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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6일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서울에도 오전부터 비가 많이 내린다는 예보를 한다. 거실에 나와서 식사를 하는 중에 아내는 요가를 하는지 이상한 동작을 취하며 운동이라고 하고 있다. 체육관이라도 가서 땀이 날 만큼 해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목이나 돌리고 허리 몇 번 굽히는 동작은 의미가 없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면서 예보된 비를 만났고 운동을 마치고는 학원으로 바로 이동하여 해장국 점심을 사 먹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오랜만에 시래기 선짓국을 먹었더니 속이 후련하여 어제 오늘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수업이 없어 소주도 몇 잔 곁들이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그 중에서 우현이는 오늘부터 내일까지 1박2일 교회수련회를 간다며 동행을 요청한다. 수련회까지 가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정도의 믿음은 아직 없고 하루하루 열심히 강의하는 일이 나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했다. 3시경 학원으로 들어와 의자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밖은 어둡고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오늘까지 금연한 지가 23일 되었는데 건강을 위해서라도 나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갈 것이고 저녁에는 장안동에서 정식이와 즐겁게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17일 잇몸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새벽에 잠이 들어 8시에 일어났고 밤새 내린 비로 밖은 아침이 되어도 어둑하다. 방학을 앞둔 아들과 딸이 등교를 했는지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창문에 비친 덥수룩한 머리에 까칠한 수염을 한 내 모습이 초라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열심히 했고 비가 오는 중에도 친구들과 북한산을 오른다는 영식이는 구파발에 도착해 있다. 나도 오늘 고향사람들 걷기대회를 남산에서 한다고 약속을 한 상태인데 비가 와서 어떨지 오후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운동을 마친 12시에 딸을 태우러 동명여중 학교로 가려다가 알아서 온다기에 바로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었다. 비가 그쳐 등산복 차림으로 일단 학원으로 갔다가 재경 김제시민 걷기대회에 참석하려고 지하철로 명동역까지 이동했다. 서울에서 이런 행사 참석은 처음으로 부량면 사무국장을 맡아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이고 명동역 출구로 나서자 김제인들이 나를 반겼다. 남산 입구까지 걸어가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올랐다가 중턱을 돌아 내려오면서는 북촌 한옥마을에 다다랐다. 참가자 모두 자리를 잡고 자기소개 및 장기자랑 등으로 1시간을 보낸 후 종로 3가 국일관 근처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었다. 이후 부량면 사람들과 별도로 자리를 하여 향우회 발전을 이야기하고 왔지만 할 일도 많은 나로서는 가볍지 않은 오늘이었다.
18일 잇몸이 아파서 어제처럼 고생을 했다.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자중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어제 몇 시간을 다니고 술까지 마셨으니 오늘의 고통은 당연한 결과다. 자제와 절제를 망각한 내가 어리석었지만 그것보다 향우회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 나로서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친목 모임인 향우회에 시간과 정신을 낭비하다니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새벽에 잠이 들어 8시에 일어나니 몸이 무거웠고 교회에 가는 것도 포기한 채 누워만 있다가 11시경 논술교실로 올라갔다. 가까스로 일요일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가는 딸을 태워 광화문으로 나갔는데 정체가 심하여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논술교실 오후반 수업을 마친 뒤에는 잇몸 통증이 더 심해져 성북학원 수업을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바로 들어왔다.
19일 아침까지 정신이 몽롱하여 식사를 조금하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며 땀을 흘렸다. 운동과 잇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샤워까지 마치고 나오니 한결 통증이 덜한 기분이다. 체육관을 나와 바로 학원으로 갔다가 라면으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잇몸으로 움츠린 나를 주인이 박대하여 기분만 상한 채 밖으로 나왔다. 밥 대신으로 약을 사 먹겠다고 생각하고 약국에서 통증치료제를 복용했더니 금방 입안이 부드러워 거짓말처럼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 저녁까지 시간이 남아 청량리 세무서에 나가 2010년 상반기 신설동 임대료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면서 부가세액이 없는 간이과세자로 만들었다. 3층을 공실로 처리하여 임대료를 제외시켰기 때문인데 공실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 내 입장에서는 세무서의 규칙을 따를 수만은 없었다. 학원으로 돌아와 수업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갔더니 딸이 1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2등을 했고 2학기 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몸에 열이 난다고 누워 있었지만 이런 소소한 일이 나에게는 보람이고 모처럼 내 마음에 기쁨이 찾아온 날이다. 오늘이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초복이라고 아내는 밤에 닭죽을 만들었고 10시가 지난 시간에 딸과 함께 식사를 마쳤다.
20일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로 12시에 잤다가 더워서 3시에 일어났고 이후 아침까지 잠을 못자고 뒤척이며 보냈다. 오전에 일찍 산행을 한 아내가 돌아왔고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나서는 중에는 이번 주 토요일이 청주 어머니 생신이라고 알린다. 평소에 말이 없는 사람이라 처가에 가서도 집에서처럼 밥만 먹고 온다면 그것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운동을 거르고 학원으로 곧장 가서 컴퓨터와 교재준비를 하다가 1시에 밖으로 나와 된장찌개 점심을 사 먹었다.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는 딸과 통화를 했는데 충무로에서 영화를 보고 들어가는 중이라고 한다. 얼마 전부터 아내가 딸의 치아를 교정한다고 동네 치과를 다니더니 식사를 하는 밤에 견적이 5백만 원이라고 알린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적지 않은 비용이지만 이가 고르고 바르면 보기도 좋고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에는 이를 빼는 것도 집에서 했는데 아프고 무서워 나는 도망다니기 일쑤였고 아직도 고르지 못한 이가 콤플렉스다. 옆에 있는 딸이 자신이 저축한 1백만 원을 보탠다고 거들었지만 부모의 역할도 있고 아무렴 내가 처리해야 할 몫이다.
21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열대야로 잠을 설쳤다. 밤이 무더워 19층에 사는 우리도 이런데 저층이나 단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 심할 것이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갔더니 방학을 한 학생들이 눈에 띄게 많아져 실내가 붐비는 정도가 되었다. 운동을 마치고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서 수업을 시작하는데 평소 비대했던 수강생이 오늘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있다. 다이어트를 한 것처럼 단단해 보였고 생기가 도는 눈빛까지 그 이유를 물으니 날마다 산길을 5킬로 이상씩 봄부터 걸었다고 한다. 걷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고 아무리 큰 병을 가진 사람이라도 걸으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 공감이 되기도 했다. 저녁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필리핀 사업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집으로 가는 중에 곧장 신촌으로 넘어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오늘은 왠일인지 아침부터 친구들한테 연락이 많이 왔는데 한결같이 삶의 어려움과 답답함을 하소연하는 내용뿐이었다. 들어보니 모두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이었고 그러기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관계의 적절한 조절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살면서 생기는 모든 행복과 불행이 주변인으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으로 친구도 냉철하게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22일 여름을 보내는 7월의 하순이 지루하다. 평소에 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특강과 그리고 교회까지 나가 기도를 하며 보내는데 사는 것이 이렇게 밋밋하고 의미가 없다니. 50대에 접어들면 누구나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특별히 나의 정신과 마음에 문제가 생긴 우울증의 영향인가. 오늘 아들의 생일인데 케익도 축하도 없이 아내는 산으로 갔고 당사자인 아들도 일찍 외출을 하여 딸하고만 평소처럼 식사를 했다. 과거와는 완전 달라진 아침의 분위기로 이유가 무엇이든 미움이 있는 한 반목의 시간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답답하게 오전을 보내다가 학원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고 글을 쓰며 사색을 했더니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겨 편안해졌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한여름을 실감케 한 오후가 지나고 수업을 마친 저녁에는 남영동 누추한 식당에서 영식이를 만났다.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외치며 오징어볶음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는데 자식을 키우다보니 전혀 근거가 없는 옛말은 아닌 것 같았다. 9시에 강형수 선생이 들어와 먼저 일어났지만 집으로 오면서 아들의 17년을 헤아려보니 보람과 실망이 반으로 나뉘어 있다.
23일 천둥소리에 놀라 잠을 깼더니 새벽부터 비가 쏟아지고 아침이 되어도 밖이 컴컴하다. 오늘 서울대병원 검진을 위해 퇴계원에 오신 장모님을 모시러 가고 싶었는데 대화할 기회도 없이 아내는 거실에서 잠만 쿨쿨 잔다. 결국 결정을 못하고 9시에 부스스한 차림으로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왔지만 그나마 하루 중 가장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다. 오후에는 점심을 먹고 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했는데 수강생들이 늦게 오고 날이 더워 집중도 못하는 어수선한 날을 보냈다. 저녁에 식사를 준비하여 안방에서 주섬주섬 먹었고 혼자 먹는 시간을 자주 갖다보니 이런 삶에도 익숙해지는 듯싶었다. 늦도록 목감기 때문에 고생하다가 새벽에 수면제가 든 감기약을 먹고 잠이 든 짧은 여름밤이었다.
24일 산행을 하려고 계획했다가 컨디션도 그렇고 또 비가 올 것 같아서 다음으로 미루었다.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는 중에 여동생으로부터 자신의 시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는 전화가 왔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지난 날 할머니 큰형 어머니의 장례까지 앞장서 처리를 했던 매제가 생각이 나서 서둘러 체육관을 나섰다. 집으로 왔다가 검정색 양복을 갈아입고 중구 신당동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으로 출발하여 1시가 지나 도착했다.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는데 규모가 있는 영안실을 계약한다고 대기를 하고 있는 상태라 2시경 조문을 하고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301호 문상객으로는 내가 처음이고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슬픔에 빠진 매제와 여동생을 위로하며 시간을 함께 했다. 작은 키에 자상하신 인상의 어르신을 몇 년 전까지 뵌 적이 있는데 이렇게 고인으로 마주하다니 허망함이 많았다. 또한 올해 여든넷의 평균 연령을 사셨다지만 부모의 별세는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으로 표현할 정도라 가족들 모두는 말을 잊고 있었다.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장례식장을 나와 학원으로 이동하여 평소처럼 수업을 했고 저녁에는 신설동에서 정식이와 식사를 하며 보냈다. 살면서 힘이 들거나 어려울 때 친구들을 만나 마음의 위안이나 편안함을 얻는 편인데 나에게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밤 10시에 지하철을 이용하여 집으로 왔고 매제의 일로 싱숭생숭 밤을 보내다 새벽에 잠이 들었다.
25일 일요일 아침에 잠도 더 자다가 11시부터 수업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종교 활동을 할 수는 없다. 8시에 집을 출발하여 교회에 가서 물질적 가치보다 도덕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가 더 우위에 존재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도덕과 정신을 물질보다 우위에 둔다는 것은 과거로보터 불변의 진리처럼 내려와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물질의 충족을 누리는 사람의 여유나 무능력한 사람이 자기 위안과 변명으로 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예배를 마치고 친구를 만날 겨를도 없이 합정동으로 달려가 해장국을 사 먹고 논술교실로 11시에 돌아와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도 날이 더워 30도는 훨씬 넘을 것 같고 수업을 마친 뒤에는 아내와 딸을 태우고 어제에 이어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밤새 고생을 한 매제와 동생이 맞이하여 아내가 조문을 했고 3시경 쇼핑을 한다기에 딸과 함께 동대문에 내려주었다. 교실로 돌아가 오후반 수업을 하고 6시에 집으로 왔더니 아들은 흔적이 없고 해만 중천에 떠서 텅 빈 거실을 비추고 있다. 곧장 안산으로 올라가 산길을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고 밤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오늘 동대문에서 샀다는 옷을 입었는데 밝아서 좋았다.
26일 매제 부친 발인식에 참석하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5시가 지나면서 소나기가 내려 창문을 닫으러 거실에 나갔더니 아내와 딸은 비가 들이치는 상황도 모르고 자고 있다. 6시에 밥을 조금 먹고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으로 갔더니 마지막 제를 올리고 있고 안치실로 내려가서는 나를 포함하여 4명이 관을 이동했다. 시간이 촉박하여 곧바로 영구차는 출발했고 나도 승용차로 뒤를 따라 무악재와 구파발을 지나 8시30분 고양시 화장장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먼저 온 장의사 차량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생과 사의 마지막 갈림길인 이곳은 언제나 평범한 일상이다. 가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9시40분 화로에 관이 들어갔고 그로부터 1시간 30분이 지난 11시10분 한 줌의 재가 된 유골함이 나왔다. 그 동안 외부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유족들과 지하식당에서 매제와 함께 있던 나도 밖으로 나와 고인의 유골을 맞이했다. 벽제를 출발한 영구차는 15분을 달려 파주시 광탄면 보광사에 도착했고 불교식 제를 올린 후에 영원한 안식으로 마무리했다. 보광사는 다른 산사에 비하여 공간이 넓어 장엄한 느낌이었고 병풍을 이루고 있는 산세까지 한눈에 보아도 명당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오후에 서울로 들어와 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했고 집에는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는데 휑한 거실에서 바라본 야경이 새롭다. 어제 구입한 흰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딸이 도서관에서 9시에 돌아왔고 10시가 지나서는 수업을 마친 아내도 내려왔다.
27일 늦은 밤이나 새벽에 들어오는 아들이 아침에는 보충수업 한다고 일찍 등교를 하여 오늘도 아내와 딸과만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학원으로 가는데 무더위로 거리가 한산할 정도다. 오후에 수업을 하면서는 논술교실을 포함 모든 학부모들에게 8월의 수업과 일정을 안내하는 문자를 동시에 보냈다. 저녁에 막걸리를 하기로 영식이와 약속을 하여 수업을 마친 후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이수역을 거쳐 방배동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전주집은 술값도 저렴하지만 전라도 안주와 음식 그리고 주인의 환대까지 더해져 언제와도 마음이 편한 곳이다. 오늘도 몇 시간을 앉아서 여름의 밤을 보내다가 노래까지 불렀는데 친구보다 내 노래가 더 구성진 것은 분명했다. 영식이가 택시를 잡아 비용까지 지불하여 편하게 집으로 왔지만 내일을 살아가는 할력소가 되기에 충분한 오늘이었다.
28일 어제 화려한 한강의 야경을 뒤로 하고 들어와 새벽 1시경 잠이 들어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식사를 조금 하고 안방에 누워 있는데 딸이 들어와 휴가를 산으로 갈 것인지 바다로 갈 것인지 불쑥 질문을 한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 같고 거실에서는 지도와 인터넷까지 동원하여 열심히 목적지를 찾는 중이었다. 12시경 집을 나서면서 전국의 여행지와 휴가지가 아빠 머릿속에 모두 있어 염려마라 했더니 안도의 웃음을 짓는다. 오후에 동성고 수업을 하려는데 엊그제 밀양에서 숨진 학생들이 같은 학교 3학년들이라 정신교육을 받았다며 늦게 들어왔다. 대학에 대한 압박이 청소년을 죽음으로 만들었고 멀리 경상도 밀양까지 가서 동반으로 투신을 하여 안타까움이 더 했다. 오후 일정을 마무리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낮이 긴 한여름 해는 아직도 서쪽에 걸려 있고 퇴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8시경 돌아온 집에는 내일 병원으로 검진을 가신다는 장모님이 계시고 딸은 여기저기 여행지를 검색하며 나름 부산하게 보내고 있다.
29일 낮 시간에 에어컨을 많이 쐬어서 그런지 아니면 선풍기를 틀고 잤기 때문인지 새벽에 목이 따가워 일어났다. 소금물로 목을 씻었더니 조금 나아졌지만 오랫동안 강의를 많이 한 나로서는 목이나 기관지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친 오전에 서울대 병원으로 2년 만에 검진을 받는다는 장모님과 아내와 딸까지 태우고 나섰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사이 근처에 있는 학원으로 들어가 쉬고 있는데 사람이 적어 일찍 진료를 마쳤다는 아내의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들어가 모두를 태우고 집으로 왔다가 운동을 하러 갔는데 오늘이 중복이라고 체육관에서는 수박파티를 열었다. 운동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가서 장모님과 함께 아내 딸까지 연희동 칼국수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복날이니 삼계탕이나 보신탕집에 사람이 몰릴 줄 알았는데 이 곳도 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렸다. 오후에 학원으로 다시 나가 수업을 하고 여행지로 백담사 주변을 알아봤는데 휴가철이라 장소 선정이 역시 쉽지 않았다. 8시경 집으로 돌아오니 거실에 있는 아들은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았고 가족여행 동행여부를 묻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30일 한 주일의 마지막 평일이자 7월의 마지막 금요일이다. 밤 기온이 높아 열대야로 잠을 설쳤고 아침까지도 후끈하여 눈만 멀뚱하게 뜨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와 130만원 입금을 요구한다. 생활비와 아들 딸 학비까지 이번 달 비용이 많이 필요할 것인데 논술교실에서 받은 금액으로 상당부분 충당한다니 고마움이 많았다. 식사를 하면서 내일 휴가를 떠난다고 통보하고 잠을 못 잔 탓에 체육관도 거르고 학원으로 출발하여 2시에 도착했다. 오후를 보내면서 아내에게 130만원을 송금하고 10월24일에 실시되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참가비 4만원도 입금했다. 수업을 마치고 춘천 마라톤 출사표 “춘마 그대에게 빚을 갚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작성하여 인터넷에 게재하였다. 작년에 춘천에 와서 42.195킬로를 달려 고통을 달랬는데 올해는 그 빚을 갚는 마음으로 춘천마라톤에 참가한다는 의미이다. 밤 8시에 집으로 갔더니 내일 휴가를 떠난다고 아내와 딸은 벌써 짐을 준비하여 거실 구석에 쌓아 두었다. 과외를 하겠다는 딸이 선생과 사전 미팅을 하고 왔기에 수업은 가급적 집에서 하라 일렀는데 내가 점검하고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강원도 먼 거리까지 새벽에 나서야 하고 운전도 전적으로 내가 맡아야 해서 일찍 자리에 누웠다.
31일 강원도 여행을 하기 위해 학원 등으로 바쁘다는 아들을 제외하고 새벽 5시30분 아내와 딸을 태우고 집을 출발했다. 평소에 대화도 안하지만 얼굴도 돌리지 않는 아들이 2박3일 동행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모님을 모시고 갔으면 좋겠는데 어젯밤에 목적지를 정했고 그러다보니 숙소 등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 내부순환도로를 오르니 역시 휴가철이라 이른 시간임에도 차가 많았고 강원도로 향하는 덕소 IC부터는 아예 주차장을 이루었다. 간신히 가평 휴게소에 들어가 집에서 준비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춘천을 거쳐 홍천 IC를 빠져 나갔다. 여기서부터 원통과 인제까지는 막힘없이 달렸고 백담사 근처에는 5시간이 더 지난 11시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서울과는 거리가 있는데도 가는 곳마다 텐트와 사람의 물결이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차량으로 정신이 없었다. 백담사 입구에서 500미터 떨어진 돈&유 오토캠핑장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 1일 3만원 비용으로 가져온 텐트를 설치했다. 백담사에 가려고 라면으로 점심을 빠르게 먹고 주차장까지 나와 줄을 서 있다가 입구에서 7킬로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맑은 물과 구불구불한 계곡으로 공간은 신선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는데 기사의 난폭한 운전이 그런 환상을 일순간 날려 버렸다. 공간이 없을 정도로 차가 많은 내설악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는 행렬을 비껴 다리 건너편에 있는 고즈넉한 백담사에 들어섰다. 백 개의 못이 있어 백담사라는 명칭이 생긴 곳이지만 만해 한용운 선생이 기거했던 오세암 그것보다 전직 대통령의 유배지로도 이름을 알린 곳이다. 경내를 돌아보고 산사 앞으로 내려오니 흐르는 물에 누군가 쌓아 놓은 수 없는 돌탑이 조각품처럼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설악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1시간 이상을 보내다가 주차장으로 다시 나와 설악워터피아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해가 기울어 가는 5시경 도착하여 요기를 하고 놀이터같은 성곽을 구경하다가 야간으로 개장하는 워터피아에 들어갔다. 7시부터 10시까지 파도타기 등을 하며 즐겁게 보냈는데 기울어진 슬라이드 튜브타기는 나로서도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 시간까지 재미있게 보내다가 숙소에 돌아오니 11시가 되었고 식사할 곳이 없어 용대리에서 치킨을 사다가 저녁을 대신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소주를 곁들이는데 아내가 지나치게 간섭하여 밖으로 나왔고 주변을 서성대다 1시경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밤새 끊임없이 들려오는 바람소리 물소리 이렇게 텐트에서 함께하는 가족의 시간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