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실의 사회학 / 정진권
지난달에 나는 어느 대학병원에 들어가 위(胃) 절제수술을 받았다. 위와 십이지장 사이에 무슨 고리 같은 것이 생겨서 그걸 떼어낸 것이다. 그리고 요 며칠 전에 퇴원을 했다. 꼭 한 달 만이다. 나는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처음에는 응급병동 4인실에서 나흘, 다음엔 본관병동으로 건너와 2인실에서 이틀, 거기서 수술을 받고 이튿날 같은 병동 6인실로 옮겨 스무 날을 지냈다.
나는 이제 그 6인실에서 겪은 일 몇 토막을 여기 적어 보려고 한다. 세 병실들 중 하필 6인실이 생각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제일 오래 머무른 곳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입원료 때문에 그랬을까? 4인실은 하루 8만 원, 2인실은 무려 14만 원, 그런데 6인실은 9천 원이다. 8만 원씩, 14만 원씩 지불해야 할 나로서는 그 9천 원이라는 말이 정말 무슨 복음(福音)만 같았다.
6인실엘 들어서면 입구 왼쪽 벽에 하얀 세면대가 하나,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병상이 각각 셋씩 나란하다. 그리고 그 통로 맨 끝엔 공동으로 쓰는 냉장고 하나, 그 위에 텔레비전 한 대가 걸려 있다. 그 바른쪽은 바로 화장실인데 넓지는 않지만 간단한 샤워는 할 만하다. 내 병상은 바로 그 화장실 옆이다. 각 병상 천정에는 흰색 커튼이 걸려 있다. 그걸 치면 그 안이 온전한 1인용 병실이 된다.
나는 이 6인실에서 참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배달하는 하얀 모자 아주머니들은 “정진권씨 식사하세요.” 하고, 연둣빛 제복의 간호원들은 “정진권님 혈압재셔야지요.” 했다. 그리고 어린 간호원 한 사람은 퍽도 다정하게 “할아버지, 가스 잘 나오세요?” 했다. 내가 어쩌다 씨가 되고 님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었을까? 늘 “정 선생, 오랜만이네.” 아니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만 듣던 나는 이 호칭들이 퍽 낯설었다. 그러나 이것도 무슨 사회화(社會化)라는 건지 머지않아 거기 익숙해지고 말았다. 잘난(학교 선생) 남편 덕분에 평생을 사모님으로 불려온 아내는, 그러나 이 병실에서는 늘 할머니, 희귀하게는 아주머니였다. 그런데 아내가 외출한 어느 날 한 처녀가 묻기를 “사모님 아직 안 오셨어요?” 했다. 내가 퍽 심심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내가 처녀의 이 말을 들었으면 싶었다.
어느 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핸드폰을 받는데 우리 라인 맨 끝의 얼굴 검은 50대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그녀는 내가 전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참말로 이상하네요.”
하고는 자기 핸드폰을 내밀면서 내 핸드폰 좀 보자고 했다. 울리는 소리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같은 모델이었다. 그녀는 혹 배터리 충전기 없느냐고 물었다. 배터리가 나가 전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내가 웃으면서 충전해 주었다. 그날 오후 그녀가 밖엘 나갔다 오면서 풀빵 두어 개를 사다 주었다. 아내는 아직 따끈하다며 맛있게 그 한 개를 먹었다. 나는 금식 중이어서 구경만 했다. 그 후로 그녀는 틈틈이 아내 곁에 와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남편이 위암 수술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멀리 포항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밤이 되면 나는 내 병상에 커튼을 치고, 그러나 텔레비전이 보일 만큼은 열어두고 혼자 누워서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 했다. 9시 뉴스는 보아야 하니까. 병상에서 텔레비전을 보면 약간 사각이었지만 뉴스를 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아내는 커튼 밖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포항 아주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아주머니 두엇이 더 있었다. 같은 시간의 그 연속극, 그들은 연신
“아니, 저 가시나, 저게 무슨 소리꼬?”
“하이고, 맛도 고셔라.”
하면서 분개하다가 깔깔거리다가 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데 보자는 일이 없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치(一致)였다. 얼마나 답답하고 지루한 하루였을까? 나는 내 아내와 그 아주머니들이 연속극을 보면서 가슴이 좀 뚫렸으면(카타르시스) 싶었다.
그 6인실은 출입이 대중없었다. 어떤 사람은 나처럼 오래 머무르고, 어떤 사람은 한 주일 내지 열흘쯤, 또 어떤 사람은 사나흘 만에 나가기도 했다. 퇴원하는 사람들은 우선 옷 갈아입고, 손에 백 하나 들고, 그리고는 잔유 환자들을 돌아보며
“먼저 갑니다. 어서 쾌차하십시오.”
“이만 갑니다. 어서 따라 나오십시오.”
했다. 그 가족들도 함께 그랬다.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축하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얼마나 좋으세요?”
하는 말로 그들을 보냈다. 정말 얼마나 좋을까. 그들을 볼 때마다, 특히 나보다 늦게 들어와서 먼저 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언제 나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가 나가면 한나절이 멀다 하고 금방 새 환자가 들어왔다. 그들이 다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처럼 2인실에서 옮겨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4만원에서 9천원, 옮겨오는 그들은 또 얼마나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각설하고 언젠가의 일이다. 내 건너편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30대 후반이었다. 역시 젊은 새댁이 따라왔다. 이튿날 점심때였다. 새댁이 사과를 깎아 접시에 담아 들고 와
“한 조각 맛보세요.”
했다. 아내는 고맙다면서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빈 접시에 인절미 몇 개를 담아다 주었다. 문득 생각난 듯이 포항 아주머니한테도 몇 개 가져다주었다. 그 인절미는 제 시어머니 먹으라고 며늘아이가 사다 놓은 것이다. 아파트로 처음 이사했을 때 아내가 떡을 맞추다가 앞집과 아래 위층에 돌리던 생각이 났다.
다른 병실도 그렇겠지만 그 6인실은 문병객이 많았다. 그 중에는 성경을 들고 찾아와 병상의 신도 앞에 기도드리는 목사님도 있고, 그 환자 신도와 함께 성호(聖號)를 긋는 신부님도 있었다. 또 환자의 어린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를 부르며 달려오기도 하고, 환자의 친구들이 찾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환자들은 그런 순간순간 자신이 결코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 병원에도 특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하루 얼마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어느 병원이 건물을 새로 짓고 거기 특실을 개설하는데 하루에 4백만 원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도 그 특실에 사과 깎아 건네고 인절미 담아 갚는 그런 문화는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2인실은 6인실에 훨씬 더 가깝지만 있어 보니 거기도 사람들 서로 어울려 사는 맛은 별로 없었다.
6인실은 여섯 환자와 그 가족들, 말하자면 그들의 한 공동체(사회)였다. 서로 아는 것은 무슨 병으로 어디서 온 사람인가 그게 전부였지만, 사흘만 함께 지내도 아침에 얼굴 보는 게 말없이 반가웠다. 혹 복도에서라도 만나면 서로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내가 하필 6인실이 생각난 것은 입원료가 9천원이어서도 그랬겠지만 거기가 사람 사는 곳 같아서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