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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저는 '아브라함'이라는 닉네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유학 생활 중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침마다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집 근처 본빌 칼리지에서 일하다가 나이지리아 출신의 임마누엘이라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는 개신교 목사였고, 이미 그곳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한 첫날, 용역 매니저가 제게 보험번호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신청한 보험번호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임마누엘 형제가 제게 다가와 자신의 보험번호를 잠시 사용하라며 선뜻 도움을 내주었습니다. 다행히 문제가 잘 해결되어 그의 보험번호를 쓸 일은 없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도 저희 큰딸과 동갑인 딸이 있어 같은 학교에 다녔고, 그래서 더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게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한국 이름 '김경근'은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 문득 제 아들의 이름 '이삭(Isaac)'이 떠올랐습니다.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니, 성경의 순리를 따라 저도 아브라함이라 불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임마누엘에게 이제부터 저를 '아브라함'이라 불러 달라고 부탁했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제 닉네임이 되었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과 '아브라함'(민족의 아버지)의 만남이었던 셈입니다.
2. 이름에 담긴 뜻
우연히 정해진 이름이었지만, 살아가며 이 이름은 제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제 삶이 아브라함의 여정과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본래 우상을 숭배하던 우르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땅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으로 나아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선조들은 우상을 숭배하던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에서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의 첫 열매로 하나님은 저를 목사로, 또 선교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한국을 떠나 크로아티아라는 영적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성경의 인물과 나 자신 — 지혜롭게 바라보기
저는 제 삶을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비추어 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인물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다만 특정 인물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나머지, 스스로 판단이 흐려지는 일은 주의해야 합니다.
몇 해 전, 오랫동안 아프리카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던 한 선교사가 젊은 단기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큰 잘못을 저질러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충격을 안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널리 존경받던 분이었기에 그 여파가 더욱 컸습니다. 전해 듣기로 그는 자신을 야곱에, 아내를 레아에, 그 젊은 여선교사를 라헬에 견주어 생각했다고 합니다. 성경 인물과의 지나친 동일시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결국 스스로도 헤어나기 힘든 잘못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을 다윗이나 여호수아, 베드로와 같은 인물과 성급히 동일시할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안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 제가 오해했던 '아브라함의 복'
제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복'에 대한 기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듯, 저 또한 복의 근원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믿음의 복, 자녀의 복, 소유의 복을 저도 받게 되리라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며, 그 복이 제 삶에 그대로 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질병으로 몸이 아프고, 사랑하는 가족과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화려한 업적이나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아브라함의 복이 내게는 없구나' 하는 낙심이 밀려왔습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돌아보면, 그것은 제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어려움이기도 했습니다.
5. 진정한 복이란 무엇인가
이 일을 계기로 저는 '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복을 세상이 말하는 복과 같은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소유가 풍족하고, 자녀가 하늘의 별처럼 많고, 명예와 영광 가운데 장수하다가 평안히 생을 마치는 것이 복의 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욥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부유하고 존경받던 시절이 복이고, 모든 것을 잃고 병마와 싸우던 시절은 복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훗날 욥이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그에게 복이 다시 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이해한 복의 개념은 철저히 이 땅에서의 형통함에 초점이 맞춰진, 세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참된 복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눅16장). 그 부자는 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형제간의 우애도 좋았으며, 대문 앞의 거지에게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소유의 복, 관계의 복, 건강의 복을 다 가졌던 그가 어찌하여 그런 결말을 맞이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복과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많은 제목들, 곧 건강과 경제적 형편의 나아짐, 자녀의 평안, 사업의 성공, 사람들로부터의 존귀와 명예를 구하는 기도들은 어쩌면 이 땅에서의 소망과 맞닿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마19:23~24)고 하셨고, 동시에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부귀와 건강, 장수는 참된 복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복에 대해 다시 정리해야 했습니다.
6. 팔복 — 뒤집힌 복의 선언
한신교회를 개척하셨던 고(故) 이중표 목사님은 담관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 투병 중에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남기셨습니다. 그 책에는 산상수훈의 팔복에 관한 묵상이 담겨 있는데, 이를 읽으며 저는 복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귀영화나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3~4).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너희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6:20~21). 마태복음의 팔복이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다면, 누가복음의 팔복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런데 이 팔복이 말하는 복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의 복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에 이 원리를 비추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흔히 욥이 명성을 얻고 일곱 아들을 두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시절, 그리고 시험 후에 모든 것을 두 배로 회복한 시절을 복된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팔복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욥이 사단의 시험 가운데 고통받고 가난하며 주리고 울던 그 시간이야말로 복이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복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존귀해지고, 욥의 소유가 배로 늘어나고, 나오미가 룻을 통해 보아스를 만나 손자를 품에 안게 되는 것과 같은 좋은 결말만을 복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를 위해 핍박받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때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참된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전천후의 복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욥에게 주어진 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한 입으로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은 아니실 것입니다. 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중표 목사님의 글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고백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병들면 복이 없다고 생각한다. 병들면 불행하다고 여기며 슬퍼한다. 있던 복도 다 떠나가고 저주받은 인생이 된다고 한탄한다. 실제로 병들면 이 세상의 모든 복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활동의 영역이 막히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며, 때로는 가산을 탕진하여 희망을 잃기도 하고, 평생 장애를 안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병을 인생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적으로 여기며, 건강하게 사는 것만이 복 중의 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건강으로 받는 복이 있고, 병들어서 받는 복이 따로 있다. 병들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는 복이 숨어 있다. 물론 병들었다고 누구나 그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병들고서 받는 복이 따로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병상의 팔복이다. 건강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복을, 병들고서야 비로소 받게 된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도, 병든 자에게도 복을 주신다.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복을 주신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복을 주신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많은 사람이 건강할 때는 복이 있고 병들면 복이 없다고 탄식한다. 살아서는 복이 있지만 죽으면 복이 사라진다고 슬퍼한다. 형통할 때는 복이 있지만 실패하면 복을 잃었다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변하지 않는, 전천후의 복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복을 우리에게 주려 하시며, 지금도 주고 계신다."
— 고 이중표 목사,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 중에서
복이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좋게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하는 모든 순간이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하신 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만을 뜻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아브라함의 모든 삶의 순간이 복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자녀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형통할 때나 넘어질 때나 —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순간이 합력하여 복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두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8. 병들고서야 알게 되는 은혜
이 복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기도도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화를 피하고 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만, 사실 어려움과 죽음조차도 하나님 안에 있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복이 되고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잘될 때는 기쁨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고, 어려울 때는 깊은 겸손과 신뢰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연합은 자연스럽게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까지 이어지며,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팔복을 깨달을 때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나 건강, 명예와 같은 것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전천후로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천국의 복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형편에서도 부어지는 복입니다.
병들거나 가난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그 상황이 속히 해결되기만을 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주어지는 또 다른 복이 있음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교회 목요신앙교육 시간에 나누었던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녀는 결핵과 척추 카리에스, 직장암, 파킨슨병 등 여러 질병으로 평생 병약한 삶을 살았고, 몇 차례나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습니다. 1999년 7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가 남긴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참된 인간이 될 수조차 없습니다."
— 미우라 아야꼬
우리나라의 송명희 시인이 쓴 '나'라는 시 역시 같은 은혜를 노래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송명희, 「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우라 아야꼬 여사와 송명희 시인은 욥과 같은 고난 가운데서도 참된 복을 누린 이들이었습니다.
9. 마치며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복을 원했고, 제 이름이 그런 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제가 그리던 아브라함의 복은 지극히 이 땅의 것, 물질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복이 제 삶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느낄 때, 저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어려운 마음의 장벽을 쌓기도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비슷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에 아픔이 찾아오고, 자녀에게 힘든 일이 생기고, 건강을 잃게 될 때, 우리는 자칫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셨다고 느끼며 마음이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마저 무거워지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홀로 괴로워하기 쉽습니다. 좋지 않은 일들을 저주로만 여기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복은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주린 것, 우는 것에도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우리의 형편이나 성공, 건강이나 부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일부로 감사히 받을 수 있지만, 그것만이 복의 유일한 증거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되어야 할 참된 부자는 모든 상황과 형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의 부자입니다. 높은 곳에서든 낮은 곳에서든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깊은 교제와 평안을 누리는 자, 그가 바로 참된 부자입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이 땅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는 우리가 집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누릴 수 있는 은혜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기복 신앙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가난하고 애통하며 울고 의에 주릴 때에도 함께하는, 신비롭고 전천후적인 복입니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깨달았던 것처럼, 이중표 목사님이 고백했던 것처럼, 송명희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바로 이러한 팔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제게 여전히 유효한 이름이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팔복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추석 명절, 어떤 형편 가운데 계시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함께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