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빵이 하나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단단해지고 덜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구워진 빵
빵집
-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 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봤지만 빼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새우깡 예찬~!
새우깡의 별명을 아는가? King of snack 혹은 감미류의 지존, 깡 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새우깡이 100원으로 시작해서 현재의 400원에 이르렀지만 그 가격에 대해서 불만은 없다. 누가 생각해도 가장 양심적인 가격대, 용량이다. 요새 봉지에 반만 들은 스낵이 500원에 난무하는데 다들 정신차리고 새우깡 만큼만 꽉꽉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분에 대해서도 새우깡은 단연 최고의 과자다. 새우깡 특유의 짭짜름한 맛은 그 어떤 스낵에서도 흉내낼 수 없다. 건방진 몇몇 메이커들이 짜가리 새우깡을 만든 시절이 있었는데 다들 오리지날 새우깡에서만 맛 볼수 있는, 황금비율의 짭짜름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었었다. 최근에는 농심 내부에 더러운 자식이 생겼는지. 시건방진 짓을 한다. '알새우칩' 이란 것인데 아마도 이 유구한 세월동안 지존의 자리를 지킨 킹오브 스낵의 자리를 탐내어 포테이토 칩이 난무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른답시고 감히 새우를 칩으로 만들어서,
마치 새우깡의 후속작인 양 행세하는 것이다.
그러나..새우라는 엄청난 메리트를 가졌음에도 그 맛이 부실하고 짭짜름함의 극의에 도달하지 못하여 '케찹이나 아일랜드 소스'에 찍어먹으면 맛이 좋다는 점 따위나 이용하여 몇몇 우민들에게 팔아먹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새우깡은 묵묵하게 지존의 풍모를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오징어 먹물 새우깡' 이란 것도 있었다. 이 제품은 정말 새우깡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시대착오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징어맛이 난다면 오징어깡 이란 말을 붙일 것이지, 단지 모양만 흉내내어 감히 지존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건 왜 인가? 결국엔 역사의 쓰레기로 잊혀진 것이 되어 버렸지만 잠시나마 몇몇 우민들을 상대로 새우깡의 이미지를 실추 시키는 빌어먹을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400원으로 가격 인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우리의 지존은 소홀함이 없었다. 몇 몇 쓰레기 스낵들이 가격인상의 핑계로 참새눈물만한 양을 늘렸느니 봉지가 왕따시만큼 커졌느니 하지만 새우깡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여 등푸른 생선에 들었다는 DHA를 첨가하여 자라나는 새싹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않았으며, 아직!도 황혼의 나이에 자신을 사랑하는 중.노년 층을 위해 치매방지 차원에서 서비스를 하는 셈이다. 또 마케팅은 어떠한가? 새우깡의 CF송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요... 중략 ... 누구든지 즐겨요 농심 새우깡 꽤 오래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일관된 자세로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가사 구구절절 가슴에 와닿지 않는 부분이 없다. 세대간의 벽을 잊게 만드는 구절 (아이손 어른손 ~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만치 자연스러운 친숙함.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로써의 프라이드를 나타내는 애국심. (동해바다 새우깡~ 서해바다 새우깡~ / 남해는 새우가 안잡히던가...) 최근에는 SES라는 소녀들이 불러서 더욱 감칠맛 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만약에 SES가 새우깡 노래를 싱글 앨범으로 낸다면 꼭 살 생각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애국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술자리에서도 새우깡은 뗄레야 뗄수 없는 안주다. 조금은! 소양이 부족한 업소에서는 새우깡을 제공하지 않는곳이 많지만 맥주와 더불어서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안주로도 정평이 나있다. 소주와는 다소 소원한 관계이긴 하지만 깡소주 마실때 곁들여 먹어주면 입맛을 잃지않고 같은 페이스로 술자리에 임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우스개에는 담배를 피는 학생을 감별하기 위한 용도로 새우깡을 잡게 하는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직접 자신을 실험해 본다면 그 우스개를 단순하게 넘길수는 없다. 왜냐? 새우깡이 가진 크나큰 메리트는 단연 '짭짜름함' 이다. 오직 이 맛때문에 새우깡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걸 털고 먹는다니 아마도 이런 우스개는 진정 새우깡의 진면모를 망각한 크나큰 과오란걸 알아야 한다. (더불어 담배를 끊으라는 메시지로 알고 넘기겠다) 가끔씩 새우깡을 먹다보면 하나 정도는 이상한게 등장한다. 생산공정의 불량율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게 '왕새우깡'과 '농축새우깡' 이다. 왕새우깡은 보통의 것 보다 2배 이상 긴 것이며 농축새우깡은 쫄쫄 쫄아서 거무티티한 빛깔이 나면서 그 맛이 3배는 진한 개체를 말한다. 흔히,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새우깡이 들어있는 봉지를 '원 오브 사우전드' 라고 하는데, 이런걸 발견하는 날이면 감격의 눈물이 말도 못하게 흐른다. 콧물도 흐른다. 훌쩍. 하지만 요즘은 생산공정의 최신화 때문인지 이 것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요 , 즉석복권 연속당첨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이 새우깡을 소유하는 자는 행운이 깃든다는 이야기다. 내가 앞으로 발견한다면 소중하게 보관할 생각을 갖고 있다. 먹고싶은 유혹에 몸서리와 소름이 두들두들 돋겠지만 미래의 자손에 알릴 사명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 어떨땐 그런 생각이 든다.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할때 새우깡이 있었다면 .. 단연 그 속에 당당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몇달전에 집안 식구들이 전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놀러가서 이틀동안 새우깡 스무봉지로 연명을 했었다. 어릴때와 달리 전혀 질리지 않았다. 놀라운 체질변화라고 새삼 감탄하며 몇 봉지 더 사서 먹었다. 후. 겨울에도 푸르름을 자랑하는 상록수 처럼 세월이 가도 변치않을 스낵의 왕으로써 영원히 국민과 함께하길 간절한 기도와 함께 새우깡에 대한 예찬을 마칠까 한다. 내가 늙으면 그때쯤엔 비아그라 새우깡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는 사랑을 바친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황인숙 시인은 좀체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는 방식도, 취향도, 생각도, 표정도, 말투도,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도. 황 시인의 절친한 후배 장석남 시인은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이제 30년이 지나가는데도 정말 안 변하는 사람이 황인숙 선배라고, 그쯤이면 도(道)의 경지라고. 새들은 변하지 않는다, 늙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새'과다.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새처럼, 그는 명실상부한 '프리랜서'로 30여 년을 자유롭게 살고 있다. 글을 쓰며(맛깔스런 그의 산문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세든 집에서 혼자 산다. 책과 음악과 식도락과 고양이(들)와 그의 단짝 벗들과 더불어 산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파두―비바, 알파마!')
타인에게 칼을 건넬 때는 반드시 칼등을 잡고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건네는 것이 예의다. 이사 갈 때 칼을 버리고 가면 그 집과의 인연을 끊고 가는 것이고, 부엌에 칼을 아무렇게나 놓으면 가족이 다치거나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칼(날)이 날카롭기 때문에 이런 금기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금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칼로 사과를 먹다가 언니에게 이 금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건만, 지금도 여전히 시인은 사과껍질을 깎던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칼로 사과를 먹으며 누군가에게 칼로 사과를 먹였던 일을 떠올린다.
이 시의 맛을 깊게 하는 건 마지막 연이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오래 되짚어 보게 하는 구절이다. 젊지 않은데도, 여전히 가슴 아플, 많은 일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칼로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칼로 주는 사과를 너무 많이 받아 먹었나 보다. 칼로 먹고 칼로 먹였던 게 비단 사과뿐이었겠나 싶다. 뭔가를 준다는 게 이렇게 위태로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그것이 사랑이든 배려든. 젊음이 아름다운 건, 가슴 아플, 많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은 그러기에 두려운 대상이다. 황인숙 시인은 여전히 젊고 경쾌하다. 계속 칼로 사과를 콕콕 찍어먹을 수 있을 만큼! 부리로 사과를 콕콕 쪼아먹는 새처럼, 아니 그의 시처럼.
감자의 맛
이해인
통째로 삶은 하얀 감자를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부드럽고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호박이나 가지처럼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도 않은담담하고 차분한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녹차 남정림
상쾌하다부드럽다
개운하다
넌 대숲을 은은하게지나는 바람
수박 남정림차마 뱉지 못했던 말들까만 씨앗으로 영글었나동글동글 속으로 익어가며속살에 숨겨둔싱싱한 생명의 알알