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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어디에 있나요
때 : 2022년 4월 2일
장소 : 서울 종로구 낙원제
대담자 : 서승현 (시인 • 문학평론가)
월조 송준영 (시인 • 시와세계 발행인)
<서승현 序文>
월조 송준영(75세. 『시와세계』 발행인) 시인은 우리시대의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해 진리를 구하고 마침내 백양사 방장이었던 서옹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재가 선객으로 50여년이 넘도록 선 수행을 해 온 선 수행자이자 시인이다. 1100 쪽이 넘는 『선, 발가숭이어록』(소명출판, 2018년)과 스스로 창안한 선시의 수사법인 『선시의 적기수사법강의』(2021년)를 펴내 주목 받은 바 있다. 올해로 칠십 중반을 맞는 송 시인을 종로구 낙원동의 『시와세계』 낙원제에서 만났다.
<송준영 前文>
문학에 있어서도 禪에 대한 관심이 보다 큰 폭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선시(禪詩)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점차 가열돼 왔다. 그러나 선시에 대한 문학적 관심만 팽배할 뿐, ‘문학 이론’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禪의 세계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 보편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시를 둘러 싼 담론이 전개되는데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禪의 본질적인 목적은 ‘시를 쓰는 것’에 있지 않고, 인간이 갖추고 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치는데 있으며, 선시는 그 깨침의 경지를 노래로 드러내 보이거나 그 길을 안내하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 방편을 문학이론에 대입해 해석하는 것이 낳을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은 문학에서 선시를 대할 때 매우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선시를 문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선(禪)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결론에 도달된다.
서승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으로 인한 제약이 이제는 많은 부분에서 풀리고 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태입니다. 세계적인 혼란기 속에서도 한국 현대선사에서 선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시 전문 계간지 『시와세계』의 발행인이며 선시에 독보적인 자생 선시론과 선시의 수사법을 창안하신 월조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건강은 좀 어떠하신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송준영 : 참 오래되었습니다. 아마 오래전 『시와세계』가 주최하는 설악산 만해마을 <만해축전> 행사에서 만난 것 같습니다. 반가워요.
코로나19가 막 시작되는 2021년 1월초 인도에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그때는 15일간 집에 머무르라는 자가격리 제한도 없을 때라서 아찔하고 용하게 피해 다녀왔지요.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활동도 점점 제한되고, 머리도 자꾸 지끈거리며 아프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게 되어 그동안 내가 못 썼던 책을 쓰면서 이겨내야지 결심하고 문집 『공책空冊』과 시집 『외발아지랑이 노래』, 그리고 선시의 수사법인 『선시의 적기수사법 강의』를 퇴고 했지요. 곧 책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코로나19가 나의 한 면을 이렇게 조종한 것 같습니다.
서승현 : 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그동안 미루어 두셨던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군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결과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시(禪詩)란 무엇입니까? 선시의 발생 배경과 특징 · 개념 · 전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송준영 : 지금은 선시라 일반적으로 통칭하지만, 원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gata)입니다. 이 말이 가타(伽陀)혹은 게타(偈陀)로 음역되었고 인도의 게(偈) 중국의 송(頌)을 합쳐서 게송(偈頌)이라 의역된 것입니다. 게송은 불전 가운데 운문으로 된 시입니다. 물론 불경의 전래로 중국에 유입되었지요. 게송이라 의역하게 된 근거는 『시경』의 「시경 육의」 가운데 가장 흡사한 운문인 송에다가 산스크리트어 게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선시로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선문에서는 게송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선시를 말하기 전에 선(禪)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겠지요. 아시다시피 선은 한 마디로 규정되어지지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선은 역사상 일컫는 불교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니 인류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다 말할 수 있겠지요. 바로 이 선을 인류의 정신 테두리로 틈입시킨 후예들에 의해 정립시킨 원조, 석가조차도 『화엄경』에서 “신기하고 신기하다. 모든 생물 무생물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구나.”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불성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성품’을 말합니다.
선(禪)은 바로 고요에 들어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 자성(自性)을 보았을 때, 견성(見性)이라 하며 깨달았다는 각자(覺者)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각자가 붓다(Budda), 부처입니다.
선(禪)은 불교의 계(戒) ‧ 정(定) ‧ 혜(慧) 세 가지 배움 가운데, 정(定)에 해당합니다. 정(定)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āna가 선나(禪那)라 음역되어 약칭 선(禪)이라 불리게 됩니다. 곧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 정(定)이라 의역되어졌습니다. 이 의역에서 보다시피 선(禪)은 ‘생각을 고요에 들게 한다.’, ‘생각을 닦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 ‘고요에 들게 하여 생각을 닦는 것’에 시(詩)라는 단어가 합쳐져 선시(禪詩)가 된 것입니다. 고요에 들어 생각을 닦는, 혹은 닦은 이런 노래가 게송(偈頌), 선시(禪詩)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선시(禪詩)의 기원이 된다는 말은, 오늘날 선시(禪詩)는, 아니 선종(禪宗)의 뿌리는 인도의 불교에서 잉태되어졌다고 하는데, 인도에는 오늘날과 같은 선(禪)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물론 내용상 말입니다. 오늘날 선은 깨달음을 닦는데 적극 동참하여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수레이며 뗏목입니다. 수레나 뗏목은 그 필요가 다했을 때는 제자리를 지킬 뿐이지요. 선종(禪宗)은 불교가 중국에 뿌린 종자가 발아하여 중국, 우리나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땅, 동북아 사람의 손에 의하여 다듬어진 명상법입니다. 오직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다른 명상과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명상하여 깨달음과 내가 합일됨을 이르는 것을 선(禪)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되었지만, 오늘날 새로운 사상으로 정신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선(禪), 선종(禪宗)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을 중시조로 하는 사상 집단임이 분명합니다. 이 혜능선(慧能禪), 곧 조계선(禪)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자성게(自性偈)의 핵심인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시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서승현 : 선시는 환상의 시로 느껴져 왔습니다. 특별하여 평범한 사유로 잡히지 않는 시로 여겨져 온 것 같습니다. 선시를 크게 불교시의 범주로 보았을 때, 교시(敎詩)와 선시(禪詩)가 갖는 특성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시가 갖는 일정한 틀인 「선시의 적기수사법」을 창안하신 공로로 제16회 <유심학술상>을 수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을 토대로 한 선시를, 선생님께서 오랜 세월 가다듬고 익혀온 선공부로 정리하여 다시 창안하셨는데, 선생님께서 창안하신 「선시의 적기수사법」에 대해 듣고 배우고자 합니다.
송준영 : 선시는 보이지만 들리지 않는 시, 들리지만 내용을 모르는 시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이 오랜 동안 정상성定相性(서양에서 발전되어 온 과학과 이성, 이원론적인 사고의 범주를 말한다.)적인 사유로 인해 다져졌기 때문입니다. 서양은 물심이원론에 의한 분석과 논증에 의하여 지식이 발전 되었고, 동양에서는 스스로 직관한 공부, 깨우침을 중히 여겨온 전통이 있습니다. 선시를 어렵게 여겨 온 이유는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학교에서 가르쳐 온 서양의 물심이원론적 학습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고정시키는 정상성에 의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선시를 불교시의 범주로 볼 때, 교시(敎詩)와 선시(禪詩)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교시는 불교의 현상적 교리를 노래하고 교리를 전도하기 위해 지어진 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교시는 다른 종교의 종교시와 마찬가지로 현금 시단에서 논의 대상으로 미미하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선시가 생명 그 자체를 움직이는 그대로 포착하려고 하는데 비해, 교시는 움직임의 흔적을 지적(知的)으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곧 선시는 생명의 최고를 구체적인 것, 실제적인 것 가운데 구현하려 하고, 교시는 그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 상대적으로 대상화하여 눈앞에 세계를 고착화하고자 애쓰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집단화된 종교의 정신세계와 선사상과의 차이에도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선시를 불교적 범주에 두고 논의하느냐, 불교 밖에서 논의하느냐에 따라 주제의 흐름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일체의 삼매가 선적이다’ 하는 경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성불하고 있다는 화엄법계관(華嚴法界觀)을 벗어날 때, 그 진리의 세계에서 숨죽인 채로 얼굴을 드러내는 선(禪)을 우리들이 논의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불교에서 파생시킨 선종과 그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탐구하고 발전 계승한 선사들의 깨달음을 이룬 후, 선(禪)에 관한 이야기인 선화(禪話)와 선시를 우리들은 보게 됩니다. 죽음의 언저리를 몇 번이고 돌고 돌아 나오는 묵조선(黙照禪). 세계의 근저를 고요로 접근하기보다 활활발발(活活潑潑)한 적극적인 자세, 행위, 사유와 행동이 일치되어 화산으로 폭발하는 간화선(看話禪). 이 간화선자들이 개발한 말머리(話頭)인 1700공안公案. 이러한 배경의 밑바탕에는 생명의 근원인 자성을 철저히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근원과 고뇌에서 벗어나겠다는 강한 의지에 의한 의심이, 마침내 그 의심에서 벗어난, 선자(禪者)들의 깨달음이 선시를 형성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불가분의 관계들이 총체적으로 모여 선시의 배경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승현 : 선시가 문학에 끼친 영향은 어떠한지요, 또한 선시는 현재 한국 문단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송준영 : 김춘수 시인은 말년에 우리나라 당대 시들을 분류한 실천 비평서인 『김춘수사색사화집』을 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시들을 4가지 유형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전통 서정시의 계열. 둘째, 피지컬한 시의 계열. 셋째, 메시지가 강한 시의 계열. 넷째, 실험성이 강한 시의 계열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신라나 고려 때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역사가 이어지는 선시 계열은 어디로 갔는가? 혜심의 게송, 태고나 나옹의 선시, 서산과 경허의 우리 체형과 자연에 꼭 맞추어진 선시의 그 맛은 어디로 갔는가? 하는 의아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신라시대의 삼국유사와 균여전의 향가 25수와 고려시대의 가요 등 고전적 문학은 계승이 끊어진 것에 비해 선시는 한 시대도 빠짐없이 우리민족의 향상된 정신을 언어로 표현하여 왔습니다.
선시의 언어는 직관과 직면의 언어로, 의미를 해체하고, 사물로 말합니다. 고려 후기, 초조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의 『무의자시집』에 400여 수의 선시와 그가 엮은 『선문염송집』은 현재까지도 선시를 공부하는 데 중요한 텍스트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연(1206-1289), 원감충지(1226-1292)를 비롯한 송광사의 16국사, 고려 말엽 삼화상으로 불리워지는 백운경한(1298-1375), 태고보우(1301-1382), 나옹혜근(1320-1377)이 있고.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가 많이 위축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에 나옹의 법제자인 무학자초와 그의 제자인 함허득통, 매월당 설잠, 일선, 영관, 청허휴정(1520-1604), 사명유정(1544-1610), 허응보우(?-1565), 소요태능(1562-1649)등을 들 수 있고, 후기로는 편양언기, 환성지안, 완당 김정희, 초의의순(1786-1866), 보월거사 정관(?-1862)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현대에 선시인으로는 경허, 용선, 만공, 한암, 경봉을 들 수 있고, 한글 현대선시로 만해, 서정주, 이승훈 등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문단에서는 그저 선시란 이름만 있고 선시의 문학사적 의의나 선시에 대한 논의는 미미하며, 수사법은 정리조차 되어있지 않았고, 대략 선시의 수사나 선미는 위의 사색四色의 시들 속에 녹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떤 위치라 할 것도 없는 처지입니다. 禪은 현대시에 조금씩 녹아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선시와 서구적 현대시가 반상합도(反常合道)에 의해 격의되는 통찰의 시선, 집요한 전문가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서승현 : 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시는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역사성이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선생님께서는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禪, 초기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禪, 발가숭이어록』등을 출간하셨습니다. 이 저서들은 그간 선시에 대한 문단의 관심을 총 결산한 느낌을 줄 정도로 범위가 방대한 노작들입니다. 이렇게 힘든 책을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송준영 : 열여덟 살 때 영주 부석사에서 발심한 이후, 마흔을 훨씬 넘어 서옹스님께 인가를 받았습니다. 선 수행과 문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시를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시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생사를 걸고 선의 문을 두드린 사람만 알 수 있는 ‘일물(一物)’이 있습니다. 일물도 아닌 무일물이란 언구도 있습니다. ‘무일물(無一物)’이 빠진 상태에서 선시를 재단하는 것은 사구(死句)를 한 번 더 죽이는 꼴이랄까요? 제가 본, 선대 조사님네의 게송을 보다 활발하게 풀어 보고 그 의미를 여러 사람과 함께 이해하며, 혹 ‘아하’ 하고, 무릎을 치는 풍광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이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꺼운 책들로 묶여지게 되었습니다.
서승현 : 선을 공부하고 선시를 대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는 말씀이지만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선생님께 다시 한번 경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선시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난해하고 어렵다고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의 저서를 읽고 나면 이해하기가 한결 쉬워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창안하신 『선시의 적기수사법 강의』가 곧 속간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의 수사법을 강의한 책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여기에서 선생님께서 창안하신 선시의 수사법을 가볍게, 아니 쉽게 풀어 주시면 어떠신지요?
송준영 : 선시는 내용상으로는 선사상을 시적으로 표현한 언어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곧 선수행자들의 선적 체험, 선수행으로 체득된 오도의 경지를 표현한 시입니다. 선시의 수사법으로는 압축, 절연, 기상, 모순, 병치, 사물의 가탁에 의한 형상화 등 현대시의 수사법과 거의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특히 선시에서 종횡무진으로 나타나는 수사법은 적기어법(賊機語法)인 적기수사법(賊機修辭法)입니다. 세분하면 선시의 반상합도(反常合道), 선시의 초월은유(超越隱喩), 선시의 무한실상(無限實相)이 그것이지요.
선시의 반상합도란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하는 일상을 돌이키고 뒤틀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융통하고 회감하여 수승된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수많은 선시가 거의 이런 수사법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예로는 부대사가 노래한 “빈손에 호미 들고” 나 “다리는 흘러가고 물은 흐리지 않네”하는 시행과 조선시대 소요 태능의 “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 간다 / 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을 밭 간다”라는 시행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바로 선사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반상합도에 의한 빼어난 세계이지요.
선시의 초월은유란 전제의 꼬리와 후제의 이어짐 사이에 몰록 솟는 일구일행(一句一行)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체의 실상과 연계된 도리를 떠오르게 합니다. 바로 직면(直面)입니다. 이것이 선시의 초월은유이고 무한실상의 본체입니다. 이 일구일행은 문장에서 앞과 뒤, 양변의 어깨를 누르고 올연히 솟는 내면으로, 쌍방에 관계 짓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는 초월을 직면하게 합니다. 곧 A=Ā가 됩니다. 근래 포스트모더니즘 시에서는 치환은유보다 병치은유가 더 많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선시에서는 초월은유가 발견되지요. 그 이유는 A=A, A=B라는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논리와 A-B로도 나타낼 수 없는 선의 도리에 의한 선사상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양변의 견해를 모두 벗어나는 반동일성적이며 찰나를 직면하는 섬광을 만나게 됩니다. 초월의 비유, 이 문장을 도식화하면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다’라는 A=Ā 비유상태를 말합니다. 선시의 용례로 금강경 오가해의 야보송을 보겠습니다.
남산에 구름일고 북산에 비오니 雲起南山雨北山
나귀의 이름과 말이란 글자가 얼마나 많은가 驢名馬字幾多般
청하노니 넓고 아득한 무정수를 보라 請看活澔無情水
몇 곳이 모가 나고 몇 곳이 둥글던가 幾處隨方幾處圓
위의 시 2행 “나귀의 이름과 말이란 글자가 얼마나 많은가”와 4행 “몇 곳이 모가 나고 몇 곳이 둥글던가”를 살펴볼 때 2행의 전제와 4행의 후제 사이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청하노니 넓고 아득한 무정수를 보라”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에서 벗어난 일상적인 오늘이 비일상적인 경험이 되는 찰나와 같은 투명한 한 구, 한행이 찾아들 때, 이것이 초월은유라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시의 무한실상이란, 서구의 상징주의자들은 일체 현상세계가 허구세계이며, 궁극적으로 상징세계로 간주합니다. 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서구의 상징이란 색이나 가상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만물을 뜻합니다. 곧 공(空), 실상(實相), 본체(本體), 본성(本性)과는 상대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단어입니다. 선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하지 않습니다. 곧 실상이란, 상징에 남아있는 논리적 고리를 단절시킴으로써, 제자리로 환지본처하게 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표징일 뿐입니다. 따라서 선시는 많은 생각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직관시킬 뿐입니다. 어디든지 편재해 있고 딱 떨어져 있는 이 세계에 현현하는 상(像)을 무한실상이라 칭할 수밖에 없겠지요. 용례로 효봉스님의 오도송을 읽어 보겠습니다.
바다 밑 제비집에는 사슴이 알을 품고 海底燕巢鹿抱卵
불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火中蛛室魚煎茶
이집 소식을 누가 알리오 借家消息誰能識
흰 구름은 서에서 날고 달은 달려오네 白雲西飛月動走
서승현 : 현대시를 쓰고 있는 입장에서 반상합도, 초월은유, 무한실상 등 등적기수사법(賊機修辭法)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선시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습니까? 우리나라 선 시인으로서 고려 중기에 진각혜심이 있는데, 그 뒤를 잇는 선시 시인들의 명맥을 알고 싶습니다.
송준영 : 말씀드렸다시피 현 우리 문단에서는 선시란 이름만 있고 선시의 문학사적 의의나 선시론은 미약합니다. 선시가 잉태된 인도나 중국에서조차 선시의 수사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서양과 같은 논증이나 논리적인 인식으로 시론화하고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물심이원론에 의한 서구에서는 선의 수사법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동양, 특히 선문에서는 감상이나 시설에 의한 느낌은 직관이나 직면에 의해서 읽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선시의 수사법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현 세계는 영육이원설, 곧 물심이원론에 의한 세상이 되었지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우리가 오늘날 배우고 익혀온 것은 서양문화로 얽혀진 까닭에 선시의 수사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시의 수사나 선미는 위에서 말한 사색(四色)의 시들 속에 녹아 있을 뿐, 어떤 위치나 영역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선이나 현대시에 대한 반상합도(反常合道)된 통찰의 시선과 집요한 전문가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시는 그저 하늘에 구름같이, 햇살같이 느껴지고 있지요.
우리민족의 600년을 이어온 비상된 민족의 혼인 선시가 교과서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선시인들이 한 대도 거르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는데도 그러합니다. 고려 중엽, 선의 초조라 할 진각혜심(1178-1234)은 그의 『무의자시집』에서 400수가 넘는 선시를 남겼으며, 선시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선문염송』 편저는 그 이후 선시인들의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고려 말 백운경한(1298-1375), 태고보우(1301-1382), 나옹혜근(1320-1376), 그리고 조선 초 함허득통(1376-1433), 매월당 설잠(1435-1493), 조선 중엽 청허휴정(1529-1604) 그의 제자 사명유정(1544-1610) 소요태능(1562-1649), 허옹보우 등과, 조선후기에 편양언기(1581-1644) 환성지안(1664-1729), 완당 김정희(1786-1856), 보월거사 정관(?-1862), 초의의순(1786-1866) 등과 근현대에 많은 선시를 써온 경허성우, 만공월면, 용성진종, 한암중원, 원광경봉과 현대에 한글 선시인으로는 만해 한용운, 설악무산, 서정주, 이승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서승현 : 우매한 질문이 되겠지만, 오늘날 선시 작가가 있다면 그는 깨달음의 체험을 했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시각에서 ‘선시 작가’를 규명할 코드가 있는지요?
송준영 : 많은 이론과 주장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다’ 하고 통증해야 하겠지만,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기의(의미)/기표(표현)’로 나눌 때, 의미상 완전히 선을 실참실수한 선객이어야 가능하며, 한 쪽으로는 동양의 시론과 정통적인 수사법에 밝아야 하며, 또 서구의 시론과 수사법에 의해 작시를 할 수 있는 분이라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내적으로 선불교에서 이르는 적조(寂照)가 동시(同時)임을 철증(徹證)한 사람의 몫입니다. 외적으로는 동서양의 수사법으로 시를 작시하며 시론에 밝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선시의 종류를 크게 선리시(禪理詩), 선취시(禪趣詩) 등으로 분류하여 왔습니다. 선도리에 밝으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앞서 얘기한 선미, 청량, 명징, 단순함이 시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선취시 풍이 오늘날 대다수 선시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도리의 선리시와 선취향의 선취시로 나누어 볼 때, 선리시보다 선취시가 휠씬 대단한 것입니다. 선이 가득 차서 우러나고 토해 나오는 이런 시가 선취시이기 때문입니다.
서승현 :선리시, 선취시를 많이 접한다면 깨달음과 함께 정신도 맑고 명징해 질 것만 같습니다. 복잡하고 변화가 많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선적인 삶’과 ‘시적인 삶’을 정리해 주신다면 거기서 ‘선시 같은 삶’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송준영 : 우리는 많은 분류 속에, 우리의 삶을 전성전일(全性全一)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확암 선사의 <십우도> 제8 그림에 ‘입전수수(入廛垂手)’란 말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문에서는 ‘이류동행(異類同行)’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동사섭의 보살도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굳이 ‘선적인 삶/시적인 삶’ 이런 양분된 사유 자체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 의해서 이지요. 우리 선문에서는 예전부터 이런 나눔은 없었습니다. 불이(不二)라 하지 않습니까?
잠시 서구의 형이상학의 이념적인 흐름을 짚어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Idia)나 테카르트의 사유주체(Cogito), 루소의 자연의 말(Logos), 헤겔의 관념론적 절대인식과 후설의 현상학의 의식주체와 직관 등, 모든 철학적 체계는 지금의 형이상학의 주체를 형성한 전부입니다.
그러나 근세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라깡이나 데리다 등에 의해 이런 문제가 해체 비평되고 있고, 이것은 우리 선적 사유와 유사한 것이 발견되곤 합니다. 곧 형이상학론자들은 자기 동일성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존재한다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유는 선문에서 말하는 분별간택심의 본향을 이르는 말이라 읽힙니다.
살펴보면 정신/물질, 자아/타자, 긍정/부정, 본질/응용, 적/조 등 이 모든 분별을 앞 쪽의 정신, 자아, 긍정, 본질, 적에 포인트를 두고 상호 차례가 관념적으로 합리화시킨 체계이지요. 그렇지만, 일찍이 6조 혜능은 삼십육대(三十六對)의 상대적 관념을 모두 불이(不二)로 말씀하신 가르침의 유훈이 있듯이, 우리 선불교에서는 고요(寂)가 있는 다음에 되비침(照)이 있음이 아니라, 적조동시(寂照同時), 고요(寂)와 적(照)이 동시에 있는 것으로 통견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객/시인‘이 따로 있음이 아니라, 선객이면서 시인, 이것이 선시적인 불이(不二)의 삶일 것입니다.
서승현 :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선 수행자와 선시론가 이전에 제6회 <박인환문학상>과 제17회 <현대불교문학상>, <유심학술상>을 수상하셨으며,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습득』, 『조실』, 『물 흐르고 꽃 피고』, 『외발아지랑이 노래』 등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하신 시인이십니다. 선생님의 시세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편한 예시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준영 : 참 힘이 드는 질문입니다. 그저 이렇게 쓰고 싶고, 제 공부가 이렇게 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선 고전선시와 현대선시 두어 편을 시설(詩說)하면서 근래에 쓴 어설픈 저의 시를 소개하여 이 어려운 질문을 피해 가고 싶습니다.
불교의 무아사상이나 공사상은 같은 말로써 모두 자성(自性)이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일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으로 규정될 때에는 우리가 보배로 여기는 고전인 성경이나 불경을 반드시 귀중한 정신문화의 자산으로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책은 삶과 앎의 지침서이지만 불을 만났을 때는 화재의 진원지가 될 수 있고, 만년필 또한 글을 쓸 때는 반드시 필요한 필기도구이지만 사람의 눈을 찌를 때는 필살의 흉기로 변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본래 무자성(無自性)인 무아(無我)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러한 경구가 무수히 나타납니다. ‘부처가 말씀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13 「여법수지분」)와 같은 구절이 「14, 이상적멸분」, 「20, 이색이상분」, 「23, 무소화분」, 「30, 일합이상분」 외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가 됩니다. 곧 A=Ā 가 됩니다. A를 소, 연필, 책 무엇을 넣어도 똑같이 풀이 됩니다. ‘소는 소가 아니라 그 이름이 소다’ 저 봄날 밭에서 밭갈이를 하는 소는 도살장에 멀건 눈을 뜨고 죽어 있는 소이고, 또 소라 부르는 우리의 소는 진흙소일 수 있고 바다 밑을 달리는 소일 수도 있다는 표현이 가능해 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천지만물이 무아(無我), 즉 무자성(無自性)일 때만 가능해 집니다. 저의 시를 소개하기 전에 이런 부분을 잘 드러낸 고전선시와 현대선시 몇 수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水上泥牛耕月色 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 갈고
雲中木馬掣風光 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을 끌고 가네
威音古調虛空骨 위음의 옛 곡조 허공 속 저 뼉다귀라
孤鶴一聲天外長 외로운 학 울음 하늘 밖 길게 가네
- 소요 태능 「종문곡」
위의 게송 「종문곡(宗門曲)」은 서산대사의 법자인 소요가 선가의 대의와 이치를 밝힌 노래입니다. 1행과 2행 “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 갈고(水上泥牛耕月色) / 구름 속 나무말이 풍광을 끌고 가네(雲中木馬掣風光)”은 읽자마자 ‘꽝’ 우리의 오랜 고정된 관념을 산산이 박살을 내고 맙니다. 우리는 ‘진흙소’, ‘나무말’이란 시어에 황당함을 느끼게 되고 광자(狂者)의 헛소리로 들릴 뿐 아니라, 이어 ‘진흙소가 달빛을 간다’ 나 ‘나무말이 구름 속 풍광을 끌고 간다’는 이 두 행이 우리를 적기해 버려 멍멍함에 갇히게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앞의 『금강경』에서 본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다’ 즉 A=Ā를 돌이켜 봄으로 약간의 숨을 고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1행과 2행은 선가, 아니, 선의 내장이며 골수입니다. 곧 무아나 공, 중도 자체의 표전表詮인 것입니다. 3행 위음威音은 위음왕불威音王佛 공겁空劫에 맨 처음 깨달은 부처를 말합니다. 바로 이것마저 ‘허공 속에 뼈일 뿐이라’는 천하를 덮는 기백과 밝고 투명한 눈동자를 만나고, 이 안정眼精은 우리에게 실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외로운 학 울음 하늘 밖 길게 가네(孤鶴一聲天外長)”라 하는 마지막 행은 앞의 1행과 2행의 무아 공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바로 ‘비 쏟아지는 저녁 유기견이 눈 위에서 눈을 묻고 있다’와 다를 것이 없음을 알면 그 뿐입니다.
붓다가 설한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라 그 이름이 불법이다”라는 즉 ‘A는 곧 A가 아니고 그 이름이 A다’로 읽히며, A=Ā로 회통되어짐을 살펴봤습니다. 곧 ‘삶’이란 A와 ‘죽음’이라 불리는 Ā로 회통되어 집니다. A는 A가 아니므로 A가 됨을 이해 돕기 위해 설악의 「무자화」 한 수와 이승훈의 시 「비누」를 읽고자 합니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설악무산 「무자화6 - 부처」
위의 시 ‘뗏목다리’도 늘 우리가 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뗏목다리가 아니라 그 이름이 뗏목다리이듯이, 소요의 「종문곡」 1행의 “물 위에 제비집”은 우리의 정상화(定相化)된 ‘처마 밑 제비집’이나, ‘은행나무 위 제비집’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곧 Ā의 ‘바다 밑 제비집’이듯이, 동시에 우리가 늘 보고 알고 있는 ‘뗏목다리’인 것입니다. 일상적인 육식(六識)으로 만나는 A의 ‘뗏목다리’인 동시에 ‘뗏목다리’는 무일물(無一物)인 무한실상의 뗏목다리이어서 앞의 소요의 ‘달빛에 밭가는 물위에 진흙소’ Ā이며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인 A=Ā이니, 곧 무한실상의 진풍광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뗏목다리’는 설악의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며 시편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를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뗏목다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설악의 「무자화6 - 부처」는 무아의 도리를 ‘뗏목다리’를 주제로 펼쳐 보이는 함축의 극치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 전체를 ‘흐르게’, ‘범람하게’, ‘떠내려가는’ 의 연기법을 그리고 있습니다. 곧 보이지 않는 A=Ā의 연속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보이는 A를 보이지 않는 Ā로 숨기면서 드러나게 하는 ‘무아’ 한 소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의 흐름은 문장의 긴장과 부조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연의 ‘뗏목다리’는 장마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일 뿐임을 읊고 있습니다.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는
凡所有相 무릇 있는 바의 상은
皆是虛妄 모두 허망한 것
若見諸相非相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봄은
卽見如來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제상(諸相)인 A와 비상(非相)인 Ā가 회감 회통하는 봄(A=Ā), 곧 여래를 봄이라.
이것을 설악은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를 주제어로 떠내려감은 떠내려가지 않음을 버리지 않음이어서 연기법을 단 3행으로 절대 현재의 이 순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누는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가랑비 내리던 아침 그대와 길을 떠났지 비누를 가방에 넣고 떠났던 가? 오늘도 가랑비 온다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 밤이면 하얀 눈발 어둠 속에 비누가 반짝인다 비누는 마루에 있고 거실에 있고 화장실 거울 앞에 있지만 비누는 과연 어디 있는가?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
- 이승훈 「비누」
이승훈의 시 「비누」는 현대선시로 분류되며, 또 전위 선시로 일컬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입니다. 전위선시는 한자로 된 고전선시에 주수사법인 적기수사법과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비유법을 활용한 선시를 말합니다. 우선, 앞의 시는 자성이 무자성임을 철저히 인식할 때에만 가능한 A=Ā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불교의 기본 경전인 『반야심경』의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바로 현상(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금강경』의 주수사법인 “여래가 말씀한 제일진리는 곧 제일진리가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진리이다.”(14, 離相寂滅分)라는 선시의 적기수사법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매끄럽게 흐르는 비누는 가랑비고 하얀 눈발이다. 비누는 마루에 있고 거실에도 있고 어두운 밤 산속에 있’는 이 비누를 우리는 그저 비누라 부를 뿐입니다. 원래 무자성인 기표 비누는 여러 인연과 만나면서 한없이 미끄러져 내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저 비누라 부를 뿐입니다. 앞의 『금강경』 「이상적멸분」의 문장에 넣어 보면 ’비누는 곧 비누가 아니라 그 이름이 비누다‘가 됩니다. 비누란 그 이름이 항상(恒常)하지 않고 인연과 상황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는 것입니다. 시 「비누」는 우리의 존재가 항상(恒常) 하지 않으므로, 듀카(duka), 고(苦)인 일체개고(一切皆苦)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함을 체달하므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든다는 불교의 징표인 사법인(四法印)이 시화(詩化)되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기본 연기설로 살펴보아도 그 의미가 잘 나타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의 근본 기의는 ‘이것’과 ‘저것’만 있고 ‘이것’과 ‘저것’이 없고 또 ‘이것’과 ‘저것’에 의해 생겨나고 ‘이것’과 ‘저것’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상의성(相依性), 다만 상호의존에 의해 존재와 법계가 운행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바로 무아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화자는 오직 ”아마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으리라” 무엇이 앉아 있는가. 적기수사법인 선시의 무한실상입니다. 이제 저의 시 두 편을 가볍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양이는 지나가는 바람이고 고양이는 떨어지는 꽃이고 고양이는 날아다니는 풀솜이고 고양이는 돌 이고 구름이며 짚신이니 고양이는 다시 머리에 인 짚신이고 구름이고 돌이며 풀솜이고 지는 꽃님이 어요.
4월 창밖 교동초등학교 정원 복사꽃 살구꽃 만발하여요.
키 낮은 조팝꽃나무 하늘을 막네요, 부끄러워요, 부끄러워요.
- 송준영, 「透寫 -남전참묘화를 보다」
돌 하나 놓여 있다
돌 하나 옆에
고개든
금잔화
한 포기 피어 있다
- 송준영, 「晴空」
서승현 : 禪과 서구의 영향, 포스트모더니즘 시와의 차이점과 유사성, 그리고 선시가 갖는 의미와 가치는 어떠한지요?
송준영 : 선시와 서구의 아방가르드 시는 상호 시에서 표현되어지는 수사가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사실 그 속내를 파헤쳐보면 전혀 다릅니다. 禪과 다다이즘은 형태상 기존의 모든 것을 일단 부정한다는 것에는 같다고 볼 수 있으나, 깊이 들어가면 이런 행위, 글쓰기 후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느낌, 그리고 그 영향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행위자의 근본 마음자세 역시 판이합니다. 그리고 쉬르리얼리즘은 무의식 • 꿈 • 광기 • 환각 • 불가사이 등 논리적 체계로써 접근할 수 없는 의식의 이면을 추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전파된 선은 일반적으로 히피들이 일으킨 비트 선(Beat Seon)과 포스트모더니즘 시와 선이 격의(格義)되고 있는 정통 선(Square Seon)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비트 선을 말씀드리자면 미국 서부지역의 시인들이나 시파들을 개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험주의 시인들은 비평가 집단이나 대학에서 외면당했던 시인들의 작품을 엮은 도널드 엘런의 『새로운 미국시』(The New American Poetry 1960)에서는 5개의 시파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중 블랙마운틴 시파, 샌프란시스코 시파, 비트 시파들은 대부분 자유분방하여 반문화적인 지식인들로 ‘부르주아적인’ 미국 시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블랙마운틴 파는 블랙마운틴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투사 시론」을 쓴 찰스 올슨1(910~1970)이 처음 교수로 임명된 학교이자, 시인 로버트 크럴리, 던컨도 교수를 역임한 곳입니다. 블랙마운틴 파는 이들과 이곳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파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시파는 서부연안 시 대부분을 포함합니다. 동양의 철학과 종교와 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던컨과 게리 스나이더, 잭 스파이시가 있습니다.
비트파 시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시파와 1950년대에 차츰 병합됩니다. 대부분 비트 시인들은 동부 연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지하클럽에서 행해진 시 낭송 공연에서 발전하는데, 구어체적이고 반복적인 특징은 낭송할 때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 긴즈버그, 코르소 등의 비트 시류들은 1990년대 널리 유행된 랩 음악의 전신이라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근래 미국 서부지역이 동양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선사상과 선문화가 어우러짐을 개괄하여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츠끼 다이세쓰(鈴木大拙, 1870~1966)가 1934년 저술한 『선불교에세이』 3권이 지금까지 선문헌의 서구에서 고전으로 널리 읽혀졌고, 1934년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종교회의에서 강연을 한 당시, 『선불교입문』, 『선승의 수행』이 출판되어 선이 서구에서 더욱 활성화됩니다. 서구의 일부 지성인들이 고답적이고 17세기 청교도의 권위적인 도덕 강요에 염증을 느끼던 터에 본래 자리인 자유로 귀향하자는 선(禪)은 이들에게 탈출구로 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 민족이 같이 모인 미국사회는 전통적으로 획일화된 정체된 사회라기보다는 훨씬 다양한 개성의 문화와 다른 사유가 뒤섞인 샐러드 볼 같은 사회입니다. 때문에 출렁거리는 유동성과 자유로우며 진취적인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 전해진 선은 비트 선(Beat Seon)과 정통 선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비트 선(Beat Seon)은 ‘샌프란시스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히피들이 일으킨 서구 선문화의 발상입니다. 히피들은 틀에 갇힌 가치가 아닌,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따라 개성의 표현, 기성사회의 성적 억압, 관습적 도덕 해체와 개방, 적성의 표현 등을 통한 공동체를 건설하여, 평화와 사랑, 자연회귀, 보다 자연스러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으로,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하나, 미국으로 전해진 정통 선(Square Seon)은 20세기 후기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과 격의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은 대중주의 의미의 해체, 이데올로기의 약화, 문화물의 깊이 없음 등이 그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이합 핫산(Ihab Hassan 1925~ )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1.불확정성 2.단편성 3.탈정전화(脫正典化) 4.주체와 깊이의 상실 5.현전의 불가능성과 재현의 불 가능성 6.아이러니 7.혼합성(混合性) 8.축제화 9.행위와 참여 10.구축성(構築性) 11.내재성(內在性)
이와 같이 세분화된 특징은 1,500년 전부터 동양에서 이어온 선의 특징과 아주 밀접하고 가깝게 연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선의 사구게(四句偈)로 정립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대한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특징인 아이러니 역시 선의 적기수사법(賊機修辭法)과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가 심화되어 오매불망(寤寐不忘)의 경지에 들고, 1700공안을 투과한 후, 언어로 헤아려 보면 언어유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지막 특징인 내재성은 마조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고요. 내재란 초월이며, 곧 초월의 일반화, 구체화는 평상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서구의 물심이원론과는 반대되는 이론의 도입이기 때문에 그동안 행해온 서구적 사고의 습관으로는 편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선의 무아, 무상, 자재는 우리의 본래자리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돌아가기에 선이 보여주는 법열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시대에 선(禪)과 포스트모더니즘과 격의는 현대인에게 신성하고 새로운 삶을 인도할 것이라는 기대감, 이것입니다.
정통선시와 포스트모더니즘 시와 상호 격의에 의한 오늘날의 선과 선시는 서구의 새로운 사상과 실험적인 시의 한 장르로 발전될 것이라고 예견해 봅니다.
서승현 : 코로나19와 잇따른 전염병의 창궐로 유래없이 힘들고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거침없이 활달하게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를 맛 본 느낌입니다. 선시를 통해 보잘것 없는시 세계의 확장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좋은 말씀과 좋은 선시를 많이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
그렇습니다. 서구적인 수사법을 배우고 익힌 것에, 선의 세계를 같은 문장과 언어 안에서 만날 수 있도록 애쓴, 여러 시들을 묶어 시집을 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꼭 쓰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생된 선시의 수사법입니다. 이에 관해 저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역대 한자로 쓰여진 선시를 ‘고전선시’, 근대에 이르러 한글로 쓰여진 선시, 즉 비교적 전통적인 수사법에 의한 ‘현대선시’와 서구의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사법으로 쓰여졌으나, 단순 · 청량 · 명징과 같은 고전선시에서 나타나는 선미가 풍기는 실험적인 시를 ‘전위선시’(Abant garde-Zen poetry)로 명명하고, 당대의 시인들의 시를 분류하여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더욱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선시론』과 선시의 수사법을 정리한 『적기수사법 강의』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1년 가까이 코로나 19를 격퇴하기 위해 발심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가 발행인과 주간을 맡고 있는 『시와세계』는 지금까지 76권의 책과 『현대선시』 동인지 10여권을 내었습니다. 이 책의 목표와 목적은 서구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정신적 산물인 선세계와 격의(格意)하므로 이들을 같은 영지(領地)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문화충돌에 의해 반상합도된 새로운 세계, 그 새로운 시세계를 향한 갈망에 의해 만들어진 시와 시론지입니다. 금년에는 더욱 심화시켜, 대들보가 될 수 있도록 충심으로 각고(刻苦)하려 합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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