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이야기, 일월산 황씨 부인 ♣
15살 어린 새 신랑이 장가를 가 신부(新婦)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왁자지껄하던 손님들도 모두 떠나고 신방에 신랑과 신부만 남았는데~
다섯 살 위 신부가 따라주는 합환주(合歡酒)를 마시고 어린 신랑은 촛불을 껐다.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주어야 할 새 신랑은 돌아앉아 우두커니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름달 빛이 교교(皎皎)히 창을 하얗게 물들인 고요한 삼경(三更)에 신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바로 그때 ‘서그럭 서그럭’ 창밖에서 음산한 소리가 나더니 달빛 머금은 창에 칼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어린 새 신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아래위 이빨은 딱딱 부딪쳤다. 할머니한테 들었던 옛날 얘기가 생각났다.
“첫날밤에 나이 든 신부의 간부(姦夫)인 중놈이 다락에서 튀어나와 어린 신랑을 칼로 죽여 뒷간에 빠뜨렸다는 얘기!”
“시, 시, 신부는 빠, 빠, 빨리 부, 부, 불을 켜시오.” 신부가 불을 켜자 어린 신랑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신부 집은 발칵 뒤집혔다. 꿀물을 타온다, 우황청심환을 가지고 온다, 부산을 떠는데~~
새 신랑은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 억쇠를 불렀다. 행랑방에서 신부집 청지기와 함께 자던 억쇠가 불려왔다. 어느덧 동이 트자 새 신랑은 억쇠가 고삐 잡은 당나귀를 타고 한걸음에 30里 밖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새 신랑은 두 번 다시 신부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스무 번이나 바뀌며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그때 그 새 신랑은 급제(及第)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새장가를 가서 아들딸에 손주까지 두고 옛일은 까마득히 망각(忘却)의 강으로 흘러 보내버렸다.
어느 가을날 ••• 친구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푸짐한 술상을 받았다. 송이산적에 잘 익은 청주가 나왔다. 두 사람은 당시(唐詩)를 읊으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갔다.
그날도 휘영청 달이 밝아 창호(窓戶)가 하얗게 달빛에 물들었는데~ 그때 ‘서그럭 서그럭’ 20년 전 첫날밤 신방에서 들었던 그 소리, 그리고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칼 그림자! 그는 들고 있던 청주잔을 떨어뜨리며~ “저 소리, 저 그림자.”하며 벌벌 떨었다.
친구가 껄껄 웃으며 ~ “이 사람아. 저 소리는 대나무 잎 스치는 소리고, 저것은 대나무 잎 그림자야.” 그는 얼어붙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맞아 바로 저 소리, 저 그림자였어. 그때 신방(新房) 밖에도 대나무가 있었지.”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 친구 집을 나와 하인을 앞세워 밤새도록 나귀를 타고 삼경(三更)녘에야 20년 전 처가(妻家)에 다다랐다.
새 신부(?)는 뒤뜰 별당채에서 그때까지 잠 못 들고 •••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부인!!” 하고는 •••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새 신부는 물레만 돌리며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습니다.” 그는 땅을 치며 회한의 눈물을 쏟았지만 ••• 세월을 엮어 물레만 돌리는 새 신부의 주름살은 펼 수가 없었다. 선비는 물레를 돌리고 있는 부인의 손을 잡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요한 적막을 깨고 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방님 어찌된 영문인지 그 연유나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나는 소박맞은 女人으로 죄인 아닌 罪人으로 20年을 영문도 모르는 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더 이상 눈물도 말라버린 선비는 "부인, 정말 미안하오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그때의 첫날 밤 일을 소상히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새벽닭이 울고 먼동이 떠오를 즈음에 이윽고 부인은 말문을 열었다. “낭군님은 이미 새 부인과 자식들이 있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어서 본가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비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말하였다. “부인!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이제 내가 당신의 기나긴 세월을 보상하리다.”
선비는 뜬눈으로 밤새고 그길로 하인을 불러 본가로 돌아와 아내에게 20년 전의 첫날밤 이야기를 소상히 말하였다.
선비의 말을 끝까지 들은 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서방(書房)님 당장 모시고 오세요. 정실부인(正室婦人)이 20年 前에 있었으니~ 저는 앞으로 첩(妾)으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은 본처(本妻) 자식으로 올려 주십시오." 그 말에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는 선비~~ 이윽고 말을 이었다.
"부인 내가 꼭 그리하리다. 부인의 그 고운 심성을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않겠소이다."
선비는 다음날 날이 밝자 하인들을 불러 꽃장식으로 된 가마와 꽃신과 비단옷을 가득 실어 본처(本妻)를 하루빨리 모셔 오도록 명(命)하였다. 며칠 뒤 이윽고 꽃가마와 부인이 도착하자 선비의 아내가 비단길을 만들어놓고, 정중히 큰절을 올리고 안방으로 모시고는 자식들을 불러 놓고
"앞으로 여기 계시는 분이 이제부터 너의 어머님이시니 큰절을 올려라"고 하니 자식들은 그간에 어머님으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 얘기를 들은 지라, 큰절을 올리며 "어머님 이제부터 저희들이 어머님을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후 어진 아내의 내조와 착한 자식들의 과거급제(科擧及第)로 자손대대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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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傳說)을 모티브로 시인 서정주는 ‘신부(新婦)’ 시를 썼나니, 고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렸답니다.
우리 재밌게 감상해 봅시다. -율-
신부 / 서정주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그만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첫댓글 아이구 이런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