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