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박철영 시인, 평론가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이승하 시> 작품론
시적인 것에 대한 현실 인식
<시인. 문학평론가> 박철영
매번 부딪치는 일들이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듯 시인에게 다가오는 대상이 죄다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요건과 구성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처럼 시인의 오감을 자극하는 감성의 개입이 있을 때에서야 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담아내야 할 의미가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을 각성시키거나 비의를 장치하여 해독해야 할 정도로 왜곡을 가해 난해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 일반을 초월한 능력이나 그들만의 언어 학습(경험)으로 습득한 깊이를 낯섦이 아닌 언어의 모호성을 더하여 시의 항목으로 내세우려 하는 것도 타당치 않다. 삶의 부분을 시적 대상으로 포유 해 자칫 소외되기 쉬운 현실 속 인간의 실존과 존재 의미를 담담하게 발설하여 의미까지 묻는 시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시는 대상과 사유 속에 함의된 의미를 변별된 문장을 통해 표면에서 내면으로 넓혀가는 작업이다.
매번 고민하는 것이지만, 금번 이승하 시인의 시가 갖는 의미를 그런 범주 안에서 생각해보고자 했다. 시가 물체의 탄력성처럼 사실적인 삶의 지점에서 응축될 때 장력의 힘을 강화시켜 상상력의 긴장을 증폭시킨다는 것까지 알게 한다. 전 세계인을 볼모로 해를 넘기면서도 해소의 기미가 쉽지 않고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코로나 19로 심신이 지치고 피폐해져 있다. 그런 고달픔과는 아랑곳없이 지상의 봄은 잘도 찾아와 천지간에 매화며 산수유가 만발하고 곧이어 길가 벚꽃마저 옥수수 알갱이가 하얗게 팝콘 터지듯이 자고 나면 마른 가지 끝이 환하다. 그런 봄날의 기쁨도 팍팍한 현실 앞에서 다독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요즘이다. 하루하루가 사는 것이 힘들다 해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김없이 새벽 일터로 향하는 무거운 걸음들은 봄날의 들뜬 풍경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지만 시지프스의 예견된 고행처럼 그 길을 숙명처럼 외면할 수 없다. 반복되는 일상은 족쇄처럼 채워진 노동의 무게만큼 가중되어 가벼워질 기미가 요원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재한 세상을 보며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현실은 인내의 한계를 쉽게 초과해버렸다. 지금껏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대입해보지만, 미약한 인간의 의지로 극복하길 소원한다 해도 더 많은 침묵의 시간을 고통으로 예비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인간의 욕망으로 충만한 미래의 시간에 상상할 수 없는 괴물(코로나 19)이 나타나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 인간의 욕망을 유예한다면, ‘희망이 없다’는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아직 ‘희망은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한다.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도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사랑이다. 어떠한 환경에서든 그것만은 해체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생존을 위한 강력한 DNA이기 때문이다. 다섯 편의 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의 변화를 통해 벌어지고 있는 일상을 연극 무대처럼 보여주고 있다.
유리벽 저쪽에 누이동생이 앉아 있다
휠체어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다
오빠야…… 머리 다 센 파파할머니가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할까 힘을 내라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붙들어 지킬 신념이 죄다 사라졌다 그게 죄다
살아 있으니 억지로 살고 있는 것
살게 하니까 간신히 살고 있는 것
걸어온 길은 새벽녘 안개처럼 어슴푸레하였다
김천시 성내동 201-1번지에서 20년을 견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인내는 늘 쓰디썼고
광증의 나날은 빚 독촉처럼 가혹하였다
면회는 오래 금지 겨우 전화 1년 만에 화상통화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돈을 보내고
멀리서 전화가 오면 돈 돈 돈 쯧 쯧 쯧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하며 오라비는 유리벽 이편에서
-<유리벽 저편> 전문
‘유리’란 물체를 활용해 다양한 생활의 편의처럼 언어의 변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남성 위주 사회 체계에서 여성에 대한 성 차별로 상징되며 역할의 한정을 뜻하는 ‘유리 천장’도 ‘유리벽’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변용된 언어 이전의 ‘유리’란 물체의 생성은 석영, 탄산소다, 석회암을 섞어 화학 작용을 거쳐 형성된 투명한 물질로 단단하지만, 잘 깨지는 단점이 있다. 유리는 공간의 분리를 용이하게 하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정돈된 현상을 일시에 망가뜨릴 수 있는 단점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먼저 유리라는 물체의 칸막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실체를 사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상을 수시로 관찰할 수 있고 전지적인 투사까지도 자유롭고 가능하다.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는 불편을 불러올 수 있고 과잉 시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환경에서 유리벽의 용도는 다행스럽게 단절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필요에 의해 지켜봐야 할 대상에게는 효과적이고 유용한 물체임에는 부인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는 사람들과의 분리가 당연시되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유리벽 저편> 이란 시도 작금의 코로나 19로 인해 야기된 현상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단번에 무너뜨려버린 것에 대한 공포는 아직도 전 지구적인 두려움의 대상이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 현상을 요구하고 그 환경에 적응해가야 한다. 자본주의적 사고와 무한 경쟁으로 이룬 문명의 향상된 생활 편리가 일순간 붕괴되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 19라는 재앙적 혼돈으로 인해 가슴 아픈 실상이 시인의 가족인 “유리벽 저쪽에 누이동생이 앉아 있다”며 현실로 다가온 것 같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전염을 우려한 격리를 당할 수밖에 없고 냉엄한 국가에서 통제하는 사회 규칙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리벽’은 단순하게 병실 안 환자와 보호자 사이를 가로막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국가권력’이거나 ‘코로나 19’라는 괴물 바이러스일 수도 있다. 한 소시민의 삶을 저지하고 있는 힘을 가진 유리벽을 통해 시인은 누이를 바라본다. ‘유리벽’ 너머 위기에 처한 누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시인은 안타까울 뿐이다. “살아 있으니 억지로 살고 있는 것/ 살게 하니까 간신히 살고 있는 것”이라는 세기말적 바이러스로 변해버린 팬데믹의 현실이라는벽에 단단히 갇힌 누이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전면적인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유리벽 저편’이라는 현실을 통해 실감토록 한다. 위험한 일상은 관심을 유발해 휴대폰이나 TV라는 영상 매체를 통해 실시간 전파를 탄다. 인간은 태초부터 존엄한 존재였다고 믿었지만,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 그 순간부터 더는 그렇지 않다.
커다란 모니터가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래프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그리스 비극을 가르친다 몇 가지 콤플렉스의 뜻을
지금 그리스는 확진자가 넘쳐나는 비극의 땅
나 아직 살아 있소 몸은 많이 아프다오
그래프 경사가 지면 위험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가슴에도 입에도 튜브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인공호흡기 배액튜브들 달고 살아가지만
한때는 신사였던 나, 용감하게 모험적인 거래를 했고
고액을 배팅하기도 했다 운도 많이 따랐고
신나는 팁의 나날,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이 많은 침상들이 좌우로 정렬 좌우로 참상
다들 살아 있는 것이 용하다 의사선생님이 참 용하다
혈압이 오르면? 맥박이 빨라지면?
체온이 상승하면? 산소분압이 감소하면?
인생길 황급히 올라간들 천천히 내려온들
저승길 예상외로 빨라진들 다행히도 느려진들
내가 확진자가 될 줄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
사람 많은 데는 가지도 않았고 동선 알리바이
맹세할 수 있다 CCTV가 증명해줄 것이다
세상은 이제 매스껍고 때로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
백신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일병통치약도 아니다
벽시계만 만인에게 공평하게 또박또박 가고 있다
-<비극을 가르친다> 전문
현실을 통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하등동물과 다르지 않을뿐더러 사후 이후에도 죽음의 절차는 가볍기 그지없다. ‘코로나 19’로 인해 수많은 주검 앞에 애도가 생략된 장례 절차로 인해 슬픔의 농도는 감소될 수밖에 없다. 생명의 가벼움 앞에 감염자와의 대화도 생명에 대한 존엄보다 참혹해서 “커다란 모니터가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래프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는 환자의 상태는 위급한 지경은 아니라 해도 절박함에 가깝다. 시가 갖춰야 할 덕목 중 대 자연 속에서 온전한 생명체로 공존하는 삶과 밀접한 서정성도 무용해졌고 가족 간 사랑도 격리를 통해 통제되어야 한다. 집단 감염 방지를 위한 물리적인 통제를 준수해야 하고 이에 따른 가족의 해체와 분열은 사회관계라는 이익 앞에 피해를 감당해야 한다. 시적 세계로 대상화된 사물에서 더는 불필요한 상황처럼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처지에 직면한 것이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결과된 코로나 19의 극복보다 최초 발생원을 들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이기의 극치를 G2라는 최강 국가들이 보여주었다. 그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국가와 소시민들 몫으로 돌아갔다. <비극을 가르친다>라는 시제에서 시인의 의도는 그리스라는 흥망과 역사성의 반복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보도 영상을 통해 그리스의 실상을 보며, 시인은 과거 그리스의 영광을 떠올리며 되돌아온 비극의 양과 시간을 환산해보았을 것이다. 풍요와 영광으로 흥청 되던 디오니소스적인 시간으로 “한때는 신사였던 나, 용감하게 모험적인 거래를 했고/ 고액을 배팅하기도 했다 운도 많이 따랐고/ 신나는 팁의 나날,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는 과거도 인간의 것이 아니었듯이 그 땅에 갇혀 옴짝 달짝할 수 없는 “ 혈압이 오르면? 맥박이 빨라지면?/ 체온이 상승하면? 산소분압이 감소하면?/ 인생길 황급히 올라간들 천천히 내려온들/ 저승길 예상외로 빨라진들 다행히도 느려진들”이라는 것처럼 불행의 시간마저 인간의 능력으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현대인의 비극을 겪으며 디오니소스적 비 이성과 무질서로 이어지는 광기의 시간이란 부채負債가 불현듯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확진자가 될 줄은 정말 꿈도 꾸지 않았다”는 말을 보듯 인간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갖는 평상심이자 이기심이다. 하지만 뾰쪽한 방법이 없을뿐더러 닥친 불행에 너무 억울해할 것도 없다. 시간은 우주라는 공간의 한 부분으로 우주 체계 안에서 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벽시계만 만인에게 공평하게 또박또박 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연 질서에 반하지 않는 이성ratio적인 사유 체계로의 복귀를 주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미래에서 도래한 현실을 긍정하며 시간의 경과라는 것마저 막연한 기대일 터지만, 그렇게라도 치유되기를 염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일 수 있다.
신생아들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할딱거리고 있다
유년의 푸른 꿈들이 아파트 방 안에서 움트고 있다
실내에서 걷고 뛰고 푸시 업하고 자전거 타고
옛날에는 운동장에 개미들이 모여 조회를 했다
외출하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는 재난대책본부에서는
오늘 무슨 발표를 하려나? 감염된 뿌연 하늘 아래
미세먼지 때문에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설마 길에 물 뿌리는 것이 저들이 하는 일?
방독면이라야 효과가 있을 텐데 말이야
캡슐을 먹어야 하리 종합비타민을
창문을 꼭꼭 닫고 살아가게 되었지만
가습기와 공기청정기가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우리 모두 미세먼지의 천국에서 오늘도
생선을 믿고 먹고 돼지고기를 믿고 먹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성호 긋고 기도를 하지만
5중 추돌사고, 시커먼 연기가 기도를 막고
사고수습 후 폐질환이 오지 않았으니
일단은 인심이다 자, 한 대 피우고 또 길 떠나자
-<지상천국에서> 전문
자연 체계에 반한 생활의 지속과 심화로 피폐해진 현실에서 공동체 관계의 복원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활에서 필수적인 사회관계로의 전환은 어려운 것인가? 그렇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 즉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광장agora으로의 복귀를 위한 일상의 정상화가 이뤄져야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갈수록 기존의 체계에 반하는 환경을 만들고 그것에 익숙해진다. 할머니의 사랑으로 탯줄을 자르고 보람에 싸서 애지중지 집안의 축복을 받으며 새로운 생명(아기)을 맞던 예전의 전통적인 자연분만의 풍속은 사라진 지 오래다. 혈연적 인연과 전혀 관계없는 병원에서 간호사의 손을 빌어 아이가 태어나고 그것도 모자라 “신생아들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할딱거리”며 자본주의의 화폐가치만큼 환산된 이기와 편리를 체험하게 된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산업사회 체계는 거듭 심화된다. 빈부의 차이로 겪게 될 차별을 몸으로 체험하며 성장한 아이가 느낀 간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는 난방도 안 되는 겨울 추위를 견디는 방에서 불우한 유년을 보내고, 부유한 아이는 천국 같은 세상을 만끽하며 성장한다. 그런 사람들의 기억은 차별에 대한 반항 의식으로 사회를 균열시키는 크레바스처럼 시간에 비례하여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인은 1연에서 일상의 변화된 환경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며 그마저 볼 수 없는 풍경이 된 “옛날에는 운동장에 개미들이 모여 조회를 했다”며 아련한 추억의 한 단면을 회상한다. 어디에 있거나 용케도 알아내는 개인 정보의 노출로 국민을 위한다는 ‘안전문자’의 수시 알림 글이 당도하지만. 감사한 마음보다 되레 우울한 요즘의 세태다. 어디에서나 일상을 침해받는 환경을 저지해볼 방도도 없을뿐더러 그마저 문장의 한계에 봉착한다. 일상이 재난인 현실에서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스스로 위안하며 안주해 보려 하지만, 시에서조차 시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질식할 것만 같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기도의 간절한 덕목이 되어버린 일상은 시적 화자의 특정한 상황이 아닌 곧 우리의 내러티브 한 모습이 되었다. “사고수습 후 폐질환이 오지 않았으니/ 일단은 인심이다 자, 한 대 피우고 또 길 떠나자”라며 하루하루의 안녕을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할 뿐이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통렬히 반성하며 진실과 대면하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대에 더는 악화되어서는 안 될 난간에 서 있는 것이다.
잠도 자고 꿈도 꿀 수 있으리
유감스럽게도 검사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초음파검사 결과도 조직검사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악성이 확실합니다
이미 전이가……
의사선생님의 입은 판사의 입만큼이나
잔인하다 가혹하다 아니 직분에 충실하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지 않는다
애비는 종이었다고도 하지 않고
깃발을 보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검사 마취 수술 집도 절개 이식 주사 회복
처방전 입원비 간병인 수술실
의료보험 중환자실 장례식장 공원묘지
이런 낱말들이 뇌리에서 난무한다
방사선치료에 일말의 희망
항암주사에 낙심천만
재수술에 환멸감
전이에 절망감
몇 퍼센트의 성공률에 목숨을 걸고
살아보려고
한 번 더 살아보려고
아아 이번 수술로 살 수만 있다면
슬픔을 잘 승화시키리 환장할 기쁨에 환호하리
친구들과 회 먹으며 회포도 함 제대로 풀고
-<슬픔을 승화시키는 법> 전문
“잠도 자고 꿈도 꿀 수 있으리”라는 문장은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의 도래를 암시한다. ‘있으리’라는 실현적 미래 의지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자에게 부여받은 특별한 혜택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연’의 행위를 온전하게 실행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미처 그럴 여유도 없이 2연 첫 문장은 “유감스럽게도 검사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라며 저승사자의 명부를 펼친 통고문처럼 여유를 일거에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시에서처럼 인간은 개인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지 ‘죽음’이라는 필연 앞에서 참담한 말을 듣게 되는 당혹한 순간을 맞게 된다. 그 시기는 우위를 점한 질병으로 분명한 징후를 들이밀 것이다. 늦었지만, 당사자는 욕망에 충실했던 시간의 무용함과 허무감에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것도 잠시 타산적인 이성을 추슬러 도래할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을 강구할 것이다. 인간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희망’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비장한 순간에서야 지켜온 자존에 대한 것들을 체념해야 한다는 이유를 알게 된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거래한 의사 앞에서 꼼짝없이 실행할 덕목을 약속하는 것마저 필사적이다. 초인적인 힘이 생긴 것이다. 그 초인적인 힘은 종종 신이 거처하는 초월적 영역까지 오르내리길 반복하지만. 서서히 생명의 기운은 소진되고 만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한계를 깨닫게 될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죽음의 시간과 맞닥뜨리고 만다. 자신감에 찬 우월한 인격도 아무 쓸모가 없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은 의식 없는 물상이자 최후에는 주검으로 처리되어야 할 사회적 폐기물일 뿐이다. 생명에 대한 위기가 인간의 탐욕을 상회하는 질병에 노출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위기의 시간 속에서 “몇 퍼센트의 성공률에 목숨을 걸고/ 살아보려고/ 한 번 더 살아보려고/ 아아 이번 수술로 살 수만 있다면” 한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고뇌를 가벼운 사유로 치부할 수 없다. 시가 삶의 겉모습에서 내부로 탐색해가며 맞닥뜨린 부면을 형상으로 전유한 문장이란 것을 알게 한다. ‘슬픔을 승화시키는 방법’도 우리가 위태로운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깨달아가는 전위 행위로 볼 수 있다. 최소한의 욕망을 보호하기 위한 자아의 방어기제로 대비하여 기능한다는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그렇지만, 시인이 선택한 신중한 언어 작용도 결국은 속절없이 ‘슬픔’으로 미끄러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대비되는 본질의 핵심은 순간의 즐거움보다 인간다운 삶의 지속을 소망한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시간의 일부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통찰의 시간으로 할애해야만 한다. 따라서 “슬픔을 잘 승화시키리 환장할 기쁨에 환호하리”라는 환희의 시간은 절정의 순간을 만끽할 여유가 아니다. 절박한 시간으로 환원되어야 할 기회란 것이다.
확진자한테서 온 문자를 받았다
살고 싶다
살아 있으니 살고 싶다고 한다
그자를 만났기에 그곳에 갔었기에
죽는 것이다
그 식당에 갔었기에 죽는 것이다
장례식도 없이 조문객도 없이
무덤도 없이 납골당도 없이
염해줄 사람도 없이 기도해줄 사람도 없이
태어난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바이러스들이여 내 이렇게 죽는 것이
너희들의 소원인가 나 그 소원 들어줘야 하는가
살고 싶은 사람이, 인지상정의 인간이
차례차례 죽지 않고 무더기로 죽어
인류의 수가 격감하고 있는데
살고 싶다고 허공을 보며 외치다 불을 켠다
하얀 천장에 매달린 창백한 형광등이 떤다
나 분명히 외쳤는데, 나 벙어리가 아닌데 아무도……
-<살고 싶다> 전문
“확진자한테서 온 문자를 받았다”라는 위기의 알림은 그것만으로도 긴박한 사회적 관점을 촉발한다. 시적 대상으로 포착한 순간들이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으로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점유하고 있는 일상이란 것이다. 마주친 모습의 현상에서 담담한 화자의 전언은 사실, 깊은 인간의 내면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시로 구조하고 있는 다섯 편의 시를 연작시의 형태로 보았을 때 연극 무대에서 처럼 전체적인 구성에서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마지막 ‘살고싶다’는 의미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절규로 연극의 마지막 장을 닫기 전의 대사 일지 모른다. ‘~을 하고 싶다’라는 강렬한 의지를 인간적인 가치로 발설한 시제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몸을 빌어 세상에 태어났고, 성장을 거쳐 성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생명이라는 성장 모티프를 통해 시인이 애착을 갖고 바라보는 삶의 주체도 실존에 근거하고 생존과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대상에서 천착한 사물 속 세계의 심오한 고뇌에서 현현한 것이고 인간의 삶도 그에 포함된다고 볼 때 우리라는 사회 전체가 시의 주체적 소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살고 싶다’는 문장에 담긴 필연적인 생명은 엄중한 것으로 시가 갖는 가치와 동일한 것으로 환기해도 무방한 것이다. 인간의 개별적인 삶이 각각의 의지대로 진행 되는 것이 아니듯 시도 시인의 변별적 이성에서 구체적으로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승하 시인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적 의미는 인간의 욕망과 반비례한 삶의 모습에서 열악해진 현실 환경을 보여 주려 했다. 인간의 본성인 생명의 존엄과 그것을 충동하는 사랑이라는 의미로 환원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이 보여준 현실 속 모습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현실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한 다섯 편의 시를 들여다보았다. 각각의 언어 이면에 내재된 변용은 화자를 통한 상상력의 수사가 아니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삶의 무게만큼 진동하는 진폭이어서 더 공감하고 긍정해야 할 이유다. 이승하 시인은 현실 속에서 가볍게 봐서는 안 될 소중한 인간의 의식과 인식을 천착한 사유를 거쳐 현대인의 단면으로 상징해서 보여준다. “살고 싶다고 허공을 보며 외치다 불을 켠다/ 하얀 천장에 매달린 창백한 형광등이 떤다/ 나 분명히 외쳤는데, 나 벙어리가 아닌데 아무도……” 시인도 어쩔 수 없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화자의 관점에서 절규하는 소릴 듣고 외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주변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시의 주체는 일상에서 대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 삶의 반경 내에 존재한 일상은 허구가 아닌 진솔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볼 때 시의 진정성과 상통한다. 그 일상은 매번 똑같은 유형으로 반복되지 않으며, 특정한 사람만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일상은 생명의 유한성처럼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유일한 존재처럼 한 사람의 삶이 엄중하듯 그 행위도 매우 소중한 것이란 것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란 것은 현실에서 문학적인 대상을 발견하고 그 찰나를 언어로 치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인간의 본성 깊숙이 내재한 이기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 문제작을 공감하며 부족한 문장으로 염치를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