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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찾아온 손님과 함께
강병철(소설가)
그는 대가족 8남매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조치원 종촌리(現세종시) 싯골 언덕바지 너머 복숭아 과수원이 그의 집이어서 식솔들 모두 틈만 나면 비탈밭 과일나무에 매달려 열매를 솎고 따서 크기별로 상품을 나누었다. 주렁주렁 태어난 8남매 대부분이 연년생이라서 바깥에 나가지 않고 끼리끼리만 놀아도 충분히 즐거웠다. 저무는 오솔길에서 큰언니가 솔가지 꺾어 지휘를 하면 나머지 동생들은 돌림노래나 중창으로 번갈아 부르면서 저녁놀을 맞이했단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유년이었다.
부친은 기획 능력이 있었고 쾌활한 기분파였다. 선술집 막걸리 몇 잔 술에 얼큰해지면 호언장담도 잘 던졌다. 신작로 어디쯤에서 흔들리는 몸을 오그르르 달려와 팔짱 부축하는 피붙이들에게.
“공부만 잘해라. 아부지가 자식들 죄다 대학까지 가르친다. 그까이 꺼. 충분하닷!”
그런데 자식들 모두 공부를 잘했으니 큰소리친 책임 부담이 난감한 일이다. 다행이랄까, 형제들은 대개 국립대를 들어갔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도 뛰면서 저마다 헌신과 절약으로 짯짯한 미래를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천성적으로 착한 심장들에게 닥친 격동의 시국이 문제였다. 신군부의 제5공화국이었고 대학가와 노동 현장이 점차 최루탄과 화염병의 가열찬 공방으로 치열해질 즈음이라서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의감 많은 형제들 역시 도서관을 나와 스크럼 속에 몸을 던지다가 징계도 받고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그도 당연히 언니 오빠의 뒤를 이어 전태일과 루카치를 만나며 항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대자보도 붙이고 세숫대야에 돌멩이도 날랐다. 그랬다. 신입생 초기에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낭송해서 인파의 갈채를 받던 당찬 젊음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어린 시절에 미진이 고모와 어울려서 잘 놀았단다. 눈이 오면, 비료 포대에 짚을 넣어 눈썰매를 신나게 타기도 했지. 또 여름이면 나무에 올라가서 익은 자두를 따서 맛있게 먹기도 했단다. 그러다 갑자기 고모의 몸에 장애가 생겼어. 처음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결국은 잘 적응해 지금은 복지관에 다니며 치료도 받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등 혼자 밝게 잘 살아가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 「내가 선물이라고!」 부분
초딩 주인공 김민아가 학급 모둠원끼리 ‘우리 동네 맛집 지도 만들기’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결정된 가족 모임 통보로 교실의 모둠에 참석하지 못하는 스토리의 연장이다. 김민아의 아빠가 공주 아파트에 들러 미진이 고모를 태우고 합류하여 대가족 전체가 모여 놀이마당을 여는 줄거리이다. 안부를 묻고 노래와 춤이 디테일하게 어우러지니 화목한 풍경이다. 여기서 삽화처럼 잠깐 등장하는 장애를 지닌 미진이 고모가 바로 동화 작가 박도화이다.
그는 원래 초딩 시절부터 우등생이었고 웅변과 노트 필기를 잘해서 갈채를 받던 유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입시학원에서 현대문학 강사로 임할 즈음에도 인기가 좋아 수강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덜 아플 때만 해도 학원 원장이 그를 찾아와 다시 입시 강단에 서길 부탁했으나 몸의 기울기가 갑자기 더 심해지면서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순탄하던 길목에 장벽이 막혔으나 늘상 화사하게 웃었다. 발음이 어눌해지고 보행기를 짚어야 겨우 이동할 수 있었으나 방싯방싯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 웃음의 힘으로 아파트 방 한 칸에 논술 공부방을 만들었다. 두세 명으로 시작한 논술 교실이 입소문을 타고 꿈나무 수강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독립한 것만으로도 재기의 보람을 느끼며 자료를 만들고 아이들의 초인종을 기다렸다. 「꿈이 피어나는 방」에서 장애를 가진 고모의 논술방 이야기가 등장하는 그 공간이다. 자기 방에서 논술방을 운영하자 처음의 거부감을 가졌던 수찬이가 고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녹이고 함께 공부하고 새로운 소통을 시작한다. 타인의 눈을 통한 자전적 스토리이다.
나머지 시간은 책에 파묻혔다. 언제부터였나, 대학 시절에 몸담았던 사회과학 서적보다 시와 소설 그리고 특히 동화를 읽는 쪽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책 속에 길과 희망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제 내 글을 써야겠다.’
그렇게 동화를 시작한 게 새로운 행보이다. 창작의 난관도 기쁘게 받아들였으니 자판 두들기는 속도가 느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8년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늦깎이 동화집 「내가 선물이라고!」를 출산한 것이다. 장애인들의 스토리지만 갈등보다는 화해와 해결의 도정이니 그게 작가의 타고난 천성이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다르지만, 자전적 체득을 토대로 장애의 몸들을 배경으로 한 절반의 연작 드라마가 탄생한다. 슬픈 환경이지만 모두가 다정다감하다. 항아리 응달 아래 더 빛나는 부분을 찾아내어 깊은 사랑으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저쪽에서 자꾸 달아나려는 아이를 엄마가 과자로 어르며 안은 채, 자원봉사자가 손등에 토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어느새 변한 자기 손등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 신기한 듯 자꾸 바라보았다. 그림이 그려진 손등이 보이도록 아이를 안은 모습을 찍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은주 누나와 나도 손등과 양 볼의 그림이 잘 나오도록 자세를 취하며 셀카를 찍었다. 나와 아이들과 엄마들, 자원봉사자들까지 더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 「복실이도 기르고 물고기도 기르고」 부분
컴퓨터 선생님인 장애인 아버지를 따라 복지관 바자회에 방문했다가 그 공간에서 제자들에게 존경받는 부친의 모습을 보며 깊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 달아나려는 자폐증 소년이 짧게 등장한다. 그뿐이다. 아이는 손등에 찍힌 문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어머니는 연신 스마트폰 사진을 찍으며 성장의 기록으로 남긴다.
이것이 최근 한반도를 강타하는 ‘우영우 신드룸’과의 차이점이다. 흘러간 영화 『레인멘』 이후 자폐 환자가 곧 천재로 오인되는 성공 드라마를 차단한다. 극소수의 비현실적 카타르시스를 피하고 장애인들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적 울타리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는 ‘심 봉사가 눈을 뜨듯’ 고쳐서 새 세상을 만나는 행운만이 목표가 아니라 함께 껴안고 더불어 사는 것이다. 『바보 온달』이나 『시집가는 날』처럼 깜짝 반전을 통한 행복 쟁취가 아니라 상황을 인정하고 틈새의 평온한 일상을 찾아내니 그게 ‘작가의 눈’이다. 그래서 박도화 작가는 불시에 찾아온 장애를 ‘손님’이라 부른다. 끊임없이 격려하고 희망을 설득한다.
“그건….”
“난 부모님이 이혼할까 봐 그게 젤 겁난다.”
나는 화들짝 놀라 갑자기 어두워진 표정의 수빈이의 손을 잡았다.
“아니! 그렇게 심각해진 거니?”
“으응, 아빠 사업이 나빠지면서 더 안 좋아졌어. 고민도 되고 방황도 했지만, 해영 언니의 말을 들으니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게 최선이겠더라고. 어른들의 일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고.”
- 「베트남 쌀국수 파티」 부분 -
은실이가 자학적 푸념에 빠지자 행복한 줄만 알았던 수빈이가 ‘부모의 이혼 우려’를 내세우며 슬픔에 동참하며 위로하는 장면이다. 은실이는 장애인 아버지와 베트남 출신 엄마 사이에 태어난 다문화 가정의 소녀이다. ‘이중언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을 한 후 친구들의 축하를 받고 집에서 베트남 쌀국수 생일 파티를 연다는 내용이다. 상처받은 꿈나무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힘을 얻는 것이다.
「영원한 대장」에서도 준석이의 동생 준영이가 자폐증으로 등장한다. 명랑 여성이었던 엄마의 기가 완전히 꺾이지만 순응하고 점차 환경에 적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준석이가 다니는 복지관 사람들이 집에 방문하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본다. 그중 후천적 장애인인 ‘깜장콩’이란 별명의 아줌마 이야기를 들으며 가족들의 일상에 동참하게 되는 장면도 잠깐 나온다. ‘그러니까 영원한 대장’이란 자폐증 동생을 영원토록 보살피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된다.
관람객 중 몇 명이 날 유심히 쳐다보고는 ‘불편한 몸으로 이런 데까지 다 나왔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새롭고 신기한 경험을 했으니깐 괜찮아.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어도 바깥 구경을 더욱 많이 해야지!’라는 오기가 다 생기더라.
- 「사랑하는 엄마에게」 부분
희귀 난치성 질환인 근육병에 걸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망자 소년 은찬이가 이승을 회고하며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이다. 날이 갈수록 쇠해지는 딸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네가 혼자 앓는 줄 아니? 이 엄마도 함께 앓는 거야.”
절망에 빠지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눈물겹고 눈부시다. 엄마와 함께 거쳤던 한반도의 공간들 모두가 회상 기법으로 등장한다. 서천생태공원, 남해안 통영과 대천 앞바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엄마와의 동행을 떠올리는 것이다. ‘기억이 곧 영원한 감동’임을 증명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인 ‘안녕’으로 마감한다. 서늘하다.
다음의 「우리 지리산에서 만날까」는 몸을 다친 초딩 복학생 하영이가 힘든 학교생활 중 우연히 지리산 등반 캠프에 다녀오는 이야기이다.
“하영아, 남자 친구가 날 못 찾나 봐. 잠시만 기다려 줄래. 안전한 가장자리에 휠체어를 고정해 둘게. 잠시 후면 돌아올 거야.”
금방 올 것 같아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난 오고 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역시 그 언니는 진심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이 없었나 봐. 내 예상이 틀렸으면 했는데….’
그래도 나를 위로하는 것은 높푸른 하늘, 더없이 맑은 공기,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는 나무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빛깔의 꽃들이었다. 언제 또 내가 이런 자연 속에 함께 있어 볼까.
(중략)
이미 내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이후부터는 묻는 말에만 답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나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남자 친구와 언니하고만 대화하기 바빴다.
“송희야, 약속 장소를 정할 걸 잘못했어. 만나느라 혼났잖아. 그런데 송희야, 예전에 지리산 와 본 적 있니? 이 길 말고 다른 데로 가면 경치가 더 좋아. 우리 다음에는 둘이서 그 길로 가보자.”
- 「우리 지리산에서 만날까」 부분
지리산 캠프의 자원봉사자 여대생이 장애인과의 동행 봉사 시간을 데이트 공간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재빨리 퇴로를 열면서 갈등 구조를 마감한다. 휠체어를 들어올려 노고단 정상에 오른 후 감동의 울음을 터뜨리니 그게 자신만의 카타르시스이다. 등산 공간에서 만나는 또 다른 장애인 친구들 그리고 그 보호자들의 감성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등장하니, 독자들께서도 찾아보시길 당부한다.
「안녕, 할머니」는 주인공 다솜이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과 가족들의 표정 관찰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도 장애를 지닌 은희고모가 아주 잠깐 등장한다. 살아생전 타인들에게 단 한 마디의 모진 말도 던지지 않았던 작가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배경도 보인다.
다솜아, 저번에 엄마랑 애니메이션 『코코』 봤던 때 기억하지? 세상에서 없어져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은 후 세계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잖아. 엄마는 죽은 후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야만 제대로 사랑하며 살 수 있으니깐.
- 「안녕, 할머니」 부분
마지막으로 작가의 문장 샘물인 동심(童心)의 원천을 점검해야겠다. 작가는 10년가량 논술방을 운영하면서 특히 아이들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때로는 제도권의 스승들보다 아이들을 더 깊이 접하면서 시나브로 그들의 언어를 체화시켰다. 만나는 대상의 사연들을 내 몸으로 만드는 게 작가의 습이다.
-다솜: ㅇㅋ. 내가 약속 펑크 낸 거고 틱톡에 올릴 건데 당근 맹연습!
-예은: 할머니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다솜: 글쎄……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 계속 고민 중.
-예은: 나중에 얘기 더 전해줘. 우린 틱톡 잘할 수 있는 아이디어 찾을게. 파이팅!
-유나: 노래랑 파이팅!
-누리: 마지막까지 힘내! 블랙핑크의 합체를 위해!
- 「안녕, 할머니」 부분
「함께 먹는 밥상」 주인공 하늬와 따로 사는 직업군인 아버지 그리고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엄마가 등장한다, 위층과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겪을 뻔했으나 휠체어를 탄 이웃을 만나면서 함께 밥 먹는 시간으로 좋은 이웃이 된다는 내용이다.
“걱정 마세요. 이모가 글쓰기 모집 전단을 써주면 저와 친구들이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주변 아파트, 근처의 전원주택에 다 붙일게요. 또, 학교 내에서도 책임지고 홍보할게요. 이모, 얼마 안 남은 이번 방학 기간에 독후감 특강을 해도 호응이 좋을 거예요.”
“언니, 용기를 내세요. 우리가 있는 힘껏 도울게요. 그리고 하늬 아빠 오면 언니네 집안을 좀 손봐달라고 해야겠어요. 공부방에도 편리하도록”
- 「함께 먹는 밥상」 부분
그는 모든 갈등의 출구를 만들고 빠르게 해결한다. 휠체어의 층간소음 문제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소소한 갈등도 가급적 짧게 처리한다. 베란다에서 넘어져 위기에 처한 미숙이모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면서 더욱 끈끈한 이웃으로 자리잡는 장면도 작가 특유의 해결책이다. 막힌 벽을 열고 함께 밥을 먹을 때 행복한 울타리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듯 그의 첫 동화집은 소소한 갈등들이 소통을 통하여 가슴을 열고 스스로의 해피엔딩을 설정하고 긍정적 해결로 결론을 맺는다. 대개의 작품들이 평면구성으로 반전이 약하니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넘어야 할 장벽은 진실한 토로를 통하여 상대를 설득하니 이것이 박도화 작가의 한계이자 특장이 된다. 소소한 일상들이 이야기가 된다는 편안함은 따로 논할 부분이다.
그러니까 슬프고 아픈 사연의 글들은 다음 책의 과제가 될 것이다. 첫 동화집처럼 착하고 다감한 글들을 계속 살리되 때로는 ‘매의 눈’으로 악역과 불행한 구성도 과감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자, 이제 늦깎이 작가의 새로운 도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궁금하다. 첫 출산물을 만든 그가 여전히 먹머루 맑은 눈빛의 스승으로 이어갈지 아니면 작가만이 지닌 새로운 영역을 봇물처럼 터뜨릴지는 순전히 그의 숙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