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하(梅下) 김기주(金基周), 소당(小塘) 김기요(金基堯)
樂民 장달수
이 지역 사람들이 흔히 '나무리'라고 부르는 산청군 신등면 법물리는 상산김씨(商山金氏)들이 6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고려 때 상산군(商山君)으로 봉해진 김수(金需)가 관향조(貫鄕祖)이고, 고려말 단구재(丹邱齋) 김후(金後)가 이 마을에 정착을 한 이후로 상산김씨가 법물에 살게 되었다. 단구재로 시작된 법물 상산김씨는 삼족재(三足齋) 삼청당(三淸堂) 급고재(汲古齋) 삼휴당(三休堂) 삼매당(三梅堂) 눌민재(訥敏齋) 만각재(晩覺齋) 양한재(養閒齋) 등 세칭 ‘김씨 팔군자(八君子)’를 배출했으며, 남명 사숙인인 임란 의병장 대하재 김경근을 거쳐 한말에는 한주 이진상의 뛰어난 제자들을 지칭하는 '주문팔현(洲門八賢)'의 한 사람인 물천 김진호가 마을의 유맥을 이었다. 물천 김진호와 같이 법물마을의 유맥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매하(梅下) 김기주(金基周)와 그의 족제(足弟) 소당(小塘) 김기요(金基堯)라 할 수 있다.
매화와 소당의 흔적을 찾아 법물마을을 찾았지만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법물마을 이택당 앞에 '소당선생 사적비'가 남아 있지만, 이들이 남긴 문적을 통해 정신과 학문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매하 김기주는 1844년 법물리에서 원(瑗)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안동권씨 호명(濠明)의 따님으로 안분당 권규의 후손이다. 어려서 부터 영특했으며 겨우 말을 할 때 글자 백 여자를 듣고 다 기억할 정도였다. 15세 때 글을 썼는데 문장이 날로 나아져 나이 많은 선비들까지도 "내가 못 따라 갈 아이"고 하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다. 삼종숙부(三從叔父)인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1827~1903)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으며 매하의 편지를 받아 보고는 답장을 써서 칭찬하기를 “우리 가문이 선대에 이름이 있는데 지금 너희들 대에 와서 또 그러함을 보겠구나”고 하며 큰 기대를 나타내었다. 참고로 매하의 삼종숙부 단계는 진주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단성농민항쟁의 중심인물로 강우학맥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말 이 지역 학자다. 매하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공부에 열중했다. 과거 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만 전념을 했다. 당시 풍속이 과거 문을 숭상했는데, 매하도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문에 조금 관심을 두었지만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며 "모름지기 그 밖에 더 큰일이 있음을 알아야지만 사람으로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며 당시 삼종숙부인 단계를 비롯해 지역의 대표 선비들인 한주 이진상, 만성 박치복 등과 종유하며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질문하여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1866년 김해로 가서 성재 허전을 배알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자 성재는“네 나이에 공부가 그 만큼 깊은 사람을 별로 보지는 못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고 격려를 했으니 이때 나이 23세였다. 이로부터 성재 문하에서 찾아 가거나 때로는 편지로 학문을 질정하며 더욱 정진했다. 아우 기하(基夏)와 우애가 돈독하여 글을 가르쳐 주며 “모든 일이 이익이 없고 해만 있는 것이 허다하지만 그 중에서 이익만 있고 해가 없는 것은 오직 독서뿐”이라고 강조했다. 1875년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상을 치러 보는 사람들이 정성에 감동하기도 했다. 부친의 상을 치르고 나서 집안의 문적을 일일이 챙기며 "우리 집안 선대의 문적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있는 것이라곤 별로 없었는데 남의 집 문집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 문장 한 구절이라도 낱낱이 다 모아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며 책을 만들어 '상산세고(商山世稿)' 라고 하였다. 또 방계 선조의 유적들도 모두 모아 손수 베껴서 책을 만들어 후세 자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일이 바쁠지라도 날마다 서당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각각 그들의 실력에 맞게 지도를 하였고 본인 스스로도 책을 들고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882년 겨울 우연히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아우에게 이르기를 "큰 아이가 아직 어려 방향을 모르고 있으니 네가 힘닿는 데로 성취하도록 가르쳐 내 뜻을 이루어 달라. 옛사람 말에도 사람으로서 배우지 아니하면 말이나 소에다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다 했느니라" 하고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39세였다. 이때 여러 집안사람들이 울며 말하기를 "이제 우리 가문이 쇠하였고 글 종자도 끊어졌다" 고 했으며 부음을 들은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좋은 선비가 세상을 떠났다 아쉬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당 김기요는 매하의 집안 동생으로 1854년 법물리 소당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한때는 날씨가 더우나 춥거나 할 것 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한다. 1884년 소당에서 평지마을로 이사해 집안 재실에서 친척들과 우의를 다지며 벗들과는 학문을 연마하며 공명(功名)의 학문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성리학에 관한 서적들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언행록을 가까이 하며 " 배우는데 있어 치지(致知)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또 "지금의 학자들은 실속 없는 글 짓는 일에만 힘을 쏟고 한갓 입과 눈으로만 과장되게 말하고 다니니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라 했다. 이는 소당의 학문이 아는 것은 묵묵히 실천하고 겉으로 떠벌리기 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름지기 학문은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운데서 해야 한다 생각한 소당은 인근의 대선비들인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면우 곽종석과 집안 어른들인 단계 김인섭, 물천 김진호 등과 자주 왕래하며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당은 효자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몸을 상할 정도로 정성을 다해 치러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집안의 자제들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공명을 탐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내고자 스스로 '소당(小塘)'이라 호를 지었으니, 조그마한 자기 마음을 잘 수양해 본성을 잃지 않고자 해서다. 당시 지역의 선비들이 이택당(麗澤堂)을 지어 강학을 하고자 했으나, 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때 소당이 예부터 전해 오던 땅을 기꺼이 내놓아 만성 박치복 등 이 지역의 학자들이 이택당에서 유풍을 일으킬 수 있다. 이택당 강학에 소당도 반드시 참석하여 선배들과 학문을 토론했다. 뿐만 아니다. 당시 단성향교가 피폐해져 있는데, 소당이 책임을 맡아 3년 만에 향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 단성의 문풍을 일신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소당은 틈나는데도 산수를 유람했다. 안음, 합천, 가야산 등 인근 명승을 찾아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보내다가 1933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소당이 땅을 내어 지은 이택당 앞에 그의 사적비가 서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겠다. 하지만 지금 이택당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소당이 있기 때문에 이택당이 건립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